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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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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연재수 :
305 회
조회수 :
136,423
추천수 :
3,288
글자수 :
1,694,467

작성
22.05.28 12:00
조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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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21쪽

그리고, 또다시 작별

DUMMY

생판 타인의 일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일이, 개인에게 닥치면 비극이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옛 영화도 있었지. 그건 어쩌면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게 아닐까.


강 건너서 구경하는 절망과, 직접 느끼는 절망은 천지 차이.


세계라는 이름의 불합리한 시스템은 끝끝내 나를 상처입힐 절호의 기회를 얻고야 말았다.


마음에서부터 견고한 철옹성을 쌓았건만, 아킬레스건으로 남은 그 운명의 밤은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에, 그것만은 절대 지워버릴 수 없다.


세계에 대한 반역을 꿈꾸게 만든 계기이자, 언제나 생생한 후회를 느끼게 하는 근원. 내가 지금의 나로 있게 한 건 전부 그 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후회해도, 반성해도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잊지는 못하지만, 과거는 과거로 남겨두고 살았을 셈인데.


그날 불길 속에 잃은 '과거‘는 상상도 하지 못한 순간 돌연 나타난 것이다.


지금의 모습이 다를지언정, 세계가 다를지언정 나라는 존재의 기원은 변하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던 나는, 잠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일부 꽃은 한번 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재차 핀다고 하지.


적절한 시기에 만개하는 절망도 마찬가지로, 이로써 두 번째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었다.


◆ ◆ ◆ ◆ ◆ ◆ ◆


연방의 최종병기와 마왕의 전투는 그야말로 장관으로, 어느 쪽 할 것 없이 신화에 나올 법한 공격이 오고 갔다.


처음에는 꽤 수동적으로 스비엣의 공격을 받아칠 뿐이었던 마왕이 공격에 나서면서 둘의 공중전은 점점 열기를 띠었고, 모두 어느새 이곳이 격전지라는 것도 잊은 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승기를 잡은 칠흑의 마왕이 스비엣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으며, 전투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숨죽여 하늘의 전투를 올려다보던 이들 사이에는 환호성까지 나오고 있었다.


일부 연방군도 그 모습에 마음이 놓인 듯 덩달아 함성을 지른 이유는 통제에서 벗어나 아군을 무참히 쓸어버린 스비엣이 더는 연방군의 일부가 아닌, 적이 되어버린 탓이겠지.


그들은 첫 번째 불꽃의 예찬자ㅡ스비엣의 기원을 정확히는 몰랐으나, 아군이 이용하는 생체병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서 순식간에 발생한 아군의 희생을 보고 어쩌면 마왕보다 스비엣 쪽이 더 위험하다고 지레짐작한 것일까.


하지만 하늘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 중, 정작 곤경에 빠져버린 건 마왕이라고 바로 이해한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저건...!”


임시막사 밖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린이 앉아있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낯빛이 방금과는 확연히 달라진 걸 보고, 마찬가지로 간부용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이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린 씨?”


이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보인다는 듯, 뭔가를 뚫어져라 보던 린이 입을 열었다.


“보스의 상태가 뭔가 이상해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이스에게는 차갑게 대답할 린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물론 린은 그녀의 주인을 모든 방면에서 전적으로 신뢰했다.


혼자로 충분하다고 말한 주인의 뜻을 의심할 생각은 없었으며, 라드레이드에서는 신을 가볍게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 그가 저 스비엣을 상대로 밀릴 거라고는 선뜻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가름은 라그나로크 때 한번 죽었으며, 주인의 사역마라는 형태로 살아난 몸.


마왕 류셀과 직접 연결되다시피 한 사역마의 입장이 되면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주인의 상태가 대략 전해져온다.


사용하는 마법의 종류, 고유스킬, 생사여부등을 직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주인의 승리를 기다릴 뿐일 린이 당황한 이유는 간단했다.


익숙한 주인의 고유스킬 파장이 아까부터 전혀 전해져오고 있지 않았다.


자신조차 넘볼 수 없는 그 차원의 벽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막아 주인을 지켜주는 소중한 방패와도 같은 것.


한편, 스비엣은 가슴이 관통된 상태로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천천히 푸른 색채의 나기나타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빙창이 생성되며 그 끝을 주인에게 향하려 하는데도, 정작 그 주인은 고유스킬을 다시 발동시키기는커녕 방어마법조차 쓰려는 기색이 없었다.


일부러 적을 방심시키는 거라고 보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아, 린 씨ㅡ”


이스가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린은 공중의 전장에 뛰어들었다.


◆ ◆ ◆ ◆ ◆ ◆ ◆


부서진 얼음 파편들이 사납게 휘날리는 사이에서, 나는 멍하니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준비해둔 고유스킬은 어느샌가 이 난리통에 해제되었지만, 그걸 발동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조차 지금은 머리를 스치지 않았다.


내 눈은 앞의 스비엣을 넘어, 영원히 되풀이되는 그날 밤을ㅡ뜨겁게 불타는 생가를 보고 있었다.


서로 떨어진 기억이 연결된 이유는, 아마도 본질이 같기 때문. 하나밖에 없어야 할 것이 둘이 되었기에, 하나로 뭉치려고 공명했기 때문.


그렇다면 그녀도, 스비엣도 이 세계에서 받은 역할은 나와 같은ㅡ


“보스! 정신 차려주세요!”


린에게 껴안기다시피 하며 세게 밀리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스비엣이 이쪽으로 날려 보낸 커다란 얼음 기둥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나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참이었다. 린이 제때 구조하러 와주지 않았으면 몸이 양단되었을 것이다.


“···린.”


맑은 하늘이 담긴 푸른 두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걱정을 감추지 않는 그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나는 시선을 내렸다.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나서 부하에게 구해지다니, 이런 연약한 꼴을 보인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 순수한 두 눈을 들여다보면, 갈 곳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그녀의 선망의 대상으로서 올곧게 나아가야 할 내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여태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린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오로지 내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례인 걸 알면서도 뭔가 보스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서 난입한 점, 용서해주세요. 갑자기 멈추어 서셨던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직접 살피고 내 몸에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한 린이 스비엣 쪽을 노려보았다.


분명 아까 내게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렸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인지 빠르게 수복되고 있었다.


바로 다른 공격이 날아들지는 않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겠지. 전투는 언제라도 재개될 양상을 띠고 있다.


“보스, 저걸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외람되오나, 여기는 제게 맡기고 보스는 본대로 귀환해주세요.”


내가 말이 없자, 린이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스비엣을 막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다시금 돌기 시작한 서슬 퍼런 살기, 그리고 함께 느껴져 오는 푸른 불꽃의 열기는 스비엣이 아닌, 린의 것이다.


린의 말마따나 완전히 회복한 스비엣이 우리에게 화력을 퍼붓는 건 시간문제다.


내가 전투에서 빠지더라도 린이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겠지.


의태를 풀고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미 호각을 이루고, 아까 내가 그랬듯 빈틈을 공략하면 마무리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펜리르라는 늑대는 마수의 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니까.


하지만 지금 문제는 싸워서 이기고 말고의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네게 저걸 싸우게 할 수는 없어. 아마 내가... 아니, 나는...”


“보스?”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귀를 쫑긋하며 나를 돌아보는 린의 모습에는 의심은 단 한치도 없고, 내 안위를 걱정하는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한번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은 나의 내면과 너무나도 대비되어, 이쪽 가슴을 아프게 했다.


상대는 거짓 없이 진심을 다해오는데 이쪽이 감추기만 할 뿐이라면 그건 정말 비겁자나 할 짓이다. 그녀의 성의에, 정성에 보답하려면 진실 그대로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내 사역마로서 되살아나며 나와 수립된 링크를 통해 이미 한차례 내 모든 기억을 들여다본 린이기에,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짤막하게 고했다.


“린. 아마 저건ㅡ스비엣은··· 내 가족이다.”


“네...? 그게 무슨...”


뜬금없는 내 대답에, 린이 더듬대며 되물었다.


“한치의 거짓 없는, 기억의 연결이 있었어. 그녀의 과거를 보고 확신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정체를 안 상태에서 짐작할 뿐이지만 어머니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쪽에 떨어진 거야. 세계 간의 시간 축이 서로 완전히 맞물리지는 않는지, 내 세계 기준으로는 몇 년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수천이 흐른 거라고... 봐야 하겠지.”


그 오랜 시간동안 스비엣ㅡ어머니가 감내한 고통을 생각하자니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그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빛이 오가고, 나와 스비엣을 번갈아 쳐다보던 린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는지 입을 서서히 벌렸다.


“그런, 설마 그런게...”


앞뒤 사정을 다 깨달은 린은 마수들의 제왕이라는 펜리르답지 않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그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과 슬픔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비극이라면, 내가 그 비극의 주인공이다.


필연적인 재회라면 다른 방법도 수많이 있었다. 꼭 이런 식으로, 이런 입장에서 다시 만날 필요는 없었다.


꼬이고 꼬여도 이렇게 꼬이기는 힘들다. 이건 마치 '누가 짠듯한' 비극이 아닌가.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아, 그런 감정이었지. 슬픔이라는 건.”


울먹이는 린의 눈에 비친 내 얼굴에선 마땅히 느껴야 할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 사라지며 남긴 쓸쓸함이 있을 뿐.


“...보스, 보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린이 나를 세차게 흔들며 다급하게 말해온다.


“스비엣은 섬멸 작전이 아니라 포획하는 것으로 하죠. 아무리 다른 세계의 일이더라도 그 근원이 보스의 어머님인걸 안 이상, 이대로 전투를 속행할 수는 없어요.”

“...”


“그,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 적어도 보스... 보스를 알아보게끔 하는 거예요. 후퇴시킨 군을 총동원해서 제정신으로 돌릴 방법을 찾지 않으면... 어떻게든 모면할 길을 찾지 않으면ㅡ”


이 모든 게 자기 일인 것처럼 어떻게든 스비엣을 살릴 방법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는 린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리다. 그러기도 전에 대륙이 멸망한다. 그녀의 고유스킬을 봤잖아.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많은 부하들이 죽게 된다. 정신이 마모된 그녀는 이제 닥치는대로 주위를 파괴하는 재해일 뿐이야. 실제로, 여태 날아온 공격은 확실히 나를 죽이려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은 건...!”


내가 암시하는 바를 깨달은 것인지, 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무사히 신병을 구속할 수도 없다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비극인 것처럼 아파하는 린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댄 나는 그렁그렁 고인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무 불합리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이렇게 끝낼 수는...!”


린이 소리쳤다.


어쩌면 스비엣과 비슷하게 마모되었기에 솔직하게 이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여동생과 함께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겨우 만난 세계에서조차 같은 운명을 맞으려 하는 어머니는 어쩌면 그녀와 내가 증오하는 세계의 불합리함의 피해자니까.


“그렇게 이별해놓고는 겨우 만났는데... 또 이별이라니! 그런 건 너무... 너무... 불합리하잖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린.


아마 그녀의 말마따나 모든 걸 희생시켜가며 그것을 바랄 자격은 내게 충분했다.


나는 죽임당했고, 자신의 의지와는 별반 상관없이 낯선 세계에서의 낯선 역할을 떠안은 입장이니까.


이것도 저것도 스크랩ㅡ내 마음대로 희생시켜 버리고 나의 기원을 좇는다는 판단은, 이곳에서의 존재 자체가 이질적인 나에게는 당연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심으로 바란다면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기반ㅡ마왕군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 세계는 나의 본래 세계가 아닐지언정, 그렇게 쉽게 내버릴 수는 없었다.


짧고도 길었던 시간 속에 이룬 것들이 전부 하찮지는 않았다.


빈손으로 시작해서 조직을 세우고, 키우고, 인간과 마족들을 만나 휘하에 들였다.


린. 시이나. 이스. 가름. 모두 내 뜻에 찬동한 부하들이다. 단순한 주종관계를 넘어선, 이제는 내 삶에서 사라지면 곤란한 이들이다.


나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얼굴을 하고 있는 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린만 봐도 이렇다. 나를 너무나도 따르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심지어 연모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그만큼 큰 존재가 된 것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마족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연이은 패배에 벼랑 끝까지 몰려있던 그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보인 건 나고, 구세주라는 그 역할을 받아들인 것도 나다.


위에 선 자는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 주군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그 무엇이 걸려있다 해도,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부하를 내가 배신할 수는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을 알면서도 품어준 이들인 것이다.


나의ㅡ


나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날 위해 울어주어 고맙구나, 린.”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스비엣이 움직인다면 세계는 평등하게 파괴되겠지. 하지만 그곳에 설 자는 없다. 마족도, 인간도 평등하게 스러질 뿐이다.”


“보스...”


그곳에 린이 갈망하고, 가름이 꿈꾸고, 이스가 보았고, 시이나가 염원하는 세상은 없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 그녀를 멈추려 하겠지.


하지만 그녀만큼 강력한 자가 대적한다 해도 싸움을 통해 이 규모의 파괴가 계속된다면 세계의 몰락을 면할 수 없다.


사실, 지도자로서ㅡ마왕으로서ㅡ류셀 블레이크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속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극이 네놈들이 원하는 결말인 거냐.


기가 막힌 우연일까. 처음부터 짜인 비극인 걸까.


하지만 질질 끌어봤자 비참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스비엣ㅡ어머니라면 무엇을 바랬을까.


그 정답은 한점 전에 이미 나와 있었다.


나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다짐할 뿐이다.


내 눈은 천계를 넘어, 어느 집단을 향해있었다.


모조리 남김없이 부숴주겠노라고 다짐한 나는 다시 칠흑의 검을 만들어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의문을 담으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손상된 신체를 수복 중인 스비엣이 내 살기를 감지했는지 반격을 개시한다.


얼음의 창이, 불꽃의 파도가 난무한다.


“큭ㅡ”


고유스킬을 발동시키지 않고 빙창을, 화염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정면 돌파한 나는 바로 스비엣의 목을 칠 수 있을 정도로 근접했다.


그 찰나 사이에 여기저기가 불타고, 어깨에 날카로운 빙창이 꽂혀 만신창이가 된 상태의 나는 헐떡이며, 큰 나기나타를 휘두르느라 빈틈이 생긴 스비엣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버스트 마법을 담은 도신의 파괴력은 남다르다.


희미하게 불타던 스비엣의 생명의 촛불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ㅡ”


나기나타를 치켜올리던 스비엣이 입을 작게 벌렸다.


내 기분탓일까.


그제야, 그 동공에 초점이 살짝 돌아온 것 같았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내 손이 말을 듣지 않고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검을 내리치려던 나는 마지막 순간에 차마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런 건 진작에 알고 있다고.


해야 할 걸 했다고, 해야 한다고 알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비극을 되풀이해버린 자신이 미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랬을 터인데.


“나라는 놈은 참 한심한 놈이군.”


아마 이게 내 죽음이라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차마 할 수 없었다. 내 손으로는, 도저히 유일한 가족을 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스?!”


내 위기를 감지한 린이 소리를 지르고, 스비엣은 린이 움직이기도 전에 한발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내 목에 창을 내지르는 대신ㅡ


“어라.”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나에게, 아주 그리운 감촉이 느껴졌다.


학교에서 돌아와 여동생과 둘이 엄마를 부르면, 이렇게 안아주곤 했었다. 우리 둘은 그녀의 보물이었고, 그녀는 우리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아...”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검은 날개로 따스하게 나를 안아주는 스비엣.


그녀의 두 손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흑발의 소녀가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젊은 시절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어...머니.”


이렇게 한번은 다시 안아보고 싶었다.


불합리하게 빼앗기고 나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로 생각했기에, 한 번이라도ㅡ마지막 한 번이라도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내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귓속말로, 내가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어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방해주어 고맙구나, 류셀ㅡ내 하나뿐인 아들.”


전의 세계에서도 이렇게 말해지곤 했었어. 그건 틀림없는, 황혼의 저편에 있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매우 지친 것 같았으며, 방금까지만 해도 뜨겁게 춤추던 능력이 희미해져 가는 듯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단다. 하지만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없어. 이렇게 가봐야 하는 걸 용서해주렴.”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내가 입을 벌렸다.


“자... 잠깐만요. 시간이 없다니, 그게 무슨... 나는 아직도 할 말이 얼마나ㅡ같이 보내고 싶은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더듬거리며 항변하지만, 나를 안은 스비엣의 몸에서 이미 힘이 빠지고 있었다.


스비엣은 따스한 눈으로,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다.


“ㅡ를 부탁할게. 분명, 다음 생에도.”


그 말을 끝으로, 스비엣의 몸이 새하얀 입자들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소멸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렇게 만나서 바로 이별이라니 이건 아니잖아.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얼마 많은데... 가지 말아요! 조금만... 조금만 더...!”


내가 애타게 부르짖는다.


“내 곁에 있어 달란 말이야...! 제발...!”


애달픈 부름도 부질없이, 스비엣이 반짝이는 입자들로 무너져간다.


내 뺨을 어루만지던 온기가, 야속하게 흩어져간다.


“아, 아아아...”


나는 광인처럼 필사적으로 빛나는 입자들을 손에 쥐려 하지만, 그 노력도 무색하게 내 품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한때 스비엣이었던 것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남은 시간이 없다고 했지. 그녀가 그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그렇구나...”


혼자 남은 나는 혼잣말을 했다. 무엇이 벌어졌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나를 기다린 거구나.”


이해했기에 더 가슴 아팠다.


어머니는 연방의 꼭두각시가 되어 마모될 대로 마모된 정신으로도, 이 못난 아들과의 재회 하나를 바라보고 그 고된 생을 버틴 것이다.


가진 능력으로 어떻게든 악착같이 생을 부지하려면, 내 검을 두 번째로 맞은 뒤에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규모의 고유스킬이었다.


하지만 스비엣은 그러지 않고, 스스로 소멸하는 것을 택했다.


끝끝내 옛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아주 잠시 되찾은 제정신으로 자신이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존재를 확인하고, 더 이상의 미련 없이 떠나간 것이다.


“그런... 그런...”


그 짧은ㅡ겨우 자아를 되찾은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 무차별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자아 없는 괴물이 되기보다, 아들의 품에서 죽는 것을 택했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던 것이다.


밑에서 함성이 들려온다.


스비엣이 소멸한 걸 보고, 내가 승리한 것을 확신한 병사들의 함성이다.


이 모든 걸 가까이서 목격한 린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내 곁을 지켰다.


“그랬구나...”


나는 언제까지고 하염없이 아무것도 없는 내 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의말

쥔공 대신 울어주는 린이 진히로인일수도


p.s. 린, 그리고 키루아를 아는 일본 애니메이터가 직접 손으로 움직이게 그려준 버전의 고퀄 작품이 둘 있는데, 공개할까 고민하다 https://bit.ly/3askob3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들어가서 클릭하시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문피아 자체 기능으로는 움짤 첨부가 안되네요)

그 외에도 개인적 사용을 위해 만든 소설 캐릭터 기반 카톡/디코 이모티콘들도 잔뜩 있긴 하지만 이쪽으로 공개한 건 몇 안 되긴 합니다. 아마 요청에 따라 올릴 수도 있고 안 올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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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5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4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1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7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89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5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86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7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79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4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0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5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09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5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5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0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7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19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1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4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18 4 18쪽
230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1 22.09.29 115 4 18쪽
229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8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6 3 17쪽
227 구원의 손길 +4 22.08.19 113 5 18쪽
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0 6 17쪽
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4 4 17쪽
224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8 5 19쪽
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7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2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0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7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6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09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5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6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3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4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3 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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