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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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밤에 쉬고 아침에 다시금 시작되기 마련이다. 밤에는 서로의 번쩍거리는 군복을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새 아침이 밝았다. 구교와 신교, 양측 군인들은 충분한 잠을 잤고, 전투에 대비하여 아침을 차려 먹으면서 제복과 무기를 점검했다.
병사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지저분한 수염을 깎고 군복과 군화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몸단장을 했다. 그 다음으로는 하사관에게서 개인 장비 검사를 받았고, 행여나 잃어버린 군용 물품이 있다면 수첩에 적혀 월급에서 물어내는 과정을 거쳤다. 병사들이 가장 많이 잃어버리는 것은 삼각모와 견장이었는데, 행여나 날아오는 총탄이 모자를 날려버리기라도 하면 다시는 주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벨린 데 란테와 조안, 알레한드로는 초록색의 총사대 제복 차림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메뉴는 삶은 계란 몇 개와 단단하게 굳은 검은 빵, 그리고 벨린이 일주일 동안 못 마셔본 포도주였다. 높은 분들께서 병사들의 사기 향상을 위해 포도주를 본국에서 수송해온 모양이었다.
군납용으로 제조된 이 독하고 찌꺼기 많은 싸구려 포도주의 병 라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전투 중에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
벨린은 피식 웃었다. 그런 이유로 술을 마신다면 그거야 말로 겁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하지만 벨린은 그런 이유로 술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면도날처럼 예민해지는 감각을 둔화시키기 위해 술을 마셨다. 인간을 사냥할 곳에서 짐승을 사냥할 정도로 감각을 예민하게 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벨린 데 란테는 어깨에 소위 계급 견장을 달고 있었다. 아무리 총사대라지만 군대에서 장교 계급이 의미하는 것은 병사들보다도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그런 면에서 조안과 알레한드로는 다소 놀랐다.
알레한드로가 얄밉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나는 자네가 우리의 분대장 정도는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장교가 됐단 말이야? 나는 척탄병 연대에 있었을 때 기껏해야 하사관이었다고. 하지만 자네는 사냥꾼이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단번에 장교가 되지?”
벨린은 잠시 알레한드로를 바라보았다. 지긋한 눈길이었다. 턱수염을 기른 거인이 벨린의 눈길에 기가 죽어서는 서둘러 변명을 했다.
“아니, 나는 시기하는 게 아니야. 그저 자네의 수완이 무척 궁금해서 그런 거야. 그뿐이라니까.”
“총사로써 섬길 주인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벨린은 그저 이 말을 간단히 하고서는 병을 들었다. 그의 두 친구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벨린은 대답은 이미 끝났다는 듯 남은 적포도주를 마저 들이켰다. 지나치게 쓰고 찌꺼기도 많았지만, 전쟁터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아마 그들의 적인 신교도들도 정제되지 않은 럼주를 마시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앳된 얼굴의 조안이 자신의 총을 똑바로 세우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육군에 있을 때 겨우 일등병이었는데, 알레한드로는 하사관이고, 벨린은 소위니까, 내가 가장 쫄따구가 되는 거네? 아무리 우리가 일반 병사들과 같이 분대를 구성한다지만 같은 총사들끼리 그런 게 어디 있어?”
나팔 소리가 울렸다. 전투를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제복과 무기를 점검하던 병사들이 서둘러 집합 장소로 뛰어갔다. 벨린은 포도주 병을 비운 다음 은빛 테가 둘러진 삼각모를 바로 쓰며 일어났고, 알레한드로는 어이없어하는 조안을 일으켜 세우며 농담 삼아 한 마디 했다.
“그럼 알아서 기면 되겠네, 조안 일등병.”
세 총사는 연대에서 차출된 지원병과 함께 새 유격분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히스파니아군 내부에서 총사연대의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총사 연대는 유격전을 필요로 하는 여러 전장으로 분산 배치되었고, 이런 경우 그들의 임무는 전투에서 뽑힌 병사들을 통솔하여 정예 유격부대를 운용하는 것이 총사대의 기본 운용 교리였다. 현대로 치자면 자유분방함과 재량권을 인정하는 특수부대의 시초격이라고나 할까.
바로 이럴 때 벨린의 장교 계급이 필요한 법이다.
일반 머스킷 보병연대 병사와 총사대원은 제복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일반적인 히스파니아 병사의 제복은 짙은 푸른색에 흰 색 바탕이지만, 총사대원의 제복은 짙은 녹색이다. 이미 며칠 째 전투가 치러진 전장에 번쩍거리는 제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벨린과, 조안, 알레한드로는 전장에서 좀 떨어진 언덕 위에서 차출된 여덟 명의 병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이십 년은 보냈을 법한 뚱뚱한 상사는 그들이 이곳 병력들 가운데서 가장 발이 날래고 사격도 잘 하는 병사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총사들의 임무를 보조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저들이 전장을 나누고 이열로 꼿꼿이 서 있는 저 대열의 틈에 서 있는 것보다는 총사들과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전투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벨린은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나 같이 군살이 없고 날래게 생긴 청년들이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모양인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고, 군복이 좀 지저분하긴 했지만, 그만큼 전장에서 융통성이 있다는 뜻도 되었다.
벨린이 말했다.
“알레한드로 중사.”
“예.”
“이들에게 녹색 군복을 지급해. 이들은 오늘부터 우리의 유격병이다.”
알레한드로는 군말 없이 벨린의 지시를 따랐다. 전쟁터에 나온 이상, 그들은 친구이기 전에 상관과 부하 관계였다. 기본적인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조안이 알레한드로를 도와 병사들에게 새 녹색 군복을 주는 가운데, 벨린은 병사들을 하나 하나 바라보며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았다.
모두가 열일곱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젊은 병사들이었다. 아마 몇몇은 징병되었을 테고 몇몇은 여러 사정으로 자원했을 것이다.
벨린이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오십 미터 이내에 표적을 맞출 줄 아는 병사 있나?”
그러자 그들이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저희는 마음만 먹으면 칠십 미터까지도 맞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교님들이 좀체 기회를 주지 않았죠. 항상 삼십 미터 안까지 접근해서 일제사격으로 한방 먹였거든요.”
“그러다 재수 없으면 우리가 한방 먹는 거죠.”
벨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은 총이 있으면 백 이십 미터도 가능하겠군.”
그 말에 병사들이 꿀 먹은 병아리가 되었다. 백 이십 미터라. 설마 저 총사대 장교가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들은 지금껏 백 이십 미터에서 적을 명중시키는 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때마침 최전선 부대의 행군을 알리는 진군나팔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총사와 유격병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최전선에 배치된 보병연대의 진군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청동제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공격의 시작을 알리는 모양이었다.
군악대의 드럼소리가 점차적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의 최전선을 보던 병사들은 다시금 벨린에게 눈을 돌렸고, 벨린은 대포의 일제 포격으로 목소리가 묻히기 전에 간단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귀관들을 인간 사냥꾼으로 만들어주지. 그것도 훈련이 아닌 실전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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