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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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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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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베나레스의 총사(7)

DUMMY

총사대장이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빈센초 데 란테의 아들이냐?”

벨린이 간단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총사대장이 손자뻘 되는 젊은이를 뜯어보았다. 벨린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속으로는 약간 떨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담한 그는 도리어 그 긴장을 즐기기 시작한 참이었다.

별안간 총사대장이 벨린의 두 어깨를 잡았다. 당당히 가슴을 펼쳐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왠지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이 느낌은, 노련한 총사의 손길이었다. 그에게 모든 걸 가르친 아버지의 손길 같았다.

그가 주름진 눈매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환영한다, 벨린. 데 란테 가문이 15년 만에 돌아왔구나.”

벨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겉은 무뚝뚝하지만 자세히 보이면 슬쩍 웃는 것이 보이는 그런 표정으로 총사대장에게 절을 했다. 총사대장이 활짝 웃더니 벨린의 손을 잡았다. 굳은 살 때문인지 꺼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총사대장은 당당한 눈을 뜨고 있는 벨린에게 만족감을 보이고서는 스피놀라에게 물었다.

“스피놀라, 이 친구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었나?”

“물론입니다, 각하. 조용해보여도 말만 열면 똑 부러지고 즐긴 건 다 즐기더군요.”

“그렇다면 일단 들어가도록 하지.”

그들은 총사대 본부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본부는 전형적인 히스파니아 양식의 건물로, 별 다른 장식은 없었고, 그저 머스킷총을 든 총사와 장교들이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총사대장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스피놀라와 잠깐 의논할 일이 있으니 말이야. 스피놀라 잠깐 나 좀 보지?”

그러면서 두 사람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벨린은 집무실 문 밖에서 기다렸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문 너머에서 열심히 알아듣기 어렵게 쑥덕거리고 있다. 문득 제3자가 안에 있는지,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 목소리 듣기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 일분 쯤 지났을까, 갑자기 말싸움이라도 하는 듯이 목소리가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총사대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 언성을 단번에 죽여 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거칠게 활짝 열렸다.

푸른 제복을 입은 총사가 뛰어나왔다.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모자로 머리칼을 가리고 있었고, 못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디다 분풀이 할 수 없어, 스스로가 잔뜩 화를 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벨린을 지나치면서, 벨린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서 알지 못하는 적개심 같은 것이 띄어있는 듯했다.

그때 스피놀라가 문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데 모레. 이걸 놓고 갔더군.”

둥글게 만 서류 뭉치였다. 데 모레라고 불린 총사가 스피놀라의 장갑 낀 손에 쥐어진 그것을 낚아챘다. 벨린은 겉으로는 지극히 여유로운 척 팔짱을 꼈다.

데 모레가 서류를 잠시 쥐어보이고는 벨린 데 란테를 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벨린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총사는 그렇게 벨린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을 분풀이 할 수 없다는 것에 스스로가 화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스피놀라가 말했다.

“벨린. 그럼 이만 들어가도록 할까?”

“예.”

벨린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총사대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다섯 평정도 되는 크기의 양지바른 방으로, 한 제국의 근위대장 집무실이라 하기에는 무척이나 소박해보였다. 장신구라고는 벽에 걸린 총과 검이 전부였고, 햇볕이 잘 드는 창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치스러울 것도 없었다.

총사대장은 집무실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챙이 접힌 모자를 벗은 채로 무슨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머리에 하얀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 가발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전 에우로파의 상류층에 유행하게 된 것으로써, 대머리가 되고서도 위엄을 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액세서리였다.

벨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총사대장이 깃펜으로 서류에 사인을 끝마치자, 비서가 그 서류를 들고 방을 나갔다.

총사대장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가 벨린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스티아노에 온 걸 환영한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안하시냐?”

벨린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진정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만 이렇게 웃는 버릇이 있었다. 총사대장이라. 아버지께서도 좋은 쪽으로 많이 말씀하고는 하셨다.

그가 차근히 대답했다.

“아버지는 요즘도 사냥을 잘 즐기십니다. 어머니와도 화기애애하시고요.”

“옛날보다는 좋지는 못할 게다.”

걱정과 연민의 감정 때문인지 총사대장의 표정이 흐려졌다.

“듣기로는 네가 황녀마마를 구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고 들었다. 마법 같은 것으로 적들을 제압하고, 마마가 타신 마차를 무사히 사수했다면서? 내가 보기에는 마력탄을 쓴 것 같군. 네 어머니의 특기 가운데 하나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벨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총사대장이 난감한 질문을 계속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무섭지는 않던가? 주저하지는 않았고?”

그는 그저 웃어보였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한 때입니다. 자신들이 부덕하여 죽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약해 주저한다면, 전 차라리 신부가 되려고 했을 겁니다.”

총사대장이 잠시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천천히 말했다.

“하긴 그렇지. 시국이 어지러우니까. 내전은 끝났지만 대내외적인 전쟁은 몇 년 째 계속 이어지고 있고, 지방의 치안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빈센초를 비롯한 자네 가족이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

벨린은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사실 총사대장이 부모님의 최근 근황을 물어봤을 때 그는 거짓말을 했다. 이미 부모님을 보지 못한지 3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산적들의 손에 돌아가실 만큼 호락호락한 분들이 아니었다. 총사대장도 그쯤은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 벨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이미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총사대장 호르세 데 카사델라 남작이다. 총사가 되고 싶어 왔다고 했느냐?”

“예. 각하.”

벨린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총사대장이 물었다.

“으음, 그렇다면 딱히 총사가 되고자 결심한 동기랄 것이 있나? 아버지가 총사라서 가업을 잇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애국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전 그저….”

벨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총사대장이 보는 앞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루한 것이 싫었을 뿐입니다. 총사가 된다면,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삶을 즐기면서 밥도 벌어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뿐입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면, 배를 타던가, 상인이 되던가, 신대륙의 탐험대에 지원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자 벨린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투로 대답했다.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은 총을 쏘는 것입니다, 각하.”

“하지만 전쟁터에 갈 수도 있지 않나.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쟁터에서는 괴로운 일을 많이 겪어야 한다.”

그러나 벨린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은 다른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왕 그렇다면 적성에 맞는 일이 낫겠죠.”

총사대장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좀 더 거창한 말을 염두 해 두고 있었다. 보통 총사가 되기 위해 오는 지원자들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충성심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는 했다.

하긴 그런 놈들은 하나 같이 애송이들이지. 하고 총사대장은 생각했다. 저 녀석은 아버지 빈센초와는 약간 다른 구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총사대장은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확실히 벨린은 아버지보다는 덜 혈기왕성하고, 좀 더 조용해 보인다. 어머니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고, 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총사대 같은 조직에서는 때론 충성심과 객기에 과잉 의존하는 녀석 말고도,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저런 녀석도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래 좋아. 호르세 데 카사델라는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총사대라는 조직은 능력이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좋은 지원자를 굳이 내칠 필요가 없다. 녀석은 이미 실전 경험까지 있으니, 어떻게든 역경을 잘 해쳐나갈 것이다.

총사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좋다. 벨린. 너를 총사대에 받아들이겠다. 원래는 일반 연대의 병사들 사이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지만, 너는 이미 충분한 공적을 세웠으니, 관련 법령에 따른 내 명으로 입대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총사가 될 수는 없다. 너는 지금부터 4개월 간에 걸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거기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 네가 원하는 대로 진로를 택할 수 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이 명령서를 들고 1층에 있는 모병관에게 가도록. 내일 부로 자네는 내일 입대하는 예비 후보생들과 함께 할 것이다.”

벨린은 그 명령서를 들고 총사대장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는 평안하시길 빌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총사대장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정중하게 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벨린 데 란테는 문을 열고 나갔다. 뒤에서 총사대장과 스피놀라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별로 엿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1층으로 가서 모병관을 찾았다. 챙이 넓은 모자에, 총사제복을 걸친 모병담당관이 은화를 잔뜩 쌓아놓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벨린은 그에게 주저 없이 명령서를 주었다. 그러자 모병관은 그에게 명부를 보여주었고 맨 끝부분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이 서명을 해야만 입대가 가능하고 한 달 치의 급료 150 페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주저 없이 서명했다. 비록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기는 했지만 서명은 그저 서명일 뿐이다. 그가 보기 드물게 알파벳으로 서명을 하자(지원자 가운데는 까막눈이라서 서명을 엑스 자로 대신한 녀석도 많았다)모병관은 약간 놀랍다는 투로 그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작은 은화 주머니를 주었다. 10페소짜리 은화가 열 다섯 개 들어 있었다.

1701년의 늦은 여름에 벨린은 태연히 그것을 들고 입대를 하러 갔다. 은화의 가치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던 터라, 은화를 급료를 받는 것이 어쩌면 불안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군에 입대한 이상 세 끼 걱정도 없겠고, 어차피 인생을 즐기는데 금방 다 써버릴 텐데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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