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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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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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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0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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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22)

DUMMY

6장 - 10년 전쟁의 최후


이사벨 데 아라고른은 생전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그녀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 집무를 보았고, 이런 이사벨의 부지런함은 황궁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누구도 그녀가 늦잠을 자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아침 아홉 시에야 잠에서 깼다. 덕분에 시종들은 당황했고, 그녀의 집무 스케줄은 엉망이 되었으며 그녀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밀린 서류를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이사벨은 미안해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행동했고, 오만한 표정과 냉랑한 어조를 구사하며 시녀들과 시종들을 부렸다.

그녀는 처소의 테이블에 앉아서, 간단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서는 아침 스프를 먹으면서 여러 가지 서류를 검토했다.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을 했지만, 그녀는 속으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 시간에 일어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 이후 몸이 무척 아프고 노곤해서 쓰러지듯이 잠을 잔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늦잠을 잘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사벨은 아침식사 겸 집무를 한 시간 동안 해치우고서는 서둘러 몸단장을 하였다. 각료들이 정오에 알현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북부 전선의 란툰 반도를 두고 이뤄지는 전쟁에 대한 보고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단으로 만든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붉은 색은 그녀가 선호하는 색깔이다. 검은 레이스에, 비단과 망사를 사용했고, 리본 장식을 군데군데 달아 기품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다.

그녀는 시녀들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새로 우아하게 틀어 말았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마지막 화장을 자기가 직접 고치면서 생각에 잠겼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정신은 약간 몽롱했고 아직도 허리와 허벅지를 비롯하여 온 몸이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필시 어제 일 때문이리라.

그녀는 잠시 마스카라 솔을 내려놓았다. 온 몸의 뼈마디가, 특히 허벅지 부분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려고 얼굴을 찡그렸고, 그 바람에 그녀에게 그렇게 아픔을 준 어제 일을 더욱 또렷이 기억하게 됐다.

그녀는 그 자에게 처음으로 몸을 내줬다. 어쩌면 그 자의 농간에 놀아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자 만큼은 몸을 내어주고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 자가 그녀의 소유욕을 자극한 탓이다.

물론 그 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이사벨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거래였다. 그녀는 그저 그 자를 손에 얻을 가장 효과적인 거래를 했을 뿐이고, 그것은 벨린 데 란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자는 아무 여자하고나 자는 바람둥이가 아닌가. 그저 자신의 본능에 의해, 이 나라 황녀의 몸을 탐할 기회를 얻고서는 자신의 욕구를 짐승처럼 채웠을 뿐이다.

그런데 원래 몸을 내어주면 이렇게 아픈 것일까. 어제 보니 무섭게도 피가 나오던데. 그녀는 두 볼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힘겹게 숨을 쉬었다. 달거리 날을 고려했으니 불상사가 나지는 않겠지만, 생리통이 도진 것처럼 온 몸이 지끈거렸다. 주치의인 자코모 다빈치 박사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허나 불행히도 그는 의학 연구 때문에 란툰 반도에 가 있었다.

문득 이사벨은 데 란테와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을 생각하고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자가 황궁을 나서기 전에, 이사벨은 그 자에게 환심을 가져볼 겸 이렇게 물어봤었다.

“너를 어디에다 쓰면 좋을까. 데 란테.”

“저는 총사 겸 사냥꾼입니다. 마마.”

데 란테가 마차를 타기 전에 대꾸했다.

“이제는 마마께서 제 주인이시니, 마마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전쟁터로 나가 마마와 제국의 적들을 사냥하겠나이다.”

그것은 이사벨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산 유능한 사내를 그런 식으로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를 왠지 아끼고 싶었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바쳐서 가진 사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본의 아니게 오만하게 눈을 치켜떴다.

“쳇, 그러고 보니 네 놈이 할 줄 아는 것은 총질밖에 없을 터. 전쟁터에 투입되거든 너를 단단히 부려먹을 테니 그리 알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데 란테가 정중하게 절을 하더니,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뒤에서 짐짓 관심도 없는 척 팔짱을 꼈다. 그가 마차 안의 유리창을 통해, 마지막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애써 눈을 피했다.

어쩌면 그 자는 이사벨 자신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 자가 마음속을 꿰뚫고 있다 해도 이사벨은 감정을 숨겨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녀는 떨어뜨린 마스카라 솔을 다시 쥐어 눈썹을 그리고는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 자를 당분간은 멀리해야겠어.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말이야. 감정에 얽혀 행동해서는 안 돼. 나는 이미 어른이 됐는걸.’

* * *

신임 총사들에게는 일주일 동안 대기 시간이 주어졌다. 그들은 총사 연대에 배속 받아 전쟁터로 가기 전에 드라고니스 여관에서 머물면서 진탕 마시고 놀았다. 어쩌면 그들로써는 마지막 여흥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신임 총사들은 란툰 반도에 걸친 전선에 주둔한 총사 연대로 파병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벨린은 다른 총사들과 다름없이 일주일 동안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었다. 그는 틈틈이 책을 읽고, 신임 총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밤에는 여자의 몸을 탐하면서 즐길 것을 즐겼고 신임 총사들이 임명되는 11월이면 드라고니스가 가장 큰 호황을 이룬다는 법칙을 성실히 실천하였다.

벨린은 신임 총사들 사이에서 딱히 적을 만든 이가 없었고, 총사들이 원체 유대감이 강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모두와 잘 어울리고 다녔다. 물론 가장 친한 조안과 알레한드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은 총사 훈련 수료식 날에 벨린이 어디로 갔었는지 무척 궁금해 했다.

물론 벨린은 평소의 그답게 간단히 대답했다.

“황궁으로 가서 여인을 탐하고 왔지.”

“뭐, 황궁이라.”

알레한드로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황궁 같은 곳에 다니는 시녀들이 계집질 하기는 참 좋다고들 하지. 자네야 모든 여자들은 다 섭렵해봤을 테니 색다른 경험이 필요할 때도 됐지. 혹시 그 가운데 진정 데리고 살고 싶은 여자는 있나?”

벨린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가 포도주를 한잔 비우고서는 차근히 말했다.

“나한테 아직 그건 무릴세. 나는 그저 그녀들과 보내는 즐거운 하룻밤에 만족할 뿐이야. 설령 그녀들 가운데서 사랑에 빠지는 이가 있다고는 해도, 내 마음을 가지지는 못할 걸세. 최소한 내 나이가 서른을 넘지 않는다면 말이지.”

“왜 하필이면 서른 살이지?”

조안이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벨린이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도 서른 살 때 정신을 차리셨거든.”

총사들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들은 다시금 포도주가 담긴 은잔을 부딪쳤고, 거나하게 취할 때까지 온갖 술을 들이켰다.

그들이 그렇게 술을 마실 즈음이었다. 문이 열리더니 신임 총사들이 어디선가 술집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총사대 본부에서 사람이 왔어. 우리의 복무지를 발표하려는 모양이야.”

이윽고, 은빛 견장이 달린 총사대 장교가 술집의 한 가운데 서서는 서류를 펼쳐 읽어 내렸다.

“전선 상황을 고려하여 귀관들이 소속될 복무지가 결정되었다. 귀관들은 북방 프로테스탄트와 대치중인, 북 란툰 반도의 까살라 전선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펠리페 총사연대에 소속되어 셰비아 척탄병 연대와 같은 사단을 이룰 것이다.”

총사들이 밝은 목소리로 술렁거렸다. 괜찮은 복무지였다. 란툰 반도하면 히스파니아만큼 풍요로운 땅으로 이름이 높았다.

총사들은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다.

“교황 성하께서 계신 란툰 반도에 가게 되는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지.”

“더불어 포도주도 말이야.”

그러나 총사대 장교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가 서류를 접어 넣고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군들, 너무 좋아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신이 내려주신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일도 종종 있는 법이거든.”

그 말에 총사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총사대 장교가 진지한 얼굴로 신참들을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내일까지 모두들 총사대 본부로 집결하도록 한다. 그리고 세뇨르 벨린 데 란테는 잠시 개인적으로 나를 보도록, 이상.”

총사들이 흩어졌다. 벨린은 잔에 남은 포도주를 마저 비우고서는 문가에 서 있는 총사대 장교에게 갔다. 그가 의외로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봉투에 담긴 서류를 한 장 주었다.

“이것은 귀관의 임관 명령서다. 윗분들이 자네의 공적을 인정하여 주는 특별 선물이야.”

임관 명령서에는 벨린 데 란테 소위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었다. 벨린은 그것을 읽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황녀의 첫 번째 선물을 의심한다는 건 배은망덕한 짓이란 생각에서였다.

“귀관의 활약을 몰래 들었다. 음지에서 나라를 두 번이나 구했더군. 자네가 전쟁터에서도 잘 활약한다면 아마 근위총사나 황실의 최측근 경호총사로 배속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일단 근위총사 연대에 배속되면 전쟁터에서 죽을 걱정도 덜할 테고, 이 나라의 요직에 두루 진출할 수 있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건투를 비네.”

총사대 장교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서는 술집을 나섰다. 벨린은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이고서는 도로 자기 자리로 가서 다시금 술에 취했다.

술에 마음껏 취할 수 있는 시간도 오늘까지였다. 내일부터는 전쟁터에서 어떡하면 마마의 분부대로 적들을 사냥할까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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