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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연재수 :
17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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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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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
글자수 :
702,223

작성
06.09.17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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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0쪽

베나레스의 총사(6)

DUMMY

* * *

하룻밤의 정사를 치룬 이후, 벨린은 생생한 꿈을 꾸었다.

그가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었다. 화창한 오후로 보였다. 털이 복슬복슬한 양 한 마리가 공터에서 풀을 뜯는 중이었다. 양의 목에는 밧줄이 묶여 있었고, 그 밧줄은 바닥의 쐬기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산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자작나무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이파리가 살랑살랑 떨어질 무렵, 저 숲 멀리에서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늑대였다.

은빛 털을 지닌 늑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풀을 뜯어먹던 양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불안한 듯이 머리를 내젓기 시작했다.

양과 30미터는 떨어진 수풀 속에서, 길쭉한 총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햇빛에 반짝거리지 않도록 검게 색칠한 총열이 가벼이 떨리고 있었다.

“신중히 조준하거라.”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기회는 한번뿐이다, 명심해야 한다. 벨린.”

어린 사수는 말없이 앞을 내다보았다. 그가 침착하게 총구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사수의 어린 손이 부싯돌 점화장치의 격철을 올렸다. 준비는 완벽했다. 장전은 이미 끝났고, 약실에는 장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총탄이 발사될 터였다.

수풀을 벗어나온 회색 늑대가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양이 밧줄을 끊을 듯이 펄쩍 뛰었다.

“지금이다!”

남자가 급히 말했다.

“쏴라, 벨린!”

그는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는 것일까? 늑대가 펄쩍 뛰더니, 양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어서 쏴!”

타앙!

흰 연기가 자욱하니 뿜어 나왔다. 오줌 같은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콜록, 콜록, 하고 어린 사수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건장한 체격에 곰 가죽으로 만든 조끼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올무와 단검을 차고 있었고, 모직으로 덧댄 튼튼한 바지와 장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총구는 아직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린 목소리가 속삭이듯 물었다.

“잘…됐어요? 아버지?”

사내가 엄숙하게 말했다.

“화약 냄새에 좀 적응해야겠구나. 하지만, 일단 사냥은….”

사내가 밝게 웃어 보였다.

“잘 맞췄다.”

사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버지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몸집과 키가 훨씬 작았다. 겨우 아버지의 반 수준일까? 소년은 자기키보다도 큰 엽총을 들어 세웠다. 총구에서는 아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년이 앳된 손으로 화약 연기를 헤치고서는 앞을 바라보았다. 사냥감이 쓰러져 있었다. 양은 놀랐는지 주저앉아 메에에 거리며 울었고, 늑대는 바로 그 옆에서 벌러덩 뒤집어져 있었다.

“하하핫.”

건장한 소리 내어 웃으며 사내가 아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잘 맞췄다. 급소를 한방에 노린 모양이구나. 저게 네 첫 사냥감이란다.”

“와아.”

어린 사수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이렇게 어린 녀석이 총을 저리 능숙하게 다루다니. 자기키보다도 더 큰 물건을 말이야. 그래서 더욱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나중에 우리 가문 이름에 먹칠을 하지는 않겠다. 저 늑대의 가죽은 기념으로 집 안에다가 걸어두는 게 좋겠는걸.”

“저…정말요?”

소년의 낯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허나 아버지는 워낙 기쁨에 도취되어 있던 탓에 아들의 얼굴을 읽지 못했다.

“그럼, 기념으로 간직해야지. 잠깐만 기다리거라. 천막으로 내려가서 자루를 가지고 오마.”

별안간, 소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네, 어서 다녀오세요.”

아버지가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소년은 여전히 실실 웃으면서 뒤를 보았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는 아버지가 전혀 보이지 않자, 재빨리 엽총을 들고서는 양과 늑대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늑대는 여전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바로 핏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소년은 재빨리 몸을 숙였다. 그가 잡은 늑대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은빛 털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나 탐낼 법한 가죽이었다. 사냥꾼이라면 더더욱.

허나 소년은 저 늑대의 가죽을 벗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벨린이 늑대의 은빛 갈기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일어나, 쭈! 어서!”

늑대가 번쩍 눈을 떴다. 녀석은 그대로 누운 채로, 눈을 굴려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언제 오시나, 뒤를 돌아보면서 늑대의 갈기를 긁었다. 그러자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벌러덩 뒤집어져서는 발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다행이야.”

벨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둥근 탄환이었다. 큰 동물을 잡을 때 쓰는, 납을 녹여 만든 탄환이었다. 어린 벨린은 해맑게 웃어 보이면서 탄환을 도로 주머니 속에 숨겼다.

아버지는 모르셨지만 사실 그 총은 공포였다. 장전할 때 화약만 넣었지 총알은 넣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준은 정확했지만 말이다.

소년이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절친한 친구를 대하듯이 충고했다.

“어서 도망쳐.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안 그러면 아버지가 널 진짜로 죽일 거야.”

하지만 은빛 늑대는 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녀석은 소년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는 이 모든 일을 즐기고 있는 듯 하늘에 대고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워우우우우우우!

이크, 아버지도 저 소리를 들었을 텐데. 소년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야, 울지 마! 얼른 가라니까!”

은빛 늑대가 소년의 다리에 코를 문대며 낑낑거렸다. 소년이 노파심에 다시 한번 외쳤다.

“너하고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란 말이야! 어서 갓!”

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에게 꼬리를 치면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소년이 다시 한번 늑대에게 소리치려는 찰나에, 그들의 등 뒤로 낯익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아들은 너무도 놀라서, 늑대의 갈기를 만진 채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마치, 신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 녀석.”

뒤늦게 늑대가 낑낑거리며 죽은 척을 해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 * *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통나무 오두막집의 창문으로 등잔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 참 대단한 놈일세.”

아버지는 탁자를 마주보고 나무 의자에 앉아서 가죽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그의 손이 배신감 때문에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늑대하고 친구를 하다니. 사냥꾼이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당신하고 똑같네.”

부엌에서 일을 하던 여자가 말했다. 보통 키에 나이가 삼십 대 초반쯤 되는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긴 치마에 머릿수건을 두른 전형적인 아낙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마치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이었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여 미인이라고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국을 저으며 말했다.

“당신도 적을 친구로 돌리는 데에는 재능이 있었잖아.”

“오라질! 그래도 늑대한테까지 그러지는 않았어!”

“하지만 여우한테는 그랬지.”

여인이 국자를 쥐고 거실로 걸어 나오며 웃었다.

“어이구, 우리 마누라.”

사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여인의 허리를 잡고는 한 바퀴 빙 돌렸다. 그러자 여인이 꺄르르 웃었고 금세 집안 분위기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훈훈해졌다.

여인이 사내와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속삭였다.

“그 애는 아직 어려. 이제 겨우….”

“하지만 거시기에 털도 안 난 녀석 치고는 대단한 놈이야. 일개 사냥꾼으로 썩기에는 너무도 아까울 정도야.”

부부는 다시 한 번 짙게 키스를 했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사내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무렴, 당신 아들인데 어련하겠어?”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럼, 내 아들인걸. 반드시 훌륭한 총사로 키우고 말겠어.”

“조심해.”

여인이 무릎을 들어 사내의 복부를 가볍게 툭 쳤다.

“거칠게 다루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창가 건너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벨린은 까치발을 들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몰래 엿봤다. 소년의 오른편에는 은빛 늑대가 앞발을 창가에 대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벨린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행동 중에서 저 장면을 가장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도 하지 못하는 거 계속 엿봐서 뭘 하겠는가.

소년이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작게 말했다.

“쭈, 이제 그만 보자. 우리 벌 받는 중이잖아.”

아버지가 눈치 채면 화내실 게 뻔했다. 벨린은 얼른 몸을 수그리고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서든 간에 남을 속이는 짓은 나쁜 것이라고 했고, 벨린은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었고 그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완전히 저물어 별이 총총 빛날 즈음,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아버지였다. 벨린은 두 손을 더욱 번쩍 들었다.

아버지가 그런 벨린을 내려보았다.

“이제 그만 벌 서거라. 저녁 먹어야지.”

“네, 아버지.”

어슴푸레한 노을을 등지고 은빛 늑대가 서 있었다. 벨린은 이미 녀석에게 ‘쭈’라고 이름까지 지어줬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그 늑대를 내려보았다. 정말 저 늑대가 알레한드로 씨의 양을 습격했던 녀석일까?

“이것 참, 신기하군.”

아버지가 늑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어보았다. 늑대는 마치 개처럼 혀를 내밀면서 아버지의 손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개처럼 목을 숙여 아버지가 머리와 갈기를 만질 수 있도록 가르랑거렸다.

‘이거 늑대 맞아?’

설마 개는 아니겠지? 하지만 개는 분명히 아니었다. 개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은빛 털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지.

“저 아버지….”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쭈를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버지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니, 너 벌써 이름까지 지은 거냐?”

아버지가 오두막의 통나무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의 아들이 그의 곁에 따라 앉았고, 은빛 늑대는 벨린을 향해 쪼르르 걸어와서는 계속 놀아달라는 듯이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글쎄다, 쉽지 않은 문제구나.”

아버지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소년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나한테 사정을 말해줘야겠다. 어쩌다 이 늑대와 이렇게 친해진 건지.”

“말씀드리려고 했었어요.”

벨린이 변명조로 말했다.

“산 아래 목장 근처에서 저 늑대하고 만난 거예요.”

“양치기 하는 곳 말이냐?

“네 한 달 전부터요. 처음에는 그냥 눈만 마주쳤어요. 늑대가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거렸지요. 저를 물어버릴 것 처럼요.”

“그래서?”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어요. 적을 만들지 말고,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친구가 되라고…. 그래서 잘 달래고, 먹을 걸 좀 주고 그랬는데…. 이렇게 된 거예요.”

“에라이, 녀석아!”

어이가 없어진 아버지가 벨린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나는 동물한테까지 그러라고 하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벨린이 풀이 죽어 대꾸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과 잠시 동안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얌전히 앉아 있는 은빛 늑대와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따지기 시작했다.

벨린은 항상 엽총을 들고 다녔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 늑대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은 것은… 역시나.

아버지는 문득, 아들의 그런 마음씨가 기특해졌다. 녀석은 설령 짐승이라 해도 의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이거야 말로 우리 데 란테 가문의 모범이 될 만한 일이 아닌가. 신사다운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한 배신감이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철이 들다니.

벨린이 노심초사하면서 아버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부자간의 의리를 지켜야겠지.

결심을 세운 그는 온화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세뇨르 알레한드로에게 잘 둘러대면 문제는 되지는 않을 게다. 저 녀석이 다시금 양을 잡지 않는다면 말이야.”

“물론이에요! 제가 그렇게 가르칠게요!”

“좋아. 그럼 약속 한 거다.”

아버지가 벨린을 번쩍 들어올렸다. 소년의 얼굴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은빛 늑대가 꼬리를 흔들면서 부자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멋진 녀석 같으니.’

마음이 흐뭇해진 아버지는 아들을 번쩍 들어올려 한 바퀴 빙 돌렸다. 그는 아들과 장난을 치면서 아들의 갈색 눈동자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저 눈동자를 봐. 진정한 전사라면 저런 것도 가지고 있어야겠지. 저 놈은 커서 뭐가 되어도 아주 단단히 될 거야.

그때, 부자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센초, 벨린, 와서 저녁 먹어! 식기 전에 안 오면 몽땅 치워버릴 거야!”

“하하, 알겠어! 지금 갈게, 키레네!”

어둑어둑한 오두막의 뜰 밖으로 등잔 불빛이 밝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가 옆에 앉아 있던 은빛 늑대는 졸린 듯이 주저앉아 있었다. 녀석이 밤하늘에 뜬 달을 올려보고는 워우우~ 하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가 느닷없이 그를 잠에서 깨웠다. 알고 보니 꿈이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한 꿈. 벨린은 무언가에 감흥이 된 듯 몸을 일으키고 숨을 쉬었다. 알몸 차림으로 이불이 덮여 있었다.

이른 아침인 모양이었다.

벨린은 아연실색하여 허공을 바라보았고 서서히 미간을 찡그렸다. 그에게 미간을 찡그린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쥐었다. 마치 아련하고 쓰라린 옛 기억에 무언가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허나 감정은 서서히 통제되어갔다. 그는 금세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스피놀라의 목소리였다.

“어이, 벨린. 어서 일어나도록 해. 총사대장 각하께서 자네를 찾는다는 전갈이 들어왔네.”

“알겠습니다.”

그는 짧게 대답하며 옷을 도로 입었다. 뜨거운 물로 욕통에서 목욕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시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하긴 벨린은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항상 없으면 그만 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오랜 사냥과 채집 생활을 통해 터득한 버릇이었다.

그는 옷을 차려입고 여관의 응접실로 나왔다. 어제 그를 상대했던 예쁜 창녀가 살짝 윙크를 지어보였다. 벨린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단골손님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린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창녀일 뿐이다. 그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 필요가 그에게는 없다.


여관 앞으로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총사대 소속인 모양이었다. 원 안에 검과 총을 겹친 인장이 마차에 찍혀 있었다. 벨린은 무덤덤하게 의관을 정제하고는 스피놀라와 함께 마차를 탔다.

마차가 출발하는 가운데, 스피놀라가 손가락으로 수염을 꼬면서 말했다.

“연합 전선에서 돌아오신 총사대장 각하께서 내 장계를 받으신 모양이다. 빨리 돌아오셨으니 참 다행이지. 지금 우리 조국은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를 쉬게 둘 시간이 없어.”

벨린이 짧게 물었다.

“지금 몇 시입니까?”

“으음.”

스피놀라가 외투 품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였다.

“벌써 열 두 시로군. 오늘이 월요일이라면 좀 시끄럽겠는걸.”

드라고니스 여관과 아스틴 황궁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총사대의 마차는 황궁의 정문으로 다다랐다. 정문은 끝이 뾰족하고 세로가 기다란 창살문이었는데 위병소에는 머스킷총을 든 총사와 의장용 미늘창을 세운 위병들이 서 있었다.

위병 총사들이 마차에 각인된 인장을 보고문을 열어줬다. 그리고는 마차가 통과함과 동시에, 절도 있게 경례 자세를 취했다. 총사는 총을 얼굴과 수직으로 바짝 붙여 척 하는 소리를 냈고, 의장용 갑옷과 투구를 쓴 경비병은 미늘창의 아래 끝을 바닥에 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스피놀라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오늘은 월요일이지? 내 시계에 따르면 분명 월요일인데 말이야. 월요일은 마침 열병식이 열리는 날이거든. 황제 폐하와 황족들의 충성심을 드러내는 행사일세. 어때, 마음이 설레지 않나?”

벨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며, 총사대 연병장으로 향하는 마차를 통해 아스틴 황궁의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스피놀라의 말대로, 아스틴 황궁의 앞 광장에는 총사대가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은 반짝 반짝 빛나는 푸른색 제복에, 깃털 달린 검은 삼각모를 쓰고, 받들어총 자세를 취하는 중이었다. 장교 총사들은 검을 빼어들고 있었고, 부사관 총사들은 맨 앞에 있었으며 그 뒤로 병사들이 45도 각도로 머스킷총을 하늘로 겨눴다.

그들의 맨 앞에 총사대장이 서 있었다. 총사대장은 은빛 실이 감도는 특별한 예복을 입고, 가슴에는 훈장을 단 중년 사내였다. 벨린은 잠시 그 전경에 집중하며, 총사대장을 자세히 살펴보였다. 그는 중년 군인으로, 하얀 머리에 면도를 한 얼굴이었다. 미간에는 주름살이 가득했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그 어느 총사보다도 예리하고 노련해보였다.

그가 힘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쏴!”

타타탕!

총사대가 하늘로 예포를 쏘았다. 콩볶는 듯한 요란한 총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졌다.

그 무렵, 4층짜리 황궁 건물 전면의 발코니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벨 황녀였다. 마차 안에서 벨린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예식을 따른 것처럼 보였다. 황녀는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도록 금색 실크 벨트를 둘렀고, 은빛 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손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주석 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며, 고개를 들고 걸어오는 모습이 엄격해 보였다.

그녀가 지금 당장 여제가 됐다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예포 사격을 끝낸 총사들이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받들어총을 하며 힘차게 구령을 붙였다.

“포 엠페라도 데 글로리아!”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이 말은 제국에 충성하는 군인들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구어였다. 제국의 모든 병사들이 이 말을 경례 대신 사용했다.

근위총사들의 외침이 하늘로 울려 퍼지자, 이사벨 데 아라고른 황녀는 손을 들어 그들의 충성심에 답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약간은 지친 걸음으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벨린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은 하늘만이 알 터였다. 어쩌면 속으로 감흥을 받아 뭔가 결심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감흥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허나 벨린은 어느 때와 다르게 두 손을 꽉 쥐고 있었고, 그의 갈색 눈빛은 무언가 삶의 목표가 생긴 듯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근위총사대가 구령에 맞춰 절도있게 해산했다. 그들은 황궁 건물의 왼쪽 끝에 위치한 총사대본부로 행군하기 시작했고, 잠시 열병식 때문에 정지해 있던 마차는 그들보다 한발 짝 먼저 총사대본부로 천천히 향했다.

마침내 마차가 도착하자 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행군하는 총사대 앞으로 예복을 입은 총사대장이 앞장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벨린과 스피놀라를 보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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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베나레스의 총사(11) +28 06.09.22 8,914 18 8쪽
10 베나레스의 총사(10) +25 06.09.21 9,273 20 13쪽
9 베나레스의 총사(9) +16 06.09.21 9,133 18 9쪽
8 베나레스의 총사(8) +20 06.09.20 9,227 20 9쪽
7 베나레스의 총사(7) +22 06.09.18 9,498 22 11쪽
» 베나레스의 총사(6) +24 06.09.17 10,256 20 20쪽
5 베나레스의 총사(5) +19 06.09.16 10,952 18 9쪽
4 베나레스의 총사(4) +32 06.09.15 12,955 19 26쪽
3 베나레스의 총사(3) +31 06.09.14 16,021 28 13쪽
2 베나레스의 총사(2) +23 06.09.14 20,020 42 12쪽
1 베나레스의 총사(1) +41 06.09.14 45,890 4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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