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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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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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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베나레스의 총사(4)

DUMMY

벨린의 아버지, 빈센초 데 란테는 히스파니아 제국의 총사대를 빛낸 용감한 총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호쾌한 성격에, 평범한 체격에 평범한 얼굴을 지닌 갈색머리 사내였지만 전투적인 능력에서만큼은 맹위를 떨쳤다.

그는 귀신같은 머스킷총 사격 솜씨로 유명했다. 그러나 총사가 총만 잘 다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애당초 총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총사는 유격전에 능한 만능 전사다. 그들은 검과 총검을 한번 휘둘러 세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 공성전과 포대점령에 능하며, 강선이 파인 머스킷총으로 먼 거리의 요인을 저격할 줄도 안다.


빈센초 데 란테가 활동하던 때는 바야흐로, 같은 기독교도들 간의 전쟁이 펼쳐지던 시대였다. 그 전까지 전쟁은 이교도들과 벌이는 성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허나, 종교 혁명 이후 신교의 탄생과 이에 따른 대립이 이어지고, 빌랜드, 그러니까 히스파니아 옆에 붙어 있던 섬나라의 왕이 몸소 교회 독립을 선언하면서 에우로파 대륙의 정세는 순식간에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 신교도의 수장이 된 빌랜드와, 구교의 전통적인 수장이었던 히스파니아의 종교분쟁은 전쟁 행위로까지 번지고 말았고, 이 전쟁은 히스파니아가 신교도들의 내전 때문에 전쟁터에서 회군할 때까지 10년 동안이나 이어져 에우로파 대륙 전체를 파탄에 빠트리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젊었을 때의 빈센초는 전쟁터에서 일개 대대 이상의 보병부대와 수많은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들과 맞서면서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그렇게 청춘을 바친 이후, 그는 돌연 총사직에서 사퇴하고 자신의 고향이었던 란테 지방으로 돌아가 결혼을 했다.

전쟁터에서 잘나가던 그가 왜 갑자기 가정을 이루고 사냥꾼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아들인 벨린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중년의 아버지는 틈틈이 과거의 무용담을 신명나게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러나 막상 아들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세히 물어볼라치면 다른 핑계를 대며 회피하고는 했던 것이다.

이 경험은 벨린의 심정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고, 그는 총사가 되는 것이 참으로 멋진 일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냥 일을 배웠지만, 애당초 사냥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풍류를 즐기고, 나라로부터 녹을 받으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커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총사가 되기 위한 수련은 자연히 사냥의 연장선상으로 어릴 때부터 진행되었다.

벨린은 아버지를 따라서 사냥 일을 했고 일곱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그의 사격 솜씨는 이미 매우 뛰어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냥총을 다루었다. 상황에 따라 그가 사격을 하는 과정은 천차만별이었다. 한마디로 사냥 그 자체를 즐겼다고나 할까. 그는 항상 여유가 있었고, 상황을 통제하며 느긋하게 행동했다. 어떨 때는 몇 시간 동안 깊이 잠복해 있다가 은밀히 총탄을 날리기도 했다. 물론 이 기술은 인간끼리 싸우는 실전에 쓰일 수도 있었다.

“곰처럼 총탄에 내성이 있는 큰 동물을 잡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단다. 녀석은 급소를 노리지 않는 이상 한방에 죽지 않아. 그럴 때는 애당초….”

“신중히 잠복해서 머리를 한방에 노리라고 하셨잖아요. 녀석은 둔해보여도 무척 빠르니까요.”

“녀석, 머리도 참 좋다.”

더 이상 사냥에 대해서는 특별히 가르칠 것이 없게 되자, 아버지 빈센초는 본격적으로 그를 총사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벨린은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단번에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총사는 단지 총을 잘 쏜다고 해서 되는 직업이 아니었다. 총사는 전쟁터의 엘리트들 가운데 하나로, 다른 엘리트들인 마법사나 기사, 궁수들과 대적할 전투력을 지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을 주 위주로 하되 다재다능한 전사가 될 필요가 있었다. 검술과 근접 격투술은 물론이고 서클 마법에도 능통해야 했으며, 그와 함께 학문과 지식에 힘쓰고 ‘신사’다운 예절과 격식도 갖춰야 했다.

벨린이 열한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의 총사대 제복을 보여주었다. 날렵해 보이는 깃털달린 가죽 모자에, 약간 낡기는 했어도 여전히 푸른색을 띄는 총사대 제복을 말이다.

아버지가 그의 손 위에 어깨를 올리며 물었다.

“이것을 입고 싶으냐?”

벨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총사 이야기. 아버지께서 잠잘 때마다 해주신 머스킷총(사냥총이 아닌 정말 무거운 총)을 들고 전장을 누비면서 적군을 해치우고 공적을 세우는 총사의 모험담.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를 총사로 가르치려고 하고 있었다.

소년은 다소 떨렸지만, 그래도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네.”

그날 부로 당장 훈련이 시작되었다.

벨린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무거운 머스킷총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에우로파 대륙의 머스킷총은 이미 오십 년 전에 처음으로 제식 화되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오는 무기였다. 이 총은 기사의 두꺼운 갑주를 뚫기 위하여 무거운 탄환을 발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강철과 강목으로 무겁고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히스파니아 총사들이 사용하는 총은 비록 장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먼 거리에서도 적을 저격할 수 있는 강선이 파인 머스킷총이었다. 이 총의 무게는 무려 7킬로그램이나 되었고, 이렇게 무거운 총을 전장에서 장기간 휴대하려면 당연히 튼실한 체력이 필요했다.

벨린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보병총을 들어보았다. 낡기는 했지만 잘 손질이 되어 있었다. 금속으로 깎아 만든 은빛 총열은 반짝거렸고, 나무로 만든 개머리판도 쳐다보면 얼굴이 비춰질 정도로 윤이 났다.

“한번 들어 보거라.”

벨린은 마치 보물을 다르듯이 조심스레 그것을 들어보았다. 묵직한 감이 느껴졌다. 소년의 얼굴이 자연히 일그러졌다. 무슨 돌덩이를 들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이제 어깨에 붙여 조준해 보거라.”

그는 있는 힘을 다 쓰면서 총을 간신히 수직으로 세워 뺨에 붙였다. 그러나 수평으로 조준하지는 못했다.

“이거…. 너무 무거워요.”

소년이 낑낑거리면서 총을 도로 제 자리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이 총을 들어올릴 때가지 노력해야 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팔뚝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어린 아이 치고는 알통이 상당했다. 어릴 때부터 엽총을 들고 사냥한 덕분이었다. 허나 무거운 보병총을 들어올리기에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팔에 근육을 좀 많이 붙여야겠구나.”

아버지가 벨린에게 시킨 첫 수련은 간단했다. 몸을 단련케 하는 것이었다. 근력을 기르고 지구력을 늘리는 수련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행해야 할 일이었다.

그날부터 벨린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팔 굽혀 펴기 같은 근육 단련을 했고, 아버지를 따라 매일 사냥을 하러 나섰다. 아버지는 더 이상 사냥을 나갈 때 아들에게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빈센초는 아들이 아직 어린아이인 것을 고려해서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녔지만, 이제는 마치 표범이 산을 타는 것처럼 이산 저산을 재빠르게 타고 다녔다. 두 부자를 따라다녔던 은빛 늑대가 혀를 내밀면서 헥헥거릴 정도로 말이다.

긴박한 움직임에 적응치 못한 소년으로써는 당황할 일이었다. 아버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렵했고, 아무리 더운 날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반면 벨린은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절대로 소년을 봐주거나 하지 않았다.

“벨린, 이러다 해가 다 지겠다.”

“죄송해요, 아버지. 좀 더 노력할게요.”

아들로써는 이러는 아버지가 갑자기 매정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벨린은 어느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성격상 군말도 없었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기까지 했다.

밤에는 어머니가 벨린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 외에는 출신을 알 수 없는 붉은 머리 마법사였다. 그녀는 똑똑했고, 이러한 촌구석에 살기에는 미모조차 뛰어났지만, 벨린을 무척이나 헌신적으로 가르쳤다.

저녁 식사부터가 고역이었다. 낮에 그렇게 아버지와 사냥을 하고 오면 지친 나머지 식욕이 뚝 떨어졌는데, 어머니는 그에게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과 고기, 야채를 먹였다. 배가 터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저녁을 다 먹고 나면 그때부터는 차라리 낮에 뛰는 게 나았다 싶을 정도로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공부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기 이름을 양피지에 옮겨 적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마법사였던 어머니는 그에게 히스파니아어뿐만 아니라 먼 옛날 거대한 제국의 언어였다는 라투니스어까지 가르쳤다.

“어머니, 이 언어는 어디에 써요?”

“서적이나 마법서를 읽는데 쓴단다. 마법 주문을 외울 때도 쓰지.”

벨린은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타내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아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내리고는 했다.

“나는 네가 라투니스어도 모를 정도로 무식쟁이가 되게 놔둘 순 없다. 네가 훗날 총사가 되어 전쟁을 치르면 결국에는 많이 알고 영리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리라는 걸 알게 될 게다. 네 아버지만 빼고!”

어머니에게 붙잡혀서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지루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녁까지 배불리 먹고 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지고는 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졸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졸 때면 정신을 번쩍 차리도록, 손바닥으로 불꽃을 뿜어내고는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벨린이 잘 견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인내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외에도, 의지하며 견딜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 * *

벨린의 갈색 눈에는 잠시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 같은 게 투영되어 있었다. 그것은 스피놀라가 연거푸 포도주를 마시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자연히 사라졌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이 총사는 물가가 올라 포도주가 금값이 된다 해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점점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이도 생겼다.

“오호, 아미고(내 친구).”

깃털 모자에 붉은색 제복, 허리에 검을 찬 이인조가 스피놀라에게 인사를 했다. 이 세 사람은 자기들 끼리 잠시 웃고 떠들었고, 벨린은 빙그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피놀라가 벨린을 설명했다.

“이 친구는 벨린 데 란테라고 하네, 이 혼란한 세상에, 보기 드문 영웅이지. 그것도 진정한 영웅이야. 웬 줄 아나? 우리의 귀한 황녀 마마를 신교도들로부터 구하는 공적을 세웠는데도, 함부로 허풍을 떨지 않으니까 진정한 영웅이라는 거야.”

“우리의 황녀 마마께 경의를.”

붉은 제복을 입은 자들이 잔을 들어올리며 한 마디 했다. 스피놀라와 벨린이 건배에 동참했다.

그들이 또 한번 포도주를 비우고 나자, 붉은색 제복을 입은 이인조가 인사를 하고서는 저만치로 사라졌다.

스피놀라가 설명했다.

“저 친구들은 카라비나리(헌병군) 소속이다.”

“헌병군이요?”

벨린이 물었다. 스피놀라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추기경 각하의 직속 군사들이지. 멋지고 좋은 녀석들이다. 그나마 나라가 치안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믿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저 녀석들은 전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저들은 옛날에 우리 제국에 있던 성 세바스찬 기사단도 저들 소속이란다.”

기사단. 이 시대에는 거의 퇴물이 되어가는 단어가 되었다. 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았던 중갑기병들은 이제는 그 지위를 다른 자들에게 물려주는 판국이었다. 그들의 갑옷과 랜스는 발달하는 총과 마법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나마 근래까지 마법사들은 움직이는 포대 역할을 하여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그러기에는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이었기에 갈수록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기사단이 명예직이 되었다는 것을 벨린은 잘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한 스피놀라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감사의 말을 표하는 것을 잊었군. 자네의 그 마력탄 때문에 귀중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거야."

"마력탄이 무엇인지 아시는군요."

"이래뵈도 나도 지식이 좀 있다네."

그가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우리는 그것을 구할 수 없네. 그런 건 엄청난 사치품이거든. 어쩌면 총사와 마법사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좋은 무기이네만 히스파니아에서는 만들 수 있는 이가 없어. 그런데 대체 마력탄은 어디서 얻은 건가?”

“제 어머니는 마법사이십니다. 좋은 마력탄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셨죠.”

벨린이 간단히 대답했다. 목소리도 여전히 또렷했다. 그는 스피놀라와 같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선천적으로 술에 잘 취하지 않았다.

스피놀라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 탄환은 무척 비싼걸. 위력은 대포에 버금나지만 그것을 함부로 쓰다가는 쫄딱 굶기 십상이 아닌가.”

“저는 그 정도의 대가는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바라는 대가는 뭐지?”

“총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 아니야, 아니야.”

스피놀라가 짜증을 내며 손을 저었다. 그는 벨린의 그런 진지함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지금은 그 딴 일을 가지고 자네와 상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용감한 히스파니아 총사대 장교라고, 놀 때는 놀고 진지할 때는 진지해지는 게 내 신념이란 말이야.”

스피놀라가 비틀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벨린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휘파람이라. 이것은 히스파니아 사내들이 여관에서 계집질을 할 때 쓰는, 사내들이 아내들에게는 절대 발설해선 안 되는 은어 같은 표현이었다. 오죽하면 휘파람도 못 불면 계집질도 못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포주로 보이는 늙은 여자가 두 사내에게 왔다. 그녀가 술에 취한 스피놀라와 벨린을 이층으로 인도해갔다.

그들은 이층의 객실 복도에 당도했고, 콧수염을 기른 총사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벨린에게 소리를 쳤다.

“그럼 나 먼저 실례하겠네. 모든 비용은 내가 낼 테니 오늘은 그냥 즐기세! 총사가 되고 싶다느니 국가에 충성하고 싶다느니, 엿 같은 소리는 내일 실컷 씨불이라 이 말이야.”

“잘 알겠습니다.”

풍만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스피놀라를 객실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구면인지 방으로 들어가며 서로 키스를 했고,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벨린의 옆에도 어느덧 생면부지의 아가씨가 하나 붙어 있었다.

스피놀라의 호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디 애인과 아내가 서로를 만나지 않기를! 하하핫!”

잠시 가만히 서 있던 벨린은 금세 옆에 붙어 있던 아가씨의 손에 객실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는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서는 누구나 벨린 또래가 되면 경험을 하기 마련이니까. 사내로써 계집질쯤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침실은 세 평 크기의 방이었다. 벨린은 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창녀는 젊은 아가씨였다. 벨린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다. 그녀는 가슴이 파인 검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갈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렀으며, 짙게 화장을 한 예쁜 얼굴이었다. 이 여관의 포주가 스피놀라의 지시로 특별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옷을 다 벗은 벨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그녀가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어쩌면 흉물스럽게 늙은 남자보다는, 벨린처럼 젊고 건강한 남자가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알몸으로 침대 위에 올랐다. 벨린은 금세 아무런 생각 없이 빠져들었다. 이윽고 밤이 깊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탐하는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졌고, 몸이 도가니탕에 빠진 듯이 녹아 녹초가 되고나서야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장 - 동맹


제국의 혼란은 장기간에 걸쳐 여러 부분으로 심화되어왔다. 지방에서는 이미 치안력이 상실된 지 오래였고, 군대가 아무리 토벌을 하려고 애를 써도 이럴 때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려는 격이었다. 2년 전에 종결된 내전의 후유증이 아직도 기승을 부렸다. 조금이라도 방심할라 치면 온갖 도적들이 흉포를 부리고 다녔고, 결국에는 백성들 스스로 맞서 싸우거나 극히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몇 년 간 흉년이 겹쳤고, 잘못된 정책이 지속되어 물가까지 상승하면서 안정은 좀처럼 찾아들지 않을 기세였다.

이러한 혼란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구교간의 내전과, 내전 종결후 바로 지속된 10년 전쟁의 참전,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절대군주, 즉 황제의 부재가 재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간 황제 페란테2세는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지속되고 있는 전쟁과 국내외적인 위기를 훌륭히 극복해왔다. 허나 절대왕정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 절대군주가 무력해진다면 나라의 안정이 급속도로 상실된다는 점이었으니, 그런 면에서 고난은 불가피했다.

반년 전, 오십의 나이를 바라보던 페란테2세는 그만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의사들은 비밀리에 이 병이 불치라고 진단했다. 그리하여 페란테 2세는 아직 의식이 온전한 시기에, 자신의 황위를 장녀 이사벨 데 아라고른 황녀에게 승계한다고 공식 선언하게 되었다.

황가의 법도는 황제의 자리를 남녀 구분하고 장자에게만 승계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선례도 충분했다. 역대 히스파니아 황제들 가운데 여제는 두 명이었고, 그 가운데 2대 황제 이사벨1세는 히스파니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런 고로 이사벨 황녀가 여제가 되는 것은 황권신수설보다도 더 확고한 운명이요, 누구도 부인 못하는 사실이었다.

황제는 이사벨 황녀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녀에게 권력을 승계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녀가 섭정이 된 것은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마가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고, 아닌 게 아니라 황제는 공식적인 임명식을 가진 다음 날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는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습격이 일어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사벨 데 아라고른 황녀가 톨레노 지방에 있는 어머니의 묘를 참배하고 오다 과격한 신교도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사실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기에 황실에서 모든 소식을 통제한 것이었다.

이사벨 황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어느 때처럼 활동을 계속했다. 주요 신하들의 우려와 달리, 황녀는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놀라운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고, 슬슬 제국의 혼란을 잠재울 실마리를 마련해가는 중이었다.

습격을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국정 전반에 따른 결정을 좌우했고, 자신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많은 자문을 구하러 다녔다.

그 날은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의 자문을 구하러 가는 날이었다. 황녀는 그 어느 때처럼 제국의 위용을 선보이는 화려한 궁정마차를 타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때 마침,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한 죄수를 교수형에 처하는 일이었다. 상류층, 하류층,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사형대를 둘러싸고 소리치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의아스러운 일이지만, 그 사형수는 흉악범이 아니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었고, 사람을 죽인 적도, 도적질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다만 경제 정책을 잘못 세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것으로도 잘못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딸그락.

두건을 쓴 사형집행인이 지렛대를 내렸다. 그러자 밑바닥이 꺼지면서 올가미를 목에 감은 사형수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처형은 그것으로 끝났다. 성난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며 죽어가는 사형수에게 돌을 던졌다. 그 함성을 들으면서, 사형수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숨이 막힐 때까지 곱씹을 터였다.

창문을 통해 사형집행 장면을 바라보던 황녀는 냉정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관료를 처형한 일은 안 된 것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했다. 나라를 온건히 유지하려면 백성들의 민심을 헤아릴 줄 아는 일은 필수였다.

그녀가 냉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자.”

마차는 빠른 속도로 아스티아노의 변두리를 향하기 시작했다. 히스파니아 동방회사의 사옥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사벨 황녀는 마차 안에서 화장을 고치면서 사형수의 잘못에 대해 잠깐 동안 생각을 해봤다.

사실 사형수는 자신의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심지어 사형명령서에 서명한 그녀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신대륙에서 은괴를 수송하여 은화를 주조하여 내전과 10년전쟁의 군자금으로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짓은 그의 전임자도 꾸준히 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으로 밝혀진 이상, 그는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구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화를 달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마차가 아스티아노 변두리에 세워진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최신 건축 양식으로, 황궁만큼 위용이 넘치게 지어진 호화 건물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황실이 아닌 부르주아들의 민간 회사가 세웠다는 점을 볼 때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문을 열어주었다.

하얀 가발을 쓴 회사의 주요 간부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코트를 차려입고 나와 있었다.

“황송합니다, 마마.”

한 젊은 남성이 황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절을 하며 그녀의 은빛 황실인장 반지에 키스를 했다.

이사벨은 도도한 눈으로 그 자를 내려보았다.

“하례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주스티안 데 모리체입니다.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의 설립자 가운데 한사람이자 최근 총회를 통해 선출된 제3대 총수입니다.”

황녀는 마음속으로 약간 놀랐지만 얼굴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부르조아가 그 유명한 돈 주스티안이란 말인가. 그녀는 잠시 동안 도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돈 주스티안은 검은 머리에, 수염을 면도한 세련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가발을 쓰지는 않았지만 최신 유행하는 양식의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이었고, 돈이 많은 부르조아가 다 그러하듯 전통적인 귀족 신사의 분위기를 흉내 내어 꾸미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키는 백칠십 센티미터 정도 되었고, 나이는 한 삼십대 중반인 모양이었다.

그가 앞장을 서서 황녀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사무실을 거쳐 지나갔다. 이곳에는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과, 파는 사람들, 식민지에서 얻은 각종 수익과, 무역물의 유통과 여러 가지 이득 계산을 하는 사람들로 항상 시끄러운 곳이다. 대부분이 회사의 직원들과 주식업자들과 이 회사의 물자로 이득을 보는 상공업자들이었고, 때 마침 정기 경매가 벌어지는 시간이었던 터라, 모두들 가격표와 시세표가 써진 종이를 흔들어대면서 열심히 소리를 치고 있었다.

“세노르 상공회에서 사십만 삼천 페소!”

“빌렌 교역소에서 십만 천 이백 페소!”

“황녀 마마 납시오.”

황실에서 온 시종이 말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황녀의 등장을 확인하고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무릎 꿇고 절을 했고, 황녀가 냉정한 얼굴로 지나가자 다시금 여러 숫자들을 부르며, 주문 표를 하늘 위로 날리고 떠들어댔다.

마침내 돈 주스티안의 사무실 앞으로 당도하자, 황녀가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잠시 나가보도록 하라. 잠시 돈 주스티안과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예. 마마.”

수행원들이 물러났다. 이사벨 황녀와 돈 주스티안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찬찬히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소박해보였다. 아무런 특징도 찾을 수 없다고나 할까. 벽에는 회칠이 되어 있었고, 구석에 데스크 하나와, 지구본 하나, 정 가운데에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특징을 찾아야 한다면, 사무실 한 구석에 있는 교역품의 샘플들을 눈 이겨 봐야 했다. 그것들은 벽에 붙은 테이블 위에 병으로 담겨 있었는데, 주로 값비싼 향신료들이었다. 정향, 육두구, 후추 등등 동방 세계에서 가득 난다는 귀한 양념들이었다. 더불어 배의 모형 같은 것도 하나 있었는데, 그 배는 커다란 갈레온으로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를 상징하는 사기와, 히스파니아 국기가 마스트에 걸려 있었다.

돈 주스티안이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 황녀를 앉혔다. 그가 테이블에 서서 물었다.

“귀중한 차를 한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마?”

“기꺼이 받겠노라.”

히스파니아 동인도 회사의 총수가 테이블에 놓인 은제 차 세트에 손을 댔다. 차를 우려내어 찻잔에 담아 정제설탕을 넣는 그의 손놀림에 열의가 묻어났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향긋한 차의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뜨거운 찻잔을 이사벨 황녀에게 바치며 말했다.

“마침 재무대신의 소식을 전해 듣던 차였습니다, 마마. 그가 상공업이나 경제에 대한 것은 거의 까막눈에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이 더욱 컸습니다.”

이사벨이 도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역적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느니라. 그 자의 세치 혀로 나라의 살림이 좌우된 판국에, 그보다 더 큰 죄는 있을 수 없지.”

“하례와 같은 말씀이십니다.”

돈 주스티안이 의자를 끌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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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2

  • 작성자
    Lv.6 읽기쓰기
    작성일
    10.11.12 04:52
    No. 31

    빈센초 데 라 란테... 했으면 더 폼났을텐데요 ㅋㅋㅋ
    히스파냐어에서는 관사를 안쓰나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transistor
    작성일
    10.11.25 17:40
    No. 32

    황제가 자식을 늦게 봤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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