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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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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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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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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9)

DUMMY

* * *

이사벨 데 아라고른 황녀는 오랜 만에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지난주에 습격이 있은 이후, 그녀는 마음 편하게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섭정이 된 이후로, 그녀는 언제나 암살이나 납치에 대한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 날의 깊은 잠은 단지, 일주일 동안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축적된 피로를 푸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의 반정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옛날에도 이런 짓을 했고, 이러한 반국가적인 행위는 황제가 위중한 틈을 타서 심상찮게 보고 되었다. 제국 국민들 가운데 5%가 이 종교를 믿었지만, 이 나라에서 그 교파는 엄연한 불법이었고 황녀는 제국을 전복하려는 그 역적 무리들을 하루 속히 소탕하라는 법령을 제정한지 오래였다. 그들은 개종을 하지 않는다면 추방되어야 했고, 추방되기를 거부한다면 목숨을 내놔야 했다.

그런 면에서 놈들의 시도는 좋았던 셈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사벨은 하얀 원피스 잠옷 차림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평온한 모습이었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이사벨은 잠자는 모습도 아름다웠고, 이것은 그녀가 선천적으로 아름답게 태어난 덕이었다. 그녀는 가인 성향을 지닌 아라고른 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머리칼은 전형적인 히스파니아 미녀의 특색이라는 짙은 검은색이었고, 피부도 그만큼 곱고 하얘서 이목구비와 몸매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뤘다.

물론 그 바쁜 집무를 이뤄내면서 몸을 가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이 우러러보는 아름다움도 나라를 지키고, 황권을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에 몸을 단정하는 데는 한시도 게을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도 졸렸다. 그녀는 일정을 끝내고 욕조에서 피부를 곱게 할 목욕을 하고 나오자마자 오후의 고단함에 침대로 저절로 쓰러지고 말았다.

발코니 쪽에서 나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근처의 근위총사대 훈련장에서 나는 모양이었다.

이사벨은 그 소리에 스르륵 눈을 떴다. 자신이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깜짝 놀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네 시간은 잔 모양인데. 이럴 수는 없었다. 집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오,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이사벨은 서둘러 화장대로 가서 앉았다. 처리해야할 일이 산더미였다. 국채 발행으로 수익을 얻는데 따른 현안에 때문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러나 이 모습으로 집무실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녀가 열심히 화장을 시작하는데, 별안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하들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라. 금방 갈 것이다.”

늙은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신하들께서는 마마를 찾아뵙고자하는 귀한 손님이 오셔서 이미 돌아가셨사옵니다.”

“손님?”

누군가 문을 열었다. 화장대에 앉아 있던 이사벨은 꽤나 놀랐다. 어느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문을 연단 말인가. 만약 신하들이 있다면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는….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신하가 아니었다. 그 이는 충분히 이 문을 열고 들어올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디에네!”

이사벨이 얼굴 만면에 반가운 기색을 띄웠다. 금발 머리를 한 소녀가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소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언니.”

디에네 데 아라고른. 히스파니아 제2왕녀. 그녀는 이사벨로서는 하나밖에는 친동생으로써, 이사벨과는 달리 황후의 특징이었던 금발머리를 물려받았다.

히스파니아인들은 대부분 남방 인종의 특성에 따라 피부가 잘 타고 머리도 검은색이거나 갈색인 경우가 많았지만, 저 멀리 란툰 반도의 공국에서 시집을 온 금발머리 황후는 그녀의 두 딸에게 약간은 이국적인 혈통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사벨도 그녀의 혈통 가운데 일부를 물려받기는 했다. 가령 하얀 피부가 그랬다. 그녀의 하얀 피부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꽤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황후의 성향이었다.

물론 이사벨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았다. 그녀는 매사가 강인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적극적인 후계자교육을 받았고, 그 덕택에 스물이 된 이 나이에 섭정 일을 잘 맡아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신체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로 남성 신하와 명사들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했으며, 이것은 앞으로 그녀가 황제가 되면 큰 도움이 될 기반이었다.

그러나 디에네 데 아라고른은 그녀의 언니와는 정 다른 성향이었다. 그녀는 좋게 말하면 착하고 온순했지만 나쁘게 말하면 유약하고 의지력이 약했으며 딱히 황족으로써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신앙심인데,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세례를 받은 독실한 기독정교 신자였고, 한번도 교회의 가르침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 징표로 그녀는 은빛 십자가를 항상 매고 다녔으며, 이사벨 앞에서 장래희망이 수녀라고 수줍게 고백하고는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황제가 위중해진 이후 기도를 드리러 간다며 수녀원으로 피정을 했고, 그곳에서 두 달 만에 돌아온 참이었다.

디에네를 보고 있노라면, 이사벨은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는 했다. 그녀는 공식적인 집무를 볼 때는 위엄을 차리고 항상 도도한 표정을 지으려고 표정관리를 했지만, 디에네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디에네의 순수함과 신앙심 때문일까. 이사벨처럼 나이는 먹어갔건만, 그녀는 여전히 순진무구해보였다.

두 자매는 화려하게 장식된 살롱으로 가서 히스파니아 동방회사에서 들여오는 값비싼 차를 마셨다. 시국이 어지러운 이 마당에도 차는 여전히 귀족들이 흔히 즐기는 사치품이었고, 그녀들처럼 귀한 피를 물려받은 황족들에게도 어울리는 음료였다.

이사벨이 물었다.

“그래, 기도는 잘 하고 있니?”

“응.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이사벨의 목소리가 조금은 우울해졌다.

“여전히 차도는 없으셔.”

디에네가 눈물을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이사벨이 의연한 어조로 점잖게 말했다.

“디에네, 너한테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이 세상은 너무 세속적이야. 기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무진장 많지.”

이사벨이 한숨을 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디에네를 바라보았다. 디에네는 그저 순진무구한 눈으로 이사벨을 쳐다볼 뿐이었다.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어차피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실 거라면 지금이라도 대비를 하는 게 나아. 우리에게는 아바마마 없이도 이 나라와 황실을 이끌어갈 지혜가 필요해.”

“하지만 열심히 기도를 했는걸.”

디에네가 눈물을 글썽이며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사벨이 간단히 대꾸했다.

“그럼 그게 신의 뜻인 모양이겠지.”

디에네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이사벨이 자기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얼굴이 빨개진 디에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 맞아. 언니 말은 다 옳으니까. 그렇다면, 아바마마가 하느님 곁으로 가기 전에 하루라도 더 뵙고 싶어. 언니 우리 아바마마한테 같이 가자.”

이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디에네. 너 혼자 가도록 해.”

“왜, 언니?”

이사벨이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중대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어. 이 나라가 다시금 평정을 되찾도록 하는 일이야. 그때까지는….”

황녀는 결연에 찬 듯한 눈길을 보냈다.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어. 이건 결코 내가 아바마마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냐.”

“하지만….”

이사벨이 굳건한 얼굴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디에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디에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변한 언니에게 겁을 집어 먹고 방을 나섰다.

이사벨은 차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너무 냉정해진 것은 아닌가, 염려되긴 했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아버지의 얼굴을 봤다가는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었다. 모든 일을 무사히 해치우고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철저히 냉철해져야 했다.

그런 다음 아버지가 살아계시든 뵙고, 이미 돌아가셨거든 무덤을 찾아뵙는 것이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아버지도 그것을 원하실 것이다.

그녀는 집무를 보러 나갈 겸 응접실에서 나갔다. 집무실이 바로 옆이었다. 시종이 디에네 제2황녀가 막 황제를 뵈러 갔다고 알려주었고, 이사벨은 그녀를 잘 보살펴주라고 명령했다.

그 무렵이었다. 눈앞에서 진홍색 제복을 입은 늙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황녀가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냉랑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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