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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연재수 :
17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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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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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02,223

작성
06.10.0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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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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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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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베나레스의 총사(18)

DUMMY

* * *

이사벨 황녀는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입은 코르셋이 맵시 있게 허리를 조였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10대 시절에도 코르셋을 종종 입었지만, 그때에 비해 몸매가 성숙해진 지금이 더 잘 어울렸다. 그녀는 이제어른이 됐고, 어느새 허리를 날씬하게 만들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 빌어먹을 속옷의 필요성도 수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여전히 답답하군. 이사벨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참으며 시녀들의 도움으로 비단 드레스를 입었다.

이 드레스는 매우 기품 있으면서도 귀중한 것이다. 치이난이라고 하는 동방의 큰 나라에서 직수입해온 비단으로 재단한 것이다. 드레스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은빛이었고, 당시의 최신 유행에 걸맞게, 레이스와 가슴이 페인 장식이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그녀는 (평민들이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비싼) 하얀 색의 비단 스타킹을 직접 신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은빛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는 막 화장대에 올려둔 황실의 인장 반지를 끼우던 참이었다.

“이제 그만 물러가 보아라.”

시녀들이 굽실거리며 절을 하더니 사라졌다. 이사벨은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이래서 시녀 따위에게 화장을 맡기면 안 된다니까. 그년들은 너무 점잖은 화장을 해준단 말이야.

이사벨은 마스카라 대용으로 사용하는 솔에 염료를 묻혀서 아이셰도우를 다시 칠하기 시작했다.

무심결에 화장대 밑에 있는 편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사벨은 화장을 끝내자마자 편지를 펼쳐 읽었다.


내일이 되면 마마께서는 또 제게 빚을 졌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평안하시길 빌겠습니다.

-벨린 데 란테-


이 편지를 받은 이후, 화약음모사건이 그 자 덕분에 해결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중앙은행 개관식 때 지하에 화약을 폭파시켜 개관식에 참석한 모든 인사를 죽이려고 했다. 그곳에는 이사벨도 있을 예정이었다. 그 자가 또 한 번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사벨은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고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마치 다른 곳으로 화를 풀듯, 무자비한 숙청에 들어갔다. 반역자들이 지니고 있던 명단에 오른 자들은 모조리 국가반역의 혐의를 받고 처형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수는 족히 사십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영향력 있는 귀족이나, 상인, 정계, 재계의 인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자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것과는 별개로, 이사벨이 벨린 데 란테에게 또 한번 빚을 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그 자를 올바르게 대우해야 하는 황녀로서는 더욱 난처해지는 판국이었다.

‘과연 그 자가 원하는 것이 뭘까.’

황녀는 그 자의 총사대 훈련 수료 일에 맞춰 그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그 자는 이번엔 초대에 응했다. 두 차례 공적으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드디어 나서기 시작한 것 같았다.

황녀는 편지를 접어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는 생각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자의 얼굴이 가물가물한 마당에 어떤 위험과 대면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사벨은 주로 상대하는 아래 것들을 무능한 자와 유능한 자로 나눴는데, 바보처럼 무능한 자보다는 유능한 자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시종이 처소의 문을 두드리고 아뢰었다.

“마마, 무도회 시간이 다 되었사옵니다.”

“곧 갈 테니 기다리거라.”

이사벨은 마지막으로, 화장대의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은빛 관을 썼다. 궁중에서 개최하는 연회에 관을 쓰지 않고 가면 신민들이 섭섭해 하겠지. 이사벨은 그저 철없는 어릴 때처럼 궁중 연회를 순수하게 즐길 수 없는 것이 섭섭할 따름이었다.

* * *

황궁에서는 일년에 네 번 귀족과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주로 성인의 축일 날에 무도회 겸 연회를 여는 것이 관례인데, 그 날은 11월의 축일인 성 베나레스의 날이었다. 이 축일은 그리안력이 아닌 오래 된 태음력을 기준으로 날짜를 정하기 때문에, 총사대 수료식과 날이 겹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한 가지 신기한 일은, 벨린이 이 성 베나레스의 축일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벨린은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날짜를 대조해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재미있어 했다. 보통 그는 날짜나 생일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황궁의 시종으로부터 받은 성 베나레스의 축일 연회 초대장을 보고나서 눈치를 채게 된 것이다.

“기묘한 우연이군.”

그러나 벨린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느덧 마차는 황궁의 정문을 통과하여 아름다운 정원과 무도회장이 자리 잡은 건물 입구에 멈췄다.

그가 레이스 장식이 된 화려한 옷을 입은 시종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시종이 무도회장 안으로 외쳤다.

“제국 총사대 소위 세뇨르 벨린 데 란테 입장이요!”

총사대 소위라. 벨린은 살짝 입 꼬리를 올렸다. 초대장 안에 그렇게 적혀 있었단 말이군. 재밌는 일이었다. 황녀가 기선을 잡기 위해 간단한 장난을 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얼뜨기라면 모를까. 기선제압을 할 목적이었다면 벨린에게는 보기 좋게 실패한 격이다. 도리어 그의 기세만 올려주었으니 말이다.

벨린은 총사대 제복의 맵시를 다듬으며 무도화장으로 나아갔다. 고풍스러운 음악이 새어나왔다. 무도회에 참석한 수많은 저명인사들과 고위층 귀족, 부르조아들이 빛나는 옷을 차려입고서는 춤을 추고, 웃고 떠들고, 잔에 담긴 고급 와인과 테이블에 놓인 산해진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은 웬만한 대성당만큼이나 컸다. 내부 장식도 화려했다. 기둥에는 하나 같이 금박을 입혔고, 방 전체의 벽에 양질의 호박으로 조각 장식이 되어 있었다. 넓은 천장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5미터 간격으로 떠 있었고, 바닥은 붉은 양탄자를 깔아 발을 디디며 걸어 다니기 매우 편했다.

무도회장으로 서쪽 벽에는 황궁의 미로 정원으로 가는 양 여닫이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곳은 연인들이 무도회를 즐기면서 잠시 쉴 때, 인상적인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하얀 가발에 붉은 색 연미복을 입은 시종이 벨린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투명한 술이 담겨 있었다. 고급 백포도주처럼 보였다. 벨린은 그것을 들고 단숨에 마시고서는 작게 감명을 받았다. 그 술은 일반 포도주가 아니라 히스파니아에서도 구하기 힘든 리퀴르 증류주였던 것이다.

그 술의 달콤함과 그윽한 향은 단번에 들이키기에는 아쉬운 것이었으니, 벨린은 빈 잔을 놓고, 쟁반을 든 시종을 또 불러서는 한 잔 더 손에 들었다. 연거푸 두 잔을 마신다고 뭐라 그럴 사람도 없었다. 그 역시 이 귀중한 자리에 초대받아 온 신사가 아닌가.

그 무렵이었다. 팡파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도회가 중단되면서, 춤을 추던 신사 숙녀들이 뒤로 물러나서 절을 했다. 벨린은 그들 뒤에서 따라 절을 하면서 옆으로 눈을 흘겼다.

은빛 드레스에 관을 쓴 검은 머리 여인이 무도회장 정 중앙의 옥좌에 나타났다. 이사벨 데 아라고른 황녀였다.

그녀는 위엄 있는 발걸음으로 고개 숙여 절을 하고 있는 신사 숙녀들을 살펴보았다. 하얀 장갑을 낀 손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주석으로 만든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조용해진 무도회장을 둘러보더니, 지팡이를 가볍게 저으며 차갑게 한 마디 했다.

“계속하라.”

그녀는 옥좌로 돌아갔다. 악단은 음악을 다시 연주했고, 귀족들은 다시금 분위기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벨린은 리퀴르를 마저 마신 다음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옥좌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저 얼굴이었지. 벨린은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떠올리게 되었다. 항상 오만한 표정을 짓지만, 그것이 마치 화장을 한 것처럼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그녀의 미모가 벨린의 갈색눈에 투영되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황녀가, 문득 인기척을 느꼈는지 벨린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이 떠올랐고, 벨린은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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