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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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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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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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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0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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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베나레스의 총사(19)

DUMMY

이사벨은 벨린 데 란테의 갈색 눈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는 야성미 같은 열망이 서려있었다. 이사벨이 상대한 권력이 있는 남자들은 의례 저런 눈빛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나 저 사내의 눈길은 그 무엇보다도 강렬해보였고, 바로 저것 때문에, 저 벨린 데 란테라는 자가 그녀의 뇌리에 각인된 것이리라.

이사벨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순간 표정관리를 까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그녀는 뒤늦게 헛기침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저 바람둥이는 그것을 이미 다 봤을 터였다.

이를 어쩐담. 하여튼 저 자와 담판을 짓기는 지어야겠지. 각료들이 눈이 있으니 공식적으로 알현하지는 못해도, 이런 자리에서 몰래 만나보거나 할 수는 있을 터. 그런 의도로 저 자를 무도회장에 초청한 것이 아닌가.

이사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린 데 란테가 그녀와 오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이사벨을 계속 바라보며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기 좋은 체격에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것이 미남인 것은 분명한데, 이사벨로서는 도저히 저 자의 흑심을 파헤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해 봐야 알게 되겠지. 그녀가 그렇게 조심스레 발을 디디는데, 문득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주스티안입니다, 마마.”

이사벨은 얼굴을 획 돌렸다. 연미복을 입은 돈 주스티안이 서 있었다. 그가 이사벨에게 활짝 웃어 보이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마마와 춤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이사벨은 잠시 공황상태에 빠져서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차에, 엉뚱한 경우를 만나니 순간 할 말이 꼬여버렸던 것이다.

그때, 벨린 데 란테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두 사람 앞에 서서 점잖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세뇨르. 마마께서는 저와 먼저 용무가 있으십니다.”

돈 주스티안이 짐짓 놀란 표정을 했다. 그는 벨린을 찬찬히 바라보았고, 곧 경멸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아하니 겨우 하급 장교처럼 보이는데 저런 자가 어떻게 감히 마마의 옥체에 손을 댄다고 나선단 말인가.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의 총수가 다시금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사벨이 다시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고, 그녀는 오만한 눈초리로 부르조아를 바라보며 위엄 있게 말했다.

“그 자의 말이 맞다, 돈 주스티안. 너는 짐이 찾을 때까지 물러나 있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마마.”

돈 주스티안이 뒤로 물러나서는 다른 곳으로 불만스레 사라졌다. 그가 뒤로 사라지면서 무슨 말을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것 같았지만, 악단의 음악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윽고.

벨린과 이사벨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애써 행동을 시작하였다. 음악이 한 곡 끝났다. 벨린 데 란테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추시겠습니까?”

이사벨이 도도하게 대답했다.

“영광으로 알거라.”

두 남녀가 손을 잡았다. 마침 새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남녀는 무도회장의 맨 가운데로 가서 두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린은 이사벨의 허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레 춤을 리드해나갔다. 그들이 추는 춤은 히스파니아 식 세 박자 춤곡이었다. 비록 히스파니아어로는 그냥 무도회 춤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상 왈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춤이었다. 이 춤은 바닥에 발을 디딜 때, 발의 박자를 잘 맞춰 움직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의 발을 밟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사벨은 벨린 데 란테가 이 춤을 능숙하게 추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이 춤은 귀족 같은 상류층에게 유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린의 춤 솜씨는 평민 치고는 제법이었다. 그는 스텝을 매우 잘 맞췄고, 발을 밟을 정도로 무례하지도 않았으며, 춤을 추면서 말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저에 대해 조사를 하셨겠지요. 마마.”

이사벨이 애써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네게 사람을 붙여뒀었다, 데 란테. 듣자하니 너는 한량이라면서.”

“총사대원 감투를 쓴 한량이지요. 마마.”

벨린이 유쾌하게 대꾸했다. 이사벨이 지지 않고 한 마디 더 했다.

“거기다 매주 여자와 잠자리를 바꿔 치는 바람둥이라더군.”

“그렇습니다.”

그가 공손하게 말했다. 이사벨은 내친 김에 더 떠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용감하기도 하지. 감히 이 제국의 통치자인 짐과 협상을 하시겠다.”

“설령 마마께서 여제가 되신다 해도 저는 그랬을 겁니다. 바른 통치자라면 공적을 세운 아랫것을 위해 올바른 포상은 내리셔야 합니다.”

이사벨이 화가 난 듯이 쏘아 붙였다.

“너는 이미 내 포상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 데 란테.”

“저는 이미 마마를 두 번이나 구했지요.”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때 마침 곡이 절정에 이르렀다. 춤의 피날레를 장식할 차례였다. 벨린은 그녀의 팔을 펼쳐서는 황녀의 허리를 잡은 채 부드럽게 몸을 숙였다. 무도회 춤 치고는 파격적인 피날레였다.

황녀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벨린이 그녀를 내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사내입니다. 남녀 간이 얻을 수 있는 선물 가운데 가장 즐거운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서로의 몸과 마음을 취하는 것이지요.”

이사벨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벨린의 그 말이, 이사벨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를 깨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부드럽게 황녀의 허리를 들어 그녀를 원상태로 일으켜 주었고, 산간 벨린의 눈에 반짝거리던 그 열망이 다시금 이사벨의 심경을 자극했다.

이사벨은 벨린의 손을 뿌리쳤다. 도무지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벨린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미로 정원과 연결된 문으로 뛰어갔다.

완전히 지고 말았다. 저런 바람둥이한테 마음이 흔들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솔깃한 것이 있으니, 저 자를 내치지 못한 것이리라.

다음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사벨은 미로 정원의 문 옆의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황녀를 따라 나온 벨린 데 란테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가 벨린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는 듯,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너는 지금 실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벨린이 분명히 말했다.

“마마, 저는 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량이옵니다. 한량에게 재물이나 거창한 벼슬 따위는 필요 없는 법이지요. 저는 그저 마마께서 제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은, 마마의 몸과 마음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드렸을 뿐입니다.”

“발칙한 자 같으니!”

이사벨이 성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벨린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벨린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제게 연민의 정이 없으셨다면, 저는 이미 불경죄로 총살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마마께서는 저를 이곳으로까지 불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네가 짐과 나라를 위해 쓸모 있는 인재이기 때문이다.”

이사벨이 기세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벨린이 태연히 대꾸했다.

“그렇다면 저를 얻으실 기회를 놓치시면 안 되지요, 마마.”

그가 이사벨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매몰차게 내치고 저 무례한 자를 감옥에 가둬야 속 시원할 것 같은데, 어처구니없게도 이상한 마음이 빠른 속도로 그녀의 뇌리를 잠식해나갔다. 지금까지 그녀를 유혹해온 사내들을 교묘히 튕겨왔는데, 어떻게 저 자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심정이 되는 것일까.

만약 이 자리에서 등을 돌아 저 자의 얼굴을 보기라도 한다면 큰 봉변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나는 네 얼굴을 볼 수 없다. 데 란테.”

“원하신다면 어두운 곳이 좋을 것입니다. 마마.”

벨린이 공손히 말했다. 그 말이 이사벨의 심금을 자극했다. 무도회장 입구는 샹들리에의 불빛 때문에 너무도 밝았다.

황녀가 간신히 내뱉었다.

“그렇다면 좀 어두운 곳으로 가자꾸나.”

그녀가 벨린의 손을 끌고, 미로 정원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벨린은 그녀를 따라가며 참 재미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도권은 이미 그에게 넘어갔는데, 황녀는 끝까지 행동을 리드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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