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라그나로크 종말의 구원자 [1부, 대적자 편 완결]
100이 조금 넘는 숫자의 고블린들이 무리를 지어 내달린다.
인간 군인들과 난전을 벌이고 논현동 방면으로 돌파해 골목길을 누비며 미친 듯이 주민들이 모여 있는 임시 수용시설로 돌격하는 중이다.
천지가 개벽하기 전날까지 논현역 상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차성준은 점포에 두고 온 물건들을 찾아 나오는 길에 그것들과 마주쳤다.
“케륵! 케케르!”
괴성을 지르며 30여 마리가 넘어 보이는 고블린들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와 중에 화살도 날아들었다.
평소에 운동으로 단련된 그였기에 민첩하게 몸을 날리며 내달렸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달리는 속도가 빠르다.
세상이 변하면서 자신의 신체 능력도 변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 수용시설로 바로 달리기보다는 군병력들이 집결해 있던 쪽으로 달려야 했다.
그런 판단이 선 차성준은 역삼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달려야 놈들도 운신과 선택 폭에 제한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놈들이 유인되는 것을 눈치채 돌아선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가급적 좁은 골목을 이용해 검은 연기가 보이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미친 광인들이 돌아다니며 살인을 일삼던 주택가는 이제 인적이 없었다.
조금 더 좁아지는 지형 직각으로 꺽여 있는 빌딩 사이로 들어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빌딩의 창살이 가로막고 있는 막다른 골목, 멈출 수밖에 없는 곳에서 죽음을 직감하게 된다.
“키르 키륵···”
몰려오는 놈들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 상황.
가방에 꽂아 두고 다니던 쇠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시발!”
거친 욕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자신에게 화살이 겨눠지는 것을 보며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에 이를 악물던 그 순간,
-쉐에에에에엑! 서걱-걱-걱
-투두두두두둑···
요란하고 섬뜩한 절삭음을 내며 차성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드론?
아니다, 드론처럼 보이는 커다란 프로펠러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맞다.
그것이 좁은 골목길을 빠르게 유형하며 분쇄기의 칼날처럼 회전해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갈아버렸다.
정말 끔찍한 살생의 장면인데도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 넋을 놓고 보게 될 뿐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역하게 느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30여마리 이상이 되던 고블린들이 피를 쏟아내며 허무하게 전멸했다.
그리고 차성준의 시야에 천천히 다가오는 마상의 기사,
회귀하는 회전 칼날을 가볍게 잡아 피를 털어내고 긴 창끝에 부착하는 백발의 노인이 눈에 들어 왔다.
반짝이는 사슬 갑주를 착용한 중세의 기사를 연상시키는 모습,
그가 차성준 쪽으로 다가와 멈추고 인자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괜찮나?”
그의 기이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 차성준은 그저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노기사는 뒤돌아보며 뒤따라오는 또 다른 중년의 기사에게 소리쳤다.
“방금 이것들이 마지막이라고 했나?”
“좀 전에 논현동에서 격퇴한 무리들과 저 젊은이를 쫓은 이것들이 군병력의 방어선을 빠져나왔던 마지막 고불린들입니다.”
세상은 변한 것처럼 사람들도 변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차성준이 보고 있는 이 노인은 뉴스에서도 자주 보았던 사람이었다.
‘혜성그룹 조태산 회장···’
***
시안은 균열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균열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모두 정리되고 이제 흉흉한 기운을 내 뿜는 정체 모를 녀석 하나만 남겨둔 상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군병력들은 멀리 철수시키고 대기하게 했다.
그 안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네놈, 어째서 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거지?]
흉흉한 기세를 잔뜩 풍기는 놈이 왜 적의 품고 있는지 묻고 있다.
“설마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주변에 벌어진 참상을 보라는 듯 사방을 둘러봤다.
고기가 익다 못해 타버린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주변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쯧! 그닥 맛도 없는 오크의 로드를 삼킨 이 몸의 존엄함을 무시하다니···]
혀를 차며 불만 섞인 전음과 함께 균열의 일렁임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적의를 품고 뿜어내던 흉흉한 기운도 말끔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등장한 것은···
“어?”
파드이안이 외쳤다.
[뱀색히다!]
그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거대한 머리만 불쑥 밖으로 내민 놈은 영락없는 드래곤이었다.
그 기이한 등장 때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내지르는 병사들의 탄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솔직히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존재의 갑작스러운 등장, 그렇다고 그가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다.
머리만 내밀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피더니,
[흐음··· 스쿨드는 이곳에 없었군.]
난데없이 스쿨드를 찾고 있다.
[그녀의 기운을 쫓아왔으나 그것이 네놈이 풍기는 것이었다면 그 연유는 가호였겠지.]
신화의 파편에 등장하는 스쿨드와 관련 깊은 드레곤이라면 파미리나르가 유력했다.
시공의 차원에 머물며 세상 모든 장르의 이야기를 관망하는 존재라고 했다.
노른의 가호를 지니고 있는 시안을 추적해 다급히 시공을 타고 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 누님은 요즘 좀 바빠.”
스쿨드는 요즘 훈련 교관 노릇에 재미를 붙여서 모든 학교 인원들을 노른의 공간으로 소환해 뺑뺑이 굴리며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시공의 차원에 은둔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존재가 균열의 틈새를 비집고 등장했을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더구나 스쿨드를 찾아왔다면 그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머리만 내밀었던 드래곤이 사라지고 남성으로 폴리모프 한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의 외모와 차림새,
그가 시안에게 다가섰다.
“나를 그녀에게 안내해라.”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 그의 등장으로 선명해졌다.
서울 주변에 갑자기 드러난 균열들이 예정을 벗어난 누군가의 조작으로 급조된 일임을 암묵적으로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머물던 시공의 차원에 분명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스쿨드야 당장 이곳으로 불러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동으로 가야 할 때였다.
대한민국은 하덕윤 대장이 대통령 대행의 대행의 대행의 대행이 된 시점에서 국가 시스템의 재정비가 시급했다.
JM재단의 입장에서도 그동안 준비해온 것들에 대한 실행을 빠르게 가속해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마리야, 여기 수습은 군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수동으로 갈 거야.”
“네 마스터.”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재난은 예상대로 많은 희생을 낳았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에인헤리의 각인 각성을 거쳐 보다 강해질 것이고, 다가오는 광인들과의 전쟁에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오늘 하나의 큰 고비를 넘겼다.
***
한차례 큰 전투를 치르고 서울 인근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전력이 공급되기 시작한 지하쳘 역사에 계획된 대로 인구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수도권 군부대들은 빌딩들을 중심으로 지상의 방어선을 재편하며 다가올 광인들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공포에 떨던 사람들이 전력을 공급받게 되면서 다소 안정을 되찾으며, 수용시설 공동체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바사는 발라가 한 쪽에 세워둔 사람 크기의 알 속에 머물고 있었다.
시공의 차원을 돌아 모든 전승을 되찾은 그는 세상에 다시 나설 인큐베이터인 발라의 알 속에 잠들어 숙성되는 중이다.
발라가 가져온 알은 진정한 갱생을 이루는 마지막 단계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지는 모르나 여전히 정상은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3일 앞으로 다가온 던전탑 강림과 마계차원의 개방,
어디로 떨어질지도 모를 렌덤 타임의 고비만 잘 넘기면 좋을 텐데 그건 그저 바람일 뿐이다.
게다가 그건 문제도 아닐 일이 시공 차원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균열을 관통해 시공의 차원에서 지구로 빠져나온 드래곤 파미리나르는 스쿨드를 만나자 격하게 외쳤었다.
“시공의 차원의 축이 깨져 뒤틀렸다. 미래의 타래가 뒤엉켜 버렸어. 그런 미친 짓이 누구의 짓인지도 알 길이 없다.”
때문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 짓을 한 것이 오딘도 아니라고 했다.
오딘보다 더한 미친놈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차원의 균열이 일찍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쯤 신계 아스가르드의 신성들도 술렁이고 있었다.
정말 어이없는 현상은 그런 변고 때문에 신성들의 시선이 공교롭게도 시안 자신에게로 더욱 쏠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네놈이 문제다. 분명 그 시작이 저주받은 너를 중심으로 일어났음이 분명해. 위그드라실 그 여자는 그 사실을 예지하고 네놈을 통해 간 보려 했음이 분명해.]
“거, 독서 중인데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닙니까?”
룬 법서를 산더미 같이 곁에 쌓아 놓고, 다크서클 범벅이 된 눈으로 프레이야를 노려본다.
[난 지금 네놈을 죽이려는 마음을 다지고 있는 것인데, 넌 그깟 독서가 문제더냐?]
“이제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어요. 반프레이야! 워록!”
시안이 몸 주위로 검은 자색의 기운이 휘감겼다.
그리고 어느새 커다란 블랙의 드래곤이 그의 등 뒤에 시립해 프레이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 아니··· 어떻게? 네 녀석이 나도 모르게 그걸 각인했다는 말이더냐?]
그녀가 시안에게 넘겨준 이름 ‘반프레이야’ 악마의 화신을 파미리나르를 데려오던 날 각인 했다.
그녀에게 알림이 가지 않고 연결 잠금을 말끔히 정화 시키는 장소에서···
파미리나르의 드레곤 레어는 그런 시공이었으니까.
프레이야는 이 가호 각인으로 시안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려 했었지만, 그는 그녀가 걸어둔 그 계약의 독소조항을 말끔하게 제거하고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각인해 버렸다.
“신성들이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났더만, 그러니 별 수 있나. 동급 가까이는 가야지. 안 그래요? 여신님!”
[이이이이이··· 하아···]
프레이야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들을 번갈아 내려다보던 블랙 드래곤이 재미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검은 연기를 입으로 흘려내며 트림을 했다.
“꺼억···”
이제 시안은 기본적으로 신성의 단계에 접어든 것과 다름이 없다.
그가 팔 한번 휘두르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룬의 법서들이 마치 강풍에 실린 듯 순식간에 날아와 시안의 주위로 정렬해 황금빛의 룬문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 안 된다! 이건 반칙이야! 네 이놈!]
그러나 그걸 막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잠금이 풀린 ‘반프레이야’ 각성의 초월적 힘으로 프레이야의 공간에 모든 룬 문자들은 이제 그녀와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공의 차원이 뒤틀렸고, 그걸 한 놈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안다면, 이 정도는 너그럽게 협조 좀 합시다.”
이제 그를 손쉽게 해코지할 만한 신성은 없다.
블랙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시안,
“프레이야, 당신이 말했었죠? 나란 놈은 고약한 놈이라고···”
잔뜩 화가 난 프레이야가 물었다.
[고약한 놈을 나더러 아군으로 두라는 소리더냐?]
그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이자는 죽이는 것보다 살려 두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엮었던 건데, 놈은 선을 넘는 것을 아득하게 지나쳐 선을 아예 지워버렸다.
“역시, 우린 이렇게 잘 통한다니까. 그래도 한 놈씩 덤비면 좋을 텐데, 잘해 봅시다. 프레이야.”
그의 말을 듣고 프레이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저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딘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신계를 여는 게 말이다.
그건 프레이야의 오랜 숙원이기도 했다.
“그럼 전 이만···”
“네놈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그곳에 가면···”
프레이야의 공간은 바니르의 공간이고, 그것은 마계와도 통하는 미지의 세상이다.
저 너머에서 마왕의 기운이 느껴졌다.
“당신이 준비해 두었지만 차마 가보지 않은 곳, 나는 그놈의 낯짝이라도 미리 보고 와야겠어요. 걱정말아요. 무리는 안 할 테니까.”
혹시나 그곳이라면 던전탑이 강림할 위치 정도는 미리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가자! 바닐파파 그대의 고향으로.”
-고오오오오오···
은은한 피어와 함께 시안을 태운 블랙드래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그를 너무 미워 마세요.”
요안나였다.
자신이 최애하는 화신,
프레이야는 시안이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입을 열었다.
“넌 그걸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어떤···”
미동도 없이 조용히 혼잣말하듯 말했다.
“저자는 미워해도 소용이 없다. 태고의 전승을 가진 자, 아스가르드의 신성들은 가지지 못한, 가질 수도 없는 시공 속에 전승을 말이지···”
일찌감치 꼬여버린 신들의 전쟁 라그나로크가 마침내 서막을 열었다.
그에 맞서 세상을 구원할 대적자의 등장을 알리려는 듯,
시안이 날아간 바니르의 공간 저편에 검붉은 달이 떠오른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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