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시안의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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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외곽 한적한 곳에 자리한 작지 않은 성채,
가장 높은 청탑의 먼지 쌓인 다락방에는 자신의 기척을 감추고 숨을 죽인 채 아래층 회랑 가운데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원탁을 주시하는 사내가 있다.
JM과 연락을 끊고 자신의 에이전트 라인만을 은밀히 가동해 의문의 인물 구스타브 폰 페르센이 출현한다는 장소에 잠입해 있는 자쟈였다.
그자의 행적이 신출귀몰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도 인간일 뿐이다.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자쟈는 지금까지 은밀하게 그의 뒤를 밟아왔다.
22세 젊은 나이의 청년을 추적해온 이유는 그동안 행적을 드러내지 않아 주체가 모호했던 의문의 테러 사건들이 대부분 그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시 못 할 만큼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 자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의 원수인 자들을 남김없이 처리해버린 이유도 궁금했다.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이던 무기상 거대 카르텔이 한순간에 와해 된 사건이다.
JM조차도 7년을 준비하고 이제야 실행하려던 일이기도 했었다.
죽임을 당한 자들 면면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두드러진 인사들이었다는 것과 아직도 그 일을 벌인 실체가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걸 실행한 조직의 기민성과 일사불란함도 남다르다고 판단해야 했다.
그 조직의 규모가 조민시안의 JM의 수준이라는 전제를 기본 베이스로 예상해야 하는 이유였다.
-쿠웅!
회랑을 울리며 커다란 문이 열렸다.
“Aufstehen(기립)!”
원탁을 중심으로 앉아 있던 사람들이 독일어 구령 하나에 맞춰 일제히 일어섰다.
그 모습이 마치 국가 원수가 들어설 때의 장면을 방불케 했다.
원탁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젊은 사내,
처음에 내딛던 발걸음보다 원탁에 가까워 질 수록 점차 느려지더니,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 자쟈가 있는 천장 다락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쟈는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음을 알았다.
‘어라?’
그와 동시였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던 거 말이다.
[뭐가 ‘어라’냐 멍청아, 빨리 튀어야지!]
바로 옆에서 외치는 듯했던 음성은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마치 묵직한 옷이 입혀진 것과 같은 우악스러운 기운이 자쟈의 온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이 미끄러지듯 조용히 벽면으로 액체처럼 스며들며 숨겨졌다.
뿐만 아니라 그 찰나의 순간에 그가 있던 자리에 남겨졌던 흔적이 감춰지기까지 했다.
그에 놀랄 새도 없이 다음 순간,
아래 회량에 있어야 할 구스타브 폰 페르센이 어느새 다락방에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짧은 전음이 머리를 때렸다.
[쉿!]
소리 내지 말라는 의미라기 보다 움직이지 말하는 전음,
그제야 자쟈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 페르센의 눈에는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지만, 별일을 다 겪네···’
시안이 들려준 이야기를 상기하며,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프레이르?’
그러나 대꾸는 없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다락방 주위를 살피던 페르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아래 회량으로 뛰어내렸다.
[그분은 네놈 친구가 아니다.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자쟈도 알고는 있었다.
신성이라는 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텔레파시와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을,
‘그럼 너 누군데?’
[·········]
자쟈의 어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지?’
한 차례 더 묻고 나서야 대답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조용히 해라. 지금 널 죽일지 말지 고민 중이니까.]
무척 까칠한 신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방금 살려 놓고 죽이는 걸 고민하다고?’
[그러니까 닥치라고 새꺄! 짜증 나게 상황판단 안되면 반말은 까지 말고.]
이런 식이면 자쟈도 그냥 있지를 못한다.
‘그래, 그럼 죽기 전에 네놈 이름이나 알고 죽자.’
[니 애비다 새끼야. 지금 이곳을 벗어날 거니까. 옥수수 털리기 싫으면 어금니나 꽉 물어.]
‘응?’
그런 막말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이 새끼 한국인 인가?
순간 사방이 어두워지며 마치 돌풍 안에 자신의 육신이 놓인 것처럼 너덜거리고 휘청거렸다.
몸이 바람에 날리듯 부유하는 느낌이 점차 가라앉자,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성자들의 동상이 보이고 곳곳에는 누군가를 추모하는 촛불과 꽃들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혼란한 현재 시국의 불안을 떨치고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한창 기도회를 열고 있던 스위스 베른 대성당 앞 광장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듣거라. 나는 스키르니르, 너의 스승으로 명 받은 자이고 인도자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놈의 신형이 성당의 기둥을 뚫고 나와 눈앞에 섰다.
큰 키에 백옥같은 피부, 그리고 뾰족한 귀,
그건 누가 봐도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엘프였다.
[그곳에서 네가 감시하던 놈은 신성의 신탁으로 각성한 화신이다, 놈이 붙잡혔다면, 모르긴 해도 지금쯤 잿가루가 되어 있었겠지.]
신탁이라고 했다.
그건 유럽으로 오기 전 시안이 자신에게 다짐받던 몇 가지 항목 가운데 하나였다.
조민시안이 그에게 말했었다.
[“네가 아무리 강해지고 싶더라도 신성들이 달달하게 유혹해 오는 신탁은 절대로 피해야 해.”]
[“왜지?”]
[“신탁이라는 단어 뜻 몰라? 신이 ‘가서 죽어라.’하면 아무 생각 없이 불구덩이로 달려가 죽어야 하는 게 신탁이니까.”]
[“아··· 광신도가 되는 거네.”]
광신도,
그들은 일반 각성자보다 상상 이상의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했다.
신성에 준하는 권능,
시안의 당부를 상기한 자쟈는 눈앞에 엘프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엘프는 자쟈에게 더욱 다가서며 말했다.
[네놈은 조금 전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해 주었다. 그 위기에서 구해준 건 나고 말이다. 그런데 왜 눈을 그렇게 뜨지?]
자쟈는 대답 없이 이 엘프가 뭐라고 떠들어댈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스키르니르도 그런 자쟈가 답답했는지 뒷짐을 지고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아까 프레이르라고 물었느냐?]
자쟈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분은 너의 주인일진데, 네 놈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님을 지금부터라도 명심 하···]
‘지랄···’
[뭐? 방금 뭐라고 했지?]
‘지랄 말라고 했고, 분명히 말하지만, 날 종 부리듯 해야 할 자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가서 그자를 먼저 죽이고 오면 한번쯤 생각은 해볼지도 모르지. 그 전이면 그런 개소리는 사절하겠다.’
시안이 당부한 두 번째 조항,
<신성이라면 모를까 그 따까리한테까지 자세를 낮추지 말라.>
그는 그 조항을 충실히 따를 뿐이다.
자쟈가 말한 그자가 누군지는 스키르니르도 잘 알고 있다.
세계수와 프레이야, 그리고 노른의 화신인 그 새끼···
눈앞에 놈을 프레이르가 화신으로 지목한 이유도 그놈 때문이다.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여전히 자신을 하대하듯 말을 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불같은 갈등이 일었다.
그냥 죽일까?
***
예고된 날의 하루 전이다.
지금 미국의 항공모함 함대 세 개가 제주도 남쪽 연안부터 오키나와 서쪽 연안으로 이어진 동중국해에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하나는 동해, 다른 하나는 필리핀 해협 서쪽에 대기하고 있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때에 세계는 어디에서 전쟁이 발발할지에 관심을 집중했다.
가장 유력하게는 대만 침공이었지만, 어떤 미디어는 한반도 북쪽이라고 했고, 어떤 곳은 중국 서쪽 인도 국경 지역이라고도 했다.
혼란 속에 세계의 모든 정보망들이 마비 상태가 된 상황에 북한의 내부 사정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했지만, 북한의 지도부는 현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중국의 5개 집단군 30만과 예비병력 40만이 압록강 국경으로 대거 이동한 정황이 발표되었다.
산동반도에 26집단군과 해병대가 상륙작전에 돌입했다는 발표가 뒤를 이었다.
한국에 비상계엄령이 발동하고 미국의 항모전단은 서진을 시작하는 상황이다.
미국은 선제타격이 아닌 선방어 후 타격으로 작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그 상황에 인도가 중국의 국경 분쟁지역이던 악사이친에 폭격을 가하며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타전된다.
인도의 일방적인 밀약 파기로 중국은 당황하게 된다.
한반도를 공략하기 전에 맺었던 인도와의 협약이 깨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인도 동북 영토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앞으로도 관여치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남티베트를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주의 일부로 인정함과 동시에 실효 지배의 권한이 인도에 있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중국이 자신들의 관할령으로 주장해왔던 히말라야 악사이친에서 군사를 200마일 뒤로 물린다는 이면 밀약이 내포된 협정이었다.
물론 물밑으로 금전적 보상은 기본이었다.
그것으로 인도가 당분간은 중국을 향해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인도로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 동맹 쿼드 가입 국가였지만, 얻는 게 없는 전쟁에 맞장구치듯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세계 에너지 시장을 놓고 미국을 압박하던 러시아는 우호적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도 호의적이었다.
중국은 그런 외교 상황을 활용하려 했다.
인도와의 영토 분쟁에서 한발 물러서며 러시아의 우호를 끌어들이고 국경분쟁의 완화하는 협약으로 자국이 한반도를 침공하는 동안 한쪽 국경의 안정과 시간을 벌겠다는 포석은 정말 주효하는 듯했다.
북한의 정치적 불안을 명분으로 압록강을 넘어 적어도 대동강 북부에서 동해안 원산항까지 점령하는 것으로 종전을 선언할 계획은 순조로운 듯했다.
이제 공격 개시 명령만이 남은 상황,
그러나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인도가 먼저 중국 국경을 넘어 뒤통수를 쳐왔다.
미국의 작전 계획이 갑자기 변한 변수를 예측하지 못한 결과다.
무엇보다도 인도는 중국 공산당을 믿지 않았다.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중국은 그런 세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작전 계획이 인도를 움직이게 했다.
미국과 서방은 이번 전쟁이 한반도와 대만을 지키기 위한 소극적인 전쟁이 아닌, 중국 본토를 치고 해체 시키기 위한 전쟁임을 인도 측에 분명하게 전했다.
만에 하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될 경우, 인도에게 떨어질 콩고물이 작지 않았다.
때문에 인도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또한 미국 정부가 인도에 주지 않는 당근 정도는 그 정권을 만드는 음지의 세력이 인도에게 주면 된다.
인도는 금융 치료가 절실했고 더 나아가 식량도 필요했다.
전쟁에 필요한 재화들이 인도 손에 들어가는 것에 경로는 중요치 않았다.
기이현상과 미친놈들의 발호로 야기된 사회적 대 혼란을 맞아 세계 각국들은 이미 비상상태를 공표하고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극복하고자 했다.
인도의 중국 침공 소식을 뉴스로 들으며 사람들은 생각했다.
혹시나 중국이 인도를 향해 핵카드를 꺼낸다면?
만일 정말 그런 성명을 발표한다고 하더라도 내일 1차 차원의 문이 열리면 그건 개소리가 될 뿐이다.
모든 전장의 무기들은 고철이 될 테니까.
시안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정수기 물을 컵에 따르며 레이먼드를 불렀다.
“레이먼드. 지금 한반도 연안에 배치된 항공모함 함대 사령관들하고 함장들 인적 사항 확보···”
지시를 내리던 시안이 레이먼드에게로 몸을 돌리는 순간,
알루미늄 호일을 자신의 몸체에 꼼꼼하게 두르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 벌거숭이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너 지금 뭐 하냐?”
“내일 전자기펄스가 심각하다고 들어서···”
안드로이드의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레이먼드는 가끔 저렇게 단순한 바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시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몬, 그만둬. 넌 내일 지하실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니까.”
“아···”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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