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디의 개입(내용 추가 수정)
“울르,”
스카디가 북쪽 영토 위달리르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그녀는 울르가 원하던 이름을 빌려주는 주었다.
그건 그 또한 스카디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성립된 거래였다.
그후 기다리던 소식은 없었고 지금 그는 행방마저 묘연하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텐가 울르···’
울르는 에시르의 신족이다.
룬마법과 몸을 쓰는 전투에 익숙한 에시르는 주술을 거슬려
하고 태생적으로 저항력이 취약했다.
울르는 세계수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스카디에게 전하며, 자신 또한 위그드라실의 화신을 감찰하기 위해 그자의 측근으로 보이는 인간들 중 최상의 대상에게 가호를 예비해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오딘이었다.
그가 심어 놓고 방치한 씨앗이 심상치가 않았다고 한다.
씨앗 자체로도 위험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품고 싹을 틔우고 있는 인간이 세계수 화신의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오딘은 에시르 신족이면서도 바니르의 독창적인 룬마법과 주술에도 능한 신성이었기에 에시르 신족 중, 그를 도모하고 넘볼 신은 없었다.
그런 그가 인간 아이에게 심어 놓은 씨앗이 다름아닌 바나르 신족의 룬과 주술에 관련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울르는 결국 스카디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가 거래로 원한 것은 ‘베르그 뷔(암석 거주자)’,
베르그 뷔는 주술에 관련된 저항속성과 투창의 위력과 날카로움에 버프를 더해주는 주술의 가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스카디는 그와 거래를 수용했다.
그녀는 울르의 화신이 될 자에게 베르그 뷔의 권능을 공유해 주는 대신, 그 대가로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화신인 자와 접점이 되는 사건에 자신을 소환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부부인 두 신성의 관계는 그런 게 가능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얼마 전 세계수의 화신에게 프레이야가 다녀간 사실을 알았다.
전 남편 뇨르드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권능으로 따지자면 프레이야가 주도권을 쥔 아스가르드에서는 스카디가 밀릴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건 에시르 신족 영토인 아스가르드에서의 이야기일 뿐, 바니르신족 영역에서의 전승으로 놓고 본다면 그녀도 프레이야에게 꿇릴 것은 없다.
설국으로 불리는 트림하임은 아스가르드와 나뉘어 독립적인 신성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니르 신족의 주신이었던 그녀의 아버지 티야치는 서리거인족을 이끌던 종족의 우두머리 신성이었다.
때문에 스카디도 바니르신족이었지만, 그녀는 그들의 음흉한 속성을 싫어했다.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바나가스에 있는 동안 홀로 트림하임 설산에 머물며 요툰 거인들과 사냥을 즐기는 일상을 보냈다.
바나가스에 변고가 생기면서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버지 티야치가 바니르신족과 교류를 단절하고 중립에 서며 바나가스 영토를 떠나 트림하임으로 돌아오게 된다.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뇨르드도 에시르신족에게 볼모의 신분으로 넘겨져 아스가르드에 가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프레이야는 그때 아버지 뇨르드를 따라 아스가르드에 입성하게 된다.
그런 프레이야와는 대조적으로 스카디는 에시르 신족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그게 다 몹쓸 놈의 납치 혼 때문이었다.
아버지 티야치는 바니르 신족인 이둔을 납치해 결혼을 강요하는 일을 저질렀다.
젊음의 황금사과를 재배하던 청춘의 신 이둔이 없이는 젊음을 유지할 수 없었던 에시르 신성들은 결국 로키를 필두로 몰려와 티야치를 죽이고 이둔을 구하게 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스가르드에 갔던 스카디는 오딘의 둘째 아들이자 빛의 신으로 불리는 발드르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다.
비록 로키의 잔꾀에 말려서 발드르가 아닌 뇨르드와 결혼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지만, 지금도 그녀는 발드르를 흠모하고 있다.
그녀가 합방을 거절하며 뇨르드를 걷어 차버린 채 설산으로 돌아왔을 때, 이웃한 위달리르의 주신인 울르가 그녀에게 정략적 결혼을 타진해 왔다.
바니르가 마족과 신족으로 나뉘면서 인접한 위달리르 골짜기의 상황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었다.
원래 트림하임의 일부였던 위달리르는 전쟁 때 에시르 신족에게 빼앗긴 영토였다.
에시르의 오딘은 그 영토에 거주하는 요툰거인들을 회유하고 토르의 의붓아들인 울드에게 관리를 맡기면서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의 청을 듣고 시큰둥했지만, 점차 세를 넓혀오던 바니르의 마족을 생각하면 그럴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바니르의 신족은 원래 음흉한 족속들인데 그보다 더 음산한 바니르 마족은 신계의 대부분이 적으로 규정할 정도로 극악무도했기 때문이다.
무력의 신이고 전투의 신이라 불리는 울르를 가까이 두어서 나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신성 간의 교섭 능력도 뛰어난 신이었다.
때문에 스카디는 그와의 결연을 체결하고 대외적으로는 결혼 관계임을 공표한 상태였다.
일종에 동침 없는 부부관계를 의미했다.
신성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거래와도 같은 결합일 뿐이다.
서리거인종족과 요툰거인 종족들에게는 전쟁의 여신으로 불리고 있는 스카디가 프레이야에게 꿇리는 건 병력의 열세였다.
프레이야가 거느린 발키리들이 다 합세해도 그녀의 상대는 못 된다.
그러나 수만에 이르는 폴크방 영웅 전사군단 에인헤랴르까지라면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이 지금 그녀와 프레이야의 차이였다.
마족이라는 신족들은 바니르 대부분을 잠식한 상태였다.
마족의 우두머리는 아직 정체도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것들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는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이제 전장은 인간 세상 미드가르드가 될 것이다.
한가롭게 사냥이나 즐길 때가 아님을 의미한다.
지금은 힘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강력한 화신을 키워야 했다.
‘결국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 건가···’
그런 상념에 젖어 있던 그때,
마침 기다리던 울르의 강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그 끌림을 따라 그녀의 시선이 미드가르드 한 곳으로 향했다.
‘역시 그대는 신의가 있는 자였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내가 먼저 선점해야 한다. 지금 당장···’
다음 순간 스카디의 신형이 사라졌다.
***
요안나는 이 새벽 잠에서 깨어야 했다.
꿈꾸듯 몽롱한 가운데 자신의 침실을 침범한 빛나는 남자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두려워 마라 인간의 아이야. 나는 울르라고 한다.]
‘울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무엇 때문인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입도 뗄 수 없는 압박감,
‘웬 놈이지? 나를 죽이러 온 건가?’
[하하하··· 널 죽이다니, 내가 왜 그런 쓸모없는 짓을 할까?]
생각만 했을 뿐인데 텔레파시처럼 놈에게 읽혔다.
이건 분명 꿈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요안나는 놈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넌 뭐 하는 놈이냐고 묻잖아.’
[웬 놈이, 그런 뜻이었군. 너의 그 볼품 없는 머리통 속에 신성에 대한 예절이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너 따위에게 놈으로 불릴 존재가 아닌 건 분명해. 그리고 난 울르라고 고귀한 이름을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그래 울르, 네 놈이 무슨 일로 나에게 이따위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설명해 주겠어?’
[그년 참 말버릇 하곤··· 그건 수작이 아니라 신성 강림이라는 권능의 사소한 배려라는 거다. 네년도 주위가 시끄러워지고 그 때문에 불필요한 피를 보면 곤란할 테니까.]
‘지금도 나를 년이라 부르는데 나라고 너를 놈으로 부르지 않을 이유라도 있어? 제대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이곳을 침입한 네놈부터 예의를 가지라는 말이야.’
울르가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처럼 툭 뱉었다.
[이거 참 귀찮군··· 죽일까?]
골똘히 고민에 빠진 그의 전신에는 여전히 빛이 흘러나왔다.
저게 무슨 장난질인지는 모르지만, 보통 침입자라면 저렇게 요란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요안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물었다.
‘나의 몸을 이렇게 구속한 당신이 잘한 건 아니니까 욕을 먹은 거고, 좋아 나도 귀찮은 일은 싫으니까. 지금부터 그 이름으로 불러 주지, 그 대신 나를 자유롭게 해줘.’
[흠···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안 됐지만, 널 죽여 신의 권위와 명예를 찾아야겠다. 네년의 그 버릇 없는 영혼은 내가 잘 거두어 주마.]
울르의 손이 요안나를 향해 뻗어지려는 그때,
-우웅···
-탁!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난 신형이 그의 손을 야물딱지게 쳐내며 에코 잔뜩 먹은 음성이 울렸다.
[울르, 연약한 것에게 손속을 보이려고 하다니···나와의 거래를 하찮게 여김인가?]
[오오 스카디, 그대가 올 때까지 교육 좀 시키려던 참이었다. 이곳 미드가르드 인간들의 머릿속에는 우리 신성들에 대한 신앙심이 존재하지 않거든.]
울르의 너스레를 들으면서 흐릿했던 신형을 드러낸 모습은 역시 빛을 발하며 화려한 무장을 한 여성이었다.
[그래도 신의는 저버리지 않았군. 그대와의 거래는 이것으로 종결된 것으로 하겠다. 나머지는 내가 마무리할 테니 그대는 이제 돌아가도 좋다.]
그녀의 말을 듣고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보이는 울르는 과연 그래도 될까? 하는 표정으로 스카디를 바라만 봤다.
그런 울르에게 스카디가 물었다.
[뭐가 또 있기라도 한 것인가?]
울르가 팔짱을 끼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건··· 내가 왜 체면 구기는 걸 무릅쓰고 신성으로서 이곳에 직접 난입해가며 하찮은 인간 아이 따위와 말장난이나 하고 있었는지 생각을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필요한 것에게는 항상 수요가 따르는 법이니까. 그건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문제야.]
[그게 무슨 말이지? 그렇다면 나 말고 또 다른 자가···]
그때 빛무리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며 여인의 음성이 울렸다.
[오랜만이군요. 스카디,]
[프레이야?]
24명의 발키리들을 대동하고 프레이야가 등장했다.
요안나의 침실이 넓어서 망정이지 일반 아파트 침실이었으면 나올 그림이 아니었다.
프레이야 무리의 등장과 동시에 요안나의 속박된 몸도 풀려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서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여러분들 지금 내 침실에서 뭐 하시는 거죠?"
볼에 느껴지는 통증에도 꿈이기를 바라며 자세를 바로 잡고 말을 이었다.
"여기 당신들 번개 모임 장소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자 동시에 에코 가득한 음성이 서라운드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닥쳐라!!! 버릇없는 꼬맹이!!!]]]
역시 어른들 대화 중에는 끼는 게 아니다.
***
자쟈는 시안의 뒤를 따라 리조트 산책로를 걷는 중이다.
“전용기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가 리조트 내의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쟈가 연못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호 이거 혹시 물이 갈라지며 비행기가 위로 올라오는 뭐 그런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정의 자쟈를 바라보며 시안이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땅이 갈라지며 활주로도 올라올 건 생각 안 해 봤냐?”
“그럼 해봐 그런 게 가능···”
말을 멈춘 자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샨, 한국은 방공망이 살벌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도 미리 허가 받은 거 맞아? 이륙하자마자 뭐가 날라와 툭! 건드리면 나라고 해도 그건 못살아.”
그제야 시안이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자쟈, 장난은 이쯤 하고, 우리는 지금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으로 갈 거야. 너 준비는 된 거지?”
“그래 나야 언제나 가능하다니까. 도착지가 모나코 니스 공항인가?”
“정확히 말하면 그 근처야. 전에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자쟈가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세상이 뒤집어지고 다른 세상이 된다는데 잊을 수가 없지.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야 아주 고마울 따름 아닐까?”
생존을 위해 살육을 해야 하는 세상,
모르긴 해도 자쟈라면 물 만나 고기가 따로 없을 것이다.
시안이 팔을 살짝 앞으로 뻗어 주문을 걸듯 낮게 외쳤다.
“비파 빌 르 라 시···”
다음 순간,
주변에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하얗게 빛나는 황금의 글자들이 길게 늘어져 공간에 새겨졌다.
연못이 갈라지는 걸 기다렸던 자쟈는 그런 이상 현상에 별 반응도 없이 덤덤히 바라볼 뿐이다.
“증강현실 구현 이펙트까지 요란은 하지만 대단하다.”
그러나 자쟈의 말처럼 연못은 갈라지지 않았다.
그 대신 눈앞에 공간이 찢어지며 검은 자색의 너울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불길한 공동이 열렸다.
그리고 해맑은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어디로 갈 거야 마스터.]
“어?”
놀란 자쟈를 돌아보던 시안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시빌, 샨의 해변으로 갈 거야. 연결해.”
[오케이! 연결 완료. 오호 여기는 쾌청이야. 드루와 마스터,]
시안이 얼이 빠져 있는 자쟈의 등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신세계는 이런 거라니까. 그만 정신 차리고 이제 가자.”
고개를 한차례 흔든 자쟈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지옥문은 아니겠지?”
시안이 먼저 공동안으로 걸음을 옮겨 들어서며
“미친놈아. 그냥 따라와.”
시안의 모습이 사라지고 자색 빛의 흉흉한 공동만 바라보는 자쟈에게 이번에는 시빌이 나서서 외친다.
[야! 너 뭐해. 이거 문 닫히면 하루 동안 못 연단 말이야. 이놈의 동네는 아직 마력도 넉넉하지 않고만, 이 자식 빨랑 안 뛰어!]
“어? 어어···”
그제야 자쟈가 몸을 움직여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저기 샨? 거기 있니? 샨?”
자쟈의 몸이 공동안으로 들어가자 공동도 사라졌다.
그들이 머물던 연못가에는 잔잔한 바람이 일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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