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
알프하임은 요정들의 세상이다.
여느 신들과는 다르게 이곳에 상주하는 신성이 있었다.
그 금발의 신성이 알프하임 정원을 가꾸며 입을 열었다,
“자네 피붙이인 발키리까지는 내가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거론하지는 않겠다.”
몸을 일으켜 엘프족으로 보이는 사내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내 동생 프레이야마저 나를 따돌린 거까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자네까지 내게 실망을 준거라면, 나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는 없지 않겠나?”
그는 여신 프레이야의 오빠인 프레이르였다.
그리고 그에게 면박을 받고 있는 건, 그의 시종장이자 옐프 종족의 왕자인 스키르니르, 사적으로는 프레이드와 둘도 없는 절친 관계다.
“내 피붙이 발키리 이야기는 이제 그만 듣고 싶군. 위그드라실님도 묵인한 일이니까. 그리고 지금 전개되고 있는 신성들의 선제 난입은 누구라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오딘이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오딘도 감당 못 할 만큼 커버린 자네의 동생은 어떻고···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건 자네가 내게 실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말일세.”
“내가 직접 갔다해도 해결되긴 힘들었어. 프레이야가 먼저 선수를 쳐 버렸으니 말이야.”
“그래서 차선을 이야기해준 것뿐이고 지금도 난 그놈을 회신으로 삼는 것이 최선이라고 확신을 하네.”
“오딘이고 프레이야고 위그드라실이고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아직도 모르겠으니까 답답해서 하는 소리야. 위그드라실의 권속인 자네가 그녀의 선제적 행보를 귀뜸이라도 해주지 않는 것에 더욱 실망하는 것일세. 정말 몰랐나?”
“그 뿌리 깊은 속을 낸들 알겠나? 그래서 그녀의 줄기가 간 곳으로 전령을 보내 자네의 화신이 될 인간부터 챙기라고 조언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위그드라실님의 노여움을 살만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스키르니르의 변명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건 엘프종족인 그의 정체성에 문제였음을 안다.
엘프들은 세계수의 가호 아래 생명력을 이어가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군.”
사실 프레이르가 지목한 인간은 따로 있었다.
‘조민시안···’
그러나 그놈에게는 가호를 내릴 수가 없었다.
바니르신족으로 동생인 프레이야의 가호가 자신의 것과 중첩되어 버린 탓이었다.
결국 스키르니르를 직접 보내 그놈의 곁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 중 자신이 굴린만 한 자를 선택할 자율권을 그에게 부여했었다.
“자쟈 칼리제라고 했던 그놈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스키르니르에게 멈췄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아는 스키르니르는 질색을 하면서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아서게, 그놈이 나와 닮았다는 말은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네에게 충분히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놈은 미드가르드에서 손에 꼽이는 강자임은 틀림없단 말이네.”
“그건 자네의 감을 믿어보기로 하지.”
좀처럼 의심을 풀지 않는 프레이르에게 스키르니르가 다가서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그놈을 죽이고 자네의 이름을 다시 회수해오면 되겠나? 그래야 내가 그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믿어 줄 건가?”
그의 말에 프레이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그놈의 자질은 월등하다고 했지?”
스키르니르가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을 만큼 타고났더군.”
“그렇다면 죽이는 건 오딘이나 프레이야 좋아할 짓일 뿐 아닌가.”
그건 그랬다.
그를 죽이면 사방에 깔린 발키리들이 낼름 받아 발할라나 폴크방으로 끌고 가 에인헤리로 앉힐 게 뻔했다.
쉽게 말해 천국의 전사가 되어 오딘과 프레이야의 군세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이야.”
“그러면···”
프레이르가 손을 들어 스키르니르의 말을 끊었다.
조금 더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을 자네가 직접 훈련 시키게. 그리고 가능성을 더 가늠해 봤으면 해. 반쯤 죽여서라도 말이야.”
프레이드의 말에 귀찮은 일이 생겨 버린 스키르니르는 미간을 좁혔지만, 그의 요구는 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지··· 놈이 나의 수련법을 견디지 못해 죽어버리는 것까지는 책임질 수가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겠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놈의 영혼까지 지워 버리게. 발키리들도 손을 쓸 수 없도록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스키르나르를 주시하며 덧붙여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놈 진짜 자네 사생아 아닌 거 맞나?”
스키르니르가 눈을 한차례 질끈 감았다 뜨면 부인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믿겠나. 진짜 난 아니라고!”
그런데도 프레이르는 그 말을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아무리 봐도 자네와 너무 닮은 놈이라는 게 영 찝찝해서 말이야.”
“할 말은 그게 단가?”
“충분하지 않은 듯하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하지.”
“그럼 난 가 보겠네.”
돌아선 스키르니르가 몇 걸음 물러서서 다시 프레이르를 돌아봤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갖췄다.
“신성의 명을 받아 갑니다. 이행하겠나이다.”
그의 예를 받은 프레이르도 정중히 손을 들어 말했다.
“소임을 다하라.”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인 스키르니르의 신형이 한 마리 매가 되어 창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프레이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무 닮았던데···”
***
호텔에서 나와 지금은 한국의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오전 9시 20분,
이 나라에 들어와 처음 보는 아침 하늘에 태양도 새롭게 보였다.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햇살은 처음이었으니까.
‘파란색? 아니 보랏빛인가···’
저런 태양의 빛깔은 정말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특이한 현상을 보던 와중에도 이 나라의 수도권의 강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끼며 차창 밖을 바라봤다.
존 해일은 한국을 처음 방문했지만 낯선 듯 아닌 듯 정감이 가는 중이었다.
베일 속에 모습을 감추고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초거대 카르텔의 숨은 설계사를 만나러 가면서도 그가 왜 이 극동의 작은 나라에 있는지 생뚱맞을 뿐이다.
차라리 히말라야나 알래스카라면 이해가 갔을까.
그렇게 한참 동안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존 해일이 도심을 지나 전원의 풍경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옆자리의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스텔라, 이 나라에서 얼마간 살았었다고 했나?”
그처럼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스텔라 바티스타가 존 헤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랬었죠. 애송이 때 교환학생으로 1년 정도 머물렀어요. 전 지금도 K pop을 즐겨들어요. 이 나라가 궁금하신 건가요?”
남미 출신인 그녀는 더블에이취의 정보와 재정 담당 사무장으로 이사급이다.
아르헨티나 정보사무국 블랙요원 출신인 그녀가 아프리카 마약 밀매 경로추적 임무를 맡아 서아프리카 지역에 파견 나와 머물던 2015년 초,
아르헨티나 정치인들을 수사하던 검사 하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치적 이유로 국가정보사무국이 그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되고, 그걸 빌미 삼은 정부가 연방정보국으로 명칭을 바꿔 새롭게 신설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런 정치적 스캔들의 여파로 정보국 내 그녀의 상부라인이 남김없이 갈려 나가면서 기관과 연락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연방정보국의 서류상에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되어 미아처럼 나이지리아에 주저앉게 된 그녀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정보를 취급하는 정보 에이전트와 범죄 해결 픽서로 2년간을 활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수단 범죄조직을 조사하는 의뢰를 수행하던 중,
존 해일이 이끄는 더블에이취 전초팀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 일해온 터였다.
해일이 그녀에게 한국에 거주했던 경력을 물었던 것은 이 나라 자체가 궁금해서가 아닐 것이다.
만나야 하는 대상이 무슨 꿍꿍인지가 궁금할 뿐일 테니까.
이 나라에 와 있는 헬덤 크래커의 행적에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스텔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나라는 생각보다 엄청 복잡한 나라예요. 70년 전, 전쟁으로 지금의 아프리카 부룬디보다도 더 황폐화되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나라라는 소리를 듣던 최극빈국이었죠.”
그녀의 얘기가 시작되자, 해일이 고개를 기울여 귀에 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뭐, 지금은 차창으로 보시는 대로 학자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나라랍니다. 사람들은 몹시 솔직하고 거슬릴 정도로 직설적인 성격으로 호전적이면서도 성실해서 부지런하죠.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으며, 중국과 일본에게 2,000번이 넘는 침략을 받고도 견딘 나라라서 위기에는 단결이 잘되고, 몹시 전투적이기도 하고요. 머리가 좋기로는 세계 최상위를 다투죠.”
스텔라가 말을 잠시 멈추고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이 집중적으로 연구 대상으로 삼는 민족이 이곳 사람들입니다.”
그쯤에서 해일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시 헬덤 크래커가 유대인일 가능성도 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 안 해본 건 아닙니다. 그가 도움을 주고 있는 카르텔의 근본이 금융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니까요.”
대화가 그 정도로 진행될 때쯤,
그들이 탄 차량은 산림이 울창한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면 목적지에 도착한답니다. 대장.”
고개를 끄덕인 존 헤일이 정면을 바라봤다.
조금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을 같았던 산속에 대저택이 드러났다.
멀리서 철문이 열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잠시 후, 정문을 통과한 차량이 속도를 줄이고 작은 길을 가로지르는 곳곳에 다양한 국적의 경호원들이 배치된 것이 눈에 띄었다.
마침내 차량이 멈췄다.
오전 9시 50분,
현관에 나와 있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 차량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저는 엘레나 브라바츠키입니다. 이리로···”
환영의 인사치고는 간단한 멘트.
고개 살짝 끄덕인 인사로 답한 세 명이 그녀를 따라 현관에 들어섰다.
요안나의 접견실을 연상할 만큼 넓은 중앙 홀은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탁과 의자들만 빼고 난 뒤의 연회장 같은 모습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현관 맞은편에는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들이 놓여 있는 무대가 보였다.
“2층입니다.”
그들이 벽면의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대부분 유리로 꾸며진 테라스 공간이었다.
그 중앙에 가면을 쓴 두 남자와 여자 하나가 티 테이블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동양인으로 판단할 만한 칠흑 같은 검은 머릿결을 가진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갈색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남자.
“흐음···”
정 중앙에 위치한 남자에게서 묘한 기감을 느끼며 존 해일의 몸이 반응했다.
그의 멈칫하는 모습에 남자가 서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존 해일 단장님,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헬덤 크래커입니다.”
검은 머리에 검붉은 눈동자의 남자였다.
‘동양인?’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상대가 가면을 썼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해일은 손은 맞잡지 않은 채 인사를 받았다.
“존 해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가면이 마음에 걸리셨군요. 오늘 상담이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로 성사된다면 그때는 기꺼이 벗을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점, 양해를 구하고 싶군요. 그럼 이리로 앉으시죠.”
내밀었던 손을 멋쩍게 거두며 이해한다는 듯 가면 뒤에 미소 짓고 있는 눈앞의 남자가 예상밖에 젊은 청년이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런 건 존 해일이 방금 느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건 그의 아우라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괴물들 중에 누구라도 그 방면으로 이 남자를 능가할 자는 없었다.
해일은 첫눈에 알았다.
‘이 자와 적이 되는 건 정말 위험하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