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거 온다
생존을 위한 전쟁 속에 하나의 장기 말로 살아왔다.
포성이 울리는 전장이 존재해야만 전쟁이 아니다.
거대한 카르텔에서 그 덩치를 유지하자면 변수로 발생한 작은 균열이라도 공포로 채워야 조직의 평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
시안은 그런 세상에 장기말과 다름 아니었다.
그를 죽이려는 시도가 지금도 끝없이 이어지는 이유였다.
부모님들이 알베로 아저씨를 구한 순간부터다.
자신들의 조직에 영향을 미친 존재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 응징한다는 각인을 위한 희생양.
홍콩의 배우 위수룡과 그의 아들 사고가 그것이고,
미국의 캐나디 가문이 그랬다.
때문에 시안이 살아온 인생이 숨죽인 듯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나대다가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를 운명이었으니까.
그러나 클배로가 끝나던 날,
시안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에게 과거와는 다른 생기를 부여했다.
이제 그런 개 같은 굴레를 벗을 때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시안은 자신을 몸 하나 지키기 위해 격투술을 배우던 생활 체육인이 아니다.
당분간은 강당에서 생활해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안은 계획했던 것들을 정리했다.
저 아이들을 데려온 것에 대한 후폭풍,
멀지 않은 날에 아마도 이곳에 일이 닥칠 것이다.
그건 막연한 예상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닥치게 될 일.
오늘 아침 미국 JM재단의 레이먼드가 보내온 메일만 봐도 그것들이 지금쯤 서해바다를 건너려고 준비 중인 건 명백했다.
시안의 JM 엔터테인먼트 한국 본사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공장을 침습한 시안에 대한 정보는 누출된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그들의 정보망에 노출된 상태다.
그 정보를 아이들과 관련된 중국 조직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걸 JM재단 레이먼드가 알려 온 게 전부였지만,
그 뒤에 있을 일에 대해서는 예상이 가능했다.
그건 어차피 내일 이후의 일일 뿐,
옆에 누워 팔자 좋게 자고 있는 자쟈를 내버려 둔 채
박석찬에게 다가갔다.
“박팀장님, 피곤하시겠어요.”
“네 단장님. 이거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 그래도 보람은 있어요.”
아이들의 면면을 기록하는 박석찬의 얼굴에 책임감이라는 굳은 결기가 느껴졌다.
“오늘 JM엔터테인먼트 한국본사 화도 사옥 개관이 있는 날인데 함께 못하겠네요.”
“저야 뭐 천천히 가도 상관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창립 멤버인데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하는 게 좀 아쉽긴 했다.
“이따 저녁때 아이들과 고기 파티를 준비 중이니까 그걸로 퉁치죠.”
박석찬이 고기파티 얘기에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역시 라면의 효과는···’
“저 아이들에게도 설렌다는 기분이 필요할 테니까 미리 일러두세요.”
“여기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전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서서 자고 있는 자쟈를 흔들어 깨웠다.
역시나 신경이 날카롭다.
“아··· 나 좀 쉬게 놔두면 안 되냐?”
거의 밤을 새웠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래서 깨우는 거야. 가자. 너의 안락한 휴식처로···”
휴식처라는 소리에 놈이 벌떡 일어났다.
“어? 나한테 그런 게 생겼어?”
“그래 빨리 따라와.”
시안이 앞서 걸음을 옮기자 자쟈도 언제 피곤했느냐는 듯 재빠르게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정한욱 비서가 그를 맞았다.
“회장님도 곧 도착하신답니다.”
‘혜성그룹 인재 마음대로 했다고 잔소리하시러 오는 건가?’
손자 놈이 기획실 인재까지 뺏어가니까 뭘 하려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괜한 발걸음일 뿐인데 굳이 오겠다고 나서신 것 같다.
“네 저 옷 좀 갈아입어야 할 것 같으니까 일단 기숙사 쪽으로 이동해주세요.”
“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자쟈가 말했다.
“야, 혹시 내 옷도 있는 거냐?”
“응, 오늘은 네게도 특별한 날이니까. 샤워도 좀 하고 깔끔하게 챙겨 입고 나와.”
자쟈가 새 옷이라는 말에 어린아이처럼 입이 귀에 걸렸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지 이해가 안 가기는 했다.
‘세상이 만든 괴물이겠지.’
자신처럼···
***
“이곳 수동 일대 전체를 단지화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고 된 바로는 그 밖에 상당히 넓은 지역을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시안이 이곳의 규제를 걷어 냈다는 얘기는 들었다.
혜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일을 진행 하는 것에 장애물을 스스로 치우는 능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이제는 감도 안 잡히지만,
한번 뜻을 세운 일에는 돌아가는 법이 없는 손자 놈을 보려니까
죽은 둘째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아이는 확실히 재성이를 닮았어.”
이강호 실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히 저도 그렇게 느끼던 중입니다.”
“헌데도 여정이의 눈빛을 닮은 아이인 건 어쩔 수가 없더군.”
조태산은 민여정이 생전에 둘째를 뛰어넘는 총명함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둘을 섞어 놓은 시안이 알다가도 모를 아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만 해도 정말 뜬금없는 소식을 들었다.
개교도 하지 않은 학교에 200명가량의 아이들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 많은 아이들을 어디서 데려온 건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네 회장님.”
“그럼 그 문제는 일단 덮어 두라고 하게. 벌집일 수 있으니까.”
“네 그렇게 일러두었습니다.”
조태산 회장이 옆으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혹시 자네는 알았는가?”
회장의 옆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앉아 있던 신지혜는 갑작스러운 회장의 물음에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자신의 짐작을 감추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네 저도 그에 관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회한 회장의 눈은 속일 수 없다.
미소를 감추는 게 아는 눈치다.
기획실을 통해 민시안과 이 직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를 받았던 터다.
“허허 손자 놈에게 정말 인재를 빼앗겼구만 하하하···”
알고 있는 것에 말을 아낀다.
이제 자신의 보스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돈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딸려가는 직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의 사람 보는 눈은 정말 기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지혜라고 했나?”
“네 회장님.”
“그래 내 손자 잘 좀 보필해 주게.”
“송구합니다.”
시안이 말한 바대로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예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손자의 예측이 상당히 근접하게 현실로 이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미국의 곡창지대의 창고들마다 수확한 농작물들이 미친놈들의 방화로 일으킨 불길에 재로 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상은 조용한 듯하지만,
쏟아지는 예측들은 바로 코앞의 일마저 불투명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의 손자는 마치 그걸 대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행보들로 가득했다.
“이실장.”
“네 회장님.”
“내가 말한 것은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지?”
“말씀하신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10만평 정도는 될 겁니다. 그리고 분부하신 대로 도련님 학교 근처에 별장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래 잘 했구만. 병호가 그룹 내 부회장 입지를 잡았으니···조만간 한남동보다는 이곳에 머물 일이 더 많을 것 같아.”
“네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회장의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보였다.
“저 건가 보군.”
“네 맞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곳이 대형마트 건물이었다고 하더군요.”
회장의 차량이 입구를 지나 4층짜리 대형건물 현관에 멈추었다.
시안이 다가와 직접 차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할아버지.”
조태산은 시안이 부르는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젊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쾌함을 느꼈다.
“그래, 너도 잘 지냈지?”
시안이 차에서 내리는 신지혜를 보며 말했다.
“네,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서···”
“응, 아니다. 네가 욕심낼만한 부하더라고 저 아이가 허허··· 내가 이해해야지.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냐?”
자쟈를 처음 본 조태산이 그에게서 묘한 기감을 느꼈다.
“아··· JM엔터에 직원이에요. 자쟈 칼리제, 인사드려 우리 할아버지야.”
“안녕하세요. 자쟈 칼리제입니다.”
생긴 건 영락없는 외국인인데 한국어가 능숙했다.
“그래요 반갑구만.”
“들어가시죠.”
시안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정말 뜻밖인 것은 이 건물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다는 점이다.
“글로벌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그들 모두가 미국과 유럽의 지사에서 파견 나온 이들이라고 했다.
시안이 그들의 향해 영어로 외쳤다.
“attention, please.”
일손을 멈춘 직원들이 모두 시안을 주목했다.
“this is the chairman of the korea heasung group. and my grandfather. a round of applause, please.”
조태산 회장을 향해 헤성그룹 총수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모든 직원들이 조태산 회장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멋쩍은 조태산회장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thank you! i‘m just an old man···thank you.”
사실 이 자리를 빨리 지나치고 싶기는 했다.
‘녀석이 나를 곤란하게 하는군.’
시안은 그사이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다가왔다.
“네 방으로 어서 가자.”
“왜요? 저 친구들 모두 혜성에 기대하는 게 큽니다.”
“허허··· 혜성그룹 기둥을 뽑을 생각은 아니고?”
장난스럽기까진 한 시안의 말이 조태산회장에게는 기꺼울 뿐이다.
“그럴리가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조태산 회장은 모르고 있었다.
위성 통신망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게 이곳이다.
물론 알베로의 작품이지만···
시안이 신지혜을 돌아봤다.
“신지혜 팀장님.”
“네, 대표님.”
지금 그녀의 주변에 스쿨드가 몸이 달아서 침을 삼키고 있다.
“채용공고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네, 말씀하신 대로 보육사 1천명과 사범대를 졸업한 교사 2천명을 채용하는 모집공고를 학교법인 명의로 전국에 배포한 상태입니다. 1주일 간의 서류 심사 후 1주 뒤에 면접이 있을 예정입니다.”
시안은 전국에 있는 아동복지시설의 아이들을 모두 수동으로 유치할 생각이다.
물론 이건 자선사업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
“일단 접수된 서류 복사본은 모두 제게 넘겨주세요.”
그 말에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신지혜를 향해
“저는 사람을 채용할 때 자소서를 보는 편이라···”
“아··· 네, 빠짐없이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마련한 저금리 대출 금융 창구가 제일 중요합니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세요.”
“네 단장님, 각별하게 유념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조태산회장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네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네가 구상하는 세상이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구나···’
저게 사업일까 복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
오픈 행사는 한국의 직원들과 해외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의 간단한 상견례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샨! 샨!···]
할아버지와 함께 학교로 이동하던 차량 안에 갑자기 작은 공간이 찢어지며 페어리가 나타났다.
얘가 그러니까···
‘라드실?’
[응! 샨, 작은 영토 집에 크은 일이 생겼버렸어! 큰일!]
갑자기?
‘무슨 큰일?’
작은 영토면 일산 집이었다.
[껍질이 깨졌어! 결국 세계수님이···]
‘껍질은 뭐고···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왜?’
껍질이 뭔지 모르지만, 페어리가 세계수를 거론했다면 라드실의 말처럼 작은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껍질이 깨졌다는 거야? 라드실.“
[위습!]
그거라면 라드실이 소환했다던 정령의 씨앗.
[그러니까 지금 가야 해]
그 정도면 일정 조정이 필요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시안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25분,
일산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였다.
뒤에서 따라오는 할아버지 차량에 탑승한 이강호 실장에게 연락해 일정을 바꿀 생각을 하는데,
라드실이 입을 열었다.
[샨! 너의 큰 영토와 작은 영토를 연결해야 해. 그래서 가야만 하는 거야. 샨만이 그걸 개통할 수 이써! 지금 세계수님의 줄기들이 오려 하고 있단 말이야아! 서둘러야 돼.]
’어?‘
뭐가 온다고?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찾아주신 독자님들의 선작과 추천 응원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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