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원지간
뜻밖에도 국정원 국장 둘이 방문을 했다.
그들을 대접하고자 마련한 자리···
결국 이런 사소한 자리도 의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행사는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 목표를 예고한다.
알넥 코퍼 마지막 행사는 첫날 폐막 행사,
그리고 5일간의 팬시 전시를 끝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클배로 컨텐츠는 이제 사실상 끝났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그 행사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던 조지 알넥 회장
그가 오딘 혹은 그의 호문쿨루스라고 단정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면 다음 게임 출시일을 그딴 식으로 발표할 수가 없었다.
우연이 연속되면 필연이 된다.
그는 왜 그곳에 나타나 첫 번째 문이 열리는 날과 정확히 일치하는 차기작 게임 출시 일정을 예고했을까.
그건 공교로운 게 아니라 경고였다.
회장실로 직접 연결된 엘리베이터의 티켓까지 시안의 손에 쥐어 주었다.
시안이 잘나서 준 게 아니다.
이건 그냥 아주 단순한 함정이다.
[궁금해? 궁금하면 네 목숨 내놔.]
진실을 알고 싶은 놈이 지불해야하는 대가···
단두대로 초대하는 티켓이라는 걸 시안은 직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안에 대한 경고라면 무엇일까?
스포 금지,
자신이 현세계에 던질 미친 짓을 출시하기 전에 현실 시스템이 알게 하지 말라는 말을 에둘러 보상에 끼워서 한 것이다.
말하자면 반드시 생길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오죽하면 호기심 많은 노른의 스쿨드에게까지 징계를 내려 미래를 관장하는 능력을 봉인해버렸을까.
한낱 인간으로서 그 미친 짓에 어울려 줄 수밖에는 없다는 게 시안이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눈에 띄는 인재들은 살려 놔야하지 않을까.
오늘처럼 말이다.
“석찬씨 정말 오랜만에 보네··· 반갑다.”
1국장이 음식이 준비되기 전 거실에 머무는 동안 다가오는 박석찬을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네 단장님, 반갑습니다. 지금은 국장님이군요.”
그가 자리에 앉자,
자쟈는 그를 계속 응시했다.
“박팀장님 국장님을 잘 아시나 봐요?”
“네 한때···”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시안의 시선이 자쟈를 향했다.
“야, 넌 그 선글라스 좀 벗어라.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돼?”
“······”
말없이 선글라스를 벗는 자쟈가 살짝 미간을 구긴다.
“시안, 너 말인데··· 너 인마 아까부터 자꾸 나 한테만 반말을 하는 거지? 쟤한테는 존대하면서···”
박석찬을 가리키며 승질을 낸다.
-대군주의 위엄이 열립니다.
박석찬에게서 살며시 살기가 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박석찬은 자쟈에게 유감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합석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화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럴 기적 같은 일은 절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당분간 얼굴 맞대고 살아야 했다.
그만큼 긴장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박석찬보다 1살 많은 자쟈는 그게 불만인가 보다.
러시아 고려인 손에 구원받아 1년을 함께 살았던 자쟈는 그래서 그 후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한국말 좀 한다고 존대를 받겠다고? 너 잊었냐? 그 팔 왜 골절된 건지. 내가 지금 너한테 욕을 안 박는 것 만해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야.”
“하아···”
“넌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미안하고 고마워 해야 돼.”
“그래.”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인정하지. 미안하고 고맙다.”
“나한테만?”
그럼 너 말고 또 누가 있었냐는 듯 멍청한 눈으로 바라봤다.
시안이 그런 자쟈에게서 박석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쟈가 그건 정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아··· 샨! 그건 정말 오버야.”
시안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듯해도 사실 직업적인 특성을 따지면
그저 은원관계로 이야기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시안은 이 자리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체스를 두고 있다.
다음 한 수를 둔다.
“너 진짜 조심해야 돼. 안 그런 가요 팀장님.”
자쟈를 노려보다 시안에게 시선을 옮긴 박석찬이 굳은 표정으로
“시안 도련님, 사석이니 저도 가볍게 말하겠습니다. 방금 그 말씀은 나름 프로의식을 가진 제게는 좀 실례의 말 같습니다.”
직업에 관련된 프라이드를 건드린 것이니까.
학교법인과 계약은 10월부터였으니 아직까지는 경호팀장이 맞다.
“인정합니다. 가볍게 얘기한 점 사과드릴게요. 그래도 감정이 남아 있다는 건 사실 아니겠어요?”
“그 부분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국장님께 들은 바도 있으니까요.”
그에게 1국장이 양해의 말을 전달한 것 같다.
“다만 저자는 좀 특별하죠. 벌써 도련님을 상대로 1차례 시도한 바도 있으니, 죽이는 걸로는 만족이 안 될 거 같아서 제가 참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더 무섭게 느껴진다.
‘저건 혹시 산 채로 껍···’
가볍게 말하는 것 같지만 무서운 얘기다.
시안이 그 대답을 듣고 자쟈를 돌아봤다.
“들었지? 너 죽어도 곱게는 못 죽는다니까.”
자쟈는 그럼에도 나름으로는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저 사람과 나와의 악연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용병이었고 미스터 박은 그때 직업군인이었다는 것이 문제지.”
용병과 직업군인 간의 전투 상황이라면 다르다는 논리.
포로의 기본적인 권리를 명시한 제네바 협약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저들만의 규칙은 존재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될 수도 있는 그들이 지켜야하는 불문율,
작전에 원한과 복수 금기시는 암묵적인 룰 일 수 있었다.
그런데 자쟈가 가만히 있는 그를 죽이러 한국으로 들어왔다면?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범죄니까.
그러나 시안이 알아본 바로는 그것마저 자쟈가 금기를 깨는 행동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 문제를 이렇게 까놓는 이유는 시안 자신이 원하는 답을 끌어내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말이다.
“자쟈 그런데 말이야 넌 조용히 살던 박팀장님을 노리고 입국했단 말이야. 그것도 직업적 특성으로 변명할래?”
자쟈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였다.
“그게 아니지. 너도 잘 알지 않나? 그러면서 왜 자꾸 껍질만 핥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자쟈가 박석찬을 보며 말했다.
“그도 원했던 바일 테니까. 언젠가는 나를 만날 걸 말이다. 그런데 나도 그와 같은 이유로 그를 만나려고 한 거야.”
자쟈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시안은 이미 알고 있다.
그 뒤로 입을 다문 자쟈를 대신해 시안이 말했다.
“너도 결국은 너의 동생과 조력자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했다?”
이번에는 자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안이 박석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거 맞나요?”
시안의 물음에 박석찬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
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작전 이후 저도 한동안 미치광이처럼 저자를 쫓다가 우연히 그의 조력자 위치를 알게 되었고 비밀리에 위수지역을 이탈해 단독으로 피습까지 했으니까요.”
“그는 어떻게 되었나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음독이었죠. 그날 이후 귀국해 전역신청을 낸 겁니다. 그는 민간인이었고 저는 군인이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영내 이탈 말고는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많이 흔들렸습니다.”
자쟈가 처음 박석찬이 등장했을 때 그를 노려본 이유였다.
그 음독자살한 자가 자쟈의 한 동네 친구이자 군 동기였으니까.
서로 장군 멍군한 사이긴 하지만, 이쯤에서 앞을 보자는 게 시안의 메시지일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시안이 두 국장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국장님들도 이 상황이 조금 불편하실 겁니다. 그래도 익숙한 일이기도 하겠죠.”
1국장은 아까부터 미소를 잃지 않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뭐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할 일입니다.”
시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오늘은 지난 감정 털어내는 자리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오신 김에 합석을 부탁드린 겁니다.”
1국장이 8국장을 보면서 대답했다.
“뭐 우리도 그런 게 바람직하니까 동의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이다원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임무 상 이다원인 서문정은 국장들을 보며 살짝 눈인사만 했다.
그녀는 이솔이를 데리고 건강검진을 위해 늦은 오후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었다.
간단한 검진을 마치고 병원을 나와 지나는 길에 자리한 대형 서점 앞에서 멈춰선 이솔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 서점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된 듯 보였다.
이솔이는 책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했다.
“네 이다원 담당님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이솔이는···”
그녀가 뒤를 돌아다 봤다.
아이가 이다원 뒤에 숨어 있던 터라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이솔아 왜 그래···무슨 일 있었어?”
시안이 현관 쪽으로 다가가자 더욱 뒤로 숨는다.
이다원을 보며
“혹시 밖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 있었죠. 당연히.”
“네?”
“보면 놀라실걸요?”
무슨 일 있었다는 소리에 시안이 아이를 불렀다.
“조민이솔, 이리 나와 봐.”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이고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두 눈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살짝 들어 시안을 바라본다.
“어?”
시안은 잠깐 ‘얘는 또 누구지?’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확 달라진 이솔이가 눈에 들어 왔다.
“와아! 너 이솔이 맞아? 어디 얼굴 좀 더 들어봐.”
“앙 대여. 앙 대는 데···”
네 살배기의 수줍은 앙탈이 이런 거였구나.
이렇게 미치도록 귀여운 거였어.
“이솔이 정말 예쁘죠? 저도 미용실에서 원장님도 놀라고 저도 놀랐다니까요. 그래서 좀 늦었어요.”
“아··· 미용실도 들리신 거군요?”
“네,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것 같아서요.”
“정말 잘 하셨네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물론 결과적으로 잘한 건 맞지만요···”
반 곱술 머리를 손질해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살려 분배한 2:8 가르마가 아이의 얼굴을 환하게 드러나게 했는데,
때문에 어제만 해도 못 보던 눈썹이 처음으로 보였다.
정말 그림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래로 방울처럼 또렷하게 큰 눈에 가느다란 쌍꺼풀을 가려주는 긴 속눈썹은 티 없이 맑은 눈동자에 걸치며 아이에게 딱 맞는 순순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 천진한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그 사이에 인형같이 콕 박아 놓은 오뚝하고 앙증맞게 귀여운 코와 작은 입···
정말 더는 못 봐주겠다.
너무 눈부셔서···
바사가 그런 그에게 한마디 한다.
[“얼씨구. 이 자식 봐라··· 너 그 표정 뭐냐?”]
‘어··· 내 동생 보는 중인데?’
[“정신을 차리고 봐야지 인마! 남들이 지금 네놈 얼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아.”]
‘무슨 오해?’
[“반쯤 정신 나간 놈 같거든”]
바사의 말에 시안이 살짝 고개를 들어 서문정의 약간에 혐오와 근심 어린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
[“새끼 적당히 했어야지! 쯧쯧”]
“정말 수고 많으셨네요. 너무 놀랐어요.”
그건 인정한다는 듯
“하긴 이해는 할 만해요.”
그 순간 차마 자신의 입으로 뱉지 못한 말···
‘저기요 뭐를 이해는 할 만하다는 건지···’
딱히 그녀의 이해를 구하자고 한 말은 아닌데 뭔가 오해가 깊은 듯 했다.
“네 일단 저는 손님들과 얘기 좀 하려니까 이솔이는 이다원 담당님에게 부탁 좀 드릴게요.”
서문정이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제가 이솔이 쭉 보살필게요.”
“네 그래 주시면 고맙···”
‘근데 그러는 게 좋을 거 같다는 건 무슨 의미?’
[“내가 봐도 네놈이 좀 그래 보였어 인마. 너 조심해!”]
‘아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오해를···’
시안은 억울했지만,
이솔이를 끌어안고 잽싸게 현관문을 빠져나가는 서문정을 보며 뒷목을 긁어야 했다.
‘난 그저 너무 예뻐서 봤을 뿐인데?’
[“그저는 무슨, 그럼 네놈 눈빛이 악마대공 소아성애자 놈과 똑같았던 건, 그냥 변수냐?”]
‘그래?’
[“그래 인마.”]
그건 정말 변순데···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찾아주신 독자님들의 선작과 추천 응원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