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빵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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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내린 시안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3년간의 레이스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여운이 가시지 않았으니까.
여객터미널로 이동해서 절차를 마치고 들어선 입국장은 한산하지도 그렇다고 부산하지도 않았다.
조셉에게는 일본에 머물라고 지시했다.
지금 시기에 그런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과중한 지시를 내리고 떼어 냈다.
일본내 JM재단 금융투자 전체에 대한 정리작업을 마무리하고 2개월 내에 철수하는 걸 도와라.
그중에서 지하 금융은 험한 곳이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오늘부터는 시안은 미끼가 되어주어야 하는 날이다.
서둘러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움보다 쓸쓸함이 익숙한 집이지만, 지금은 어디라도 가서 일단 푹 쉬고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택시가 대기하는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누군가가 불러 세운다.
“조민시안님.”
젊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불러 세웠다.
시안은 대충 그가 뭘 원하는지도 짐작된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처음 보는 상대였다.
“누구시죠?”
가까이 다가온 그가 명함을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혜성그룹 비서실 정한욱>
“혹시 그분께서 저를 데려오라고 한 거라면 제가 말 안 해도 잘 아시겠네요? 피곤한 귀국길이었거든요.”
“아닙니다. 회장님께서는 시안님을 댁까지 편안하게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더 불편하다는 걸 알만한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시안님?’
그나마 그렇게 불러주니 안 거슬리는 건 다행 아닐까.
그동안 그를 이런 식으로 마중 나왔던 건
혜성의 이강호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시안을 도련님이라고 불렸다.
6개월 전,
클배로 주최사인 알넨 코퍼는 뉴욕에서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
그때까지 클배로를 플레이하며 살아남은 12명을 초청했던 행사.
시안도 겸사겸사 그 행사에 응하고 돌아온 입국장에서 마주쳤던 혜성 쪽 사람이 늘 그렇듯 이강호 실장이었다.
그날 도련님이라는 호칭의 거부감은 친족들을 향한 원한 맺힌 분노와 함께 그날 폭발했다.
[저기 이강호 실장님. 모시는 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게 와야 한다는 것을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도 한가지는 부탁드리고 싶네요.]
[네 말씀하시죠 도련님.]
[저를 자꾸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 듣기 힘들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었나요?]
[그래도 혜성그룹 주인의 친손을 따로 부르는 호칭은 없습니다. 그 점만큼은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그럼 그걸 제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
[자기 친혈육을 죽인 개만도 못한 인간이 멀쩡히 살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개 같은 집안이 거기잖아요.]
[·········]
[그런 집안의 개 같은 축복을 받아 도련님 소리를 듣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게···]
[그건 제가 개새끼로 불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 심한 말씀은···]
[그러니 다시는 제게 그 도련님 소리 하지 말아 주세요.]
그 이후로 그를 보지는 못했지만, 사실 조민시안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반응할 건 아니었었다.
부모님의 사고가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면 달랐을까?
미국 행사를 마치고, 성년이 된 후 처음으로 알베로 아저씨를 만났을 때,
부모님 사고의 전말을 낱낱이 알게 된 직후였다.
때문에 귀국한 입국장에서 들었던 도련님 소리에 감정을 다스리던 끈이 끊어졌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눈앞에 있는 정한욱 비서는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호의는 고맙지만 저는 택시로 이동하겠습니다.”
“Young Master, 잠시만···”
‘와 이분은 귀엽기까지하시네··· 젊어서인가?’
정한욱 비서는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아예 Young Master라는 영어로 돌려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장난기가 발동했다.
“자꾸 이러시면 스토커로 간주하고 신고하겠습니다.”
“네?”
“아··· 모르시는 구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스토킹.”
“······”
정한욱 비서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농담이 너무 추웠나···’
“그냥 드립이니 깊게 생각 마시고요. 그냥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럼 이만 저는 피곤하고 바빠서···”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은 택시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탁!
“어서오세요.”
“일산동구청으로 가주세요.”
“네 손님, 짐은 없으신가 봐요?”
“네,”
택시가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간다.
귀국 전 시안은 레이먼드의 보고를 받았다.
그제 벌어졌던 일은 세르비아 마피아 조직 젤리코 클랜이 기획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놈들은 2년 전 라이벌 마피아 조직인 듀발로프 클랜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 싸움이 정치권에까지 번져 집권 정치 세력이 범죄 조직 젤리코 클랜과 유착관계라는 정보를 쏟아내는 역공작에 걸려 보스가 체포되고, 이후 대대적인 검거로 조직원들이 갈려 나간 후 지금은 몰락 직전까지 몰린 상태라고 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물불 안 가리게 되는 법이다.
시안은 놈들을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두고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꼬리도 안되는 말단을 밟아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놈들을 움직인 자들이 꼬리 자르기 들어가면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으니까.
그때 작업 들어온 그자들의 뒤를 밟고 올라가 중간 단계까지만이라도 확인해 두면 그나마 성공이다.
이번에 올 걸로 예상했던 특급 킬러 놈도 어제 새벽 밀항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고는 보고를 받았다.
게다가 특급이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라는 것도 함께···
‘참 지긋지긋한 새끼들이네···’
언제나 그랬지만, 시안의 주변은 항상 북적거린다.
지금도 시안이 탄 택시 양 싸이드와 후위를 따르는 차량들은 그를 경호하는 차량들이다.
모두 여섯 대···
물론 혜성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시안의 눈으로 수도권의 야경이 들어왔다.
귀국길에 바라보는 야경이 주는 느낌도 평상시하고 조금 다른 느낌의 감성을 불러온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던 느낌과도 달랐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가정···
그 가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별로였지만 두 분은 성공했다.
아버지는 혜성그룹의 둘째 도련님이었다.
혜성그룹의 둘째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의 상속권과 성본을 버리는 것으로 친족들과 단절을 결행했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결혼을 반대한 조태산 회장이 어머니가 일군 글로벌 금융기업의 한국 지사를 흔들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머니는 한국 지사를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미국 금융법인에 다니던 아버지와 함께 출국했다.
어머니가 단순히 고아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정략결혼을 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아버지는 혜성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
조민이라는 성씨도 미국에서 결혼하며 생긴 신생 성씨였으니까.
아버지 ‘조’씨와 어머니 ‘민’씨의 조합.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했던 모습을 기억해 보면 그건 존경에 가까웠다.
그게 어머니의 살아온 스토리에서 발산된 매력 때문이라고 할까?
다섯 살에 고아가 된 후로도 구김살 없이 성장해 대한민국 최고 학부를 수석 입학하고 미국 허버드로 편입한 후, 그것마저 수석으로 졸업한 지독함도 그녀가 발산하는 특별한 매력에 무칠 정도였으니까.
그들이 10년 만에 이룩한 미국에서의 성공,
혜성그룹의 재산상속은 그에 비하면 하찮은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두 분이 지금도 살아 계셨다면 정말 행복했겠지···
시안의 얼굴이 비친 택시 차장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비가 오는 날도 아닌데···
‘제길···’
***
-띠!
“알파, 찰리 핀 위치 확인 바람.”
-띠!
[찰리, 알파 핀 위치 현 위치 고정 확인 양호]
-띠!
“알파, 델타”
-띠!
[데타, 알파 현 찰리 위치 확인 양호]
-띠!
[브라보, 알파 접수 위치 확인 양호]
위치 확인 무선 교신이 끝없이 이어진 하루였다.
놈은 분명히 눈치를 챈 것으로 보이는데, 확인된 위치를 포위한 상태에서 아직 꼼짝도 안 하고 있다.
잘 정리된 계획도시의 골목이다.
바둑판처럼 네모 반득하게 나뉘어있는 곳이라 이미 놈은 이곳의 지형을 모두 파악했다는 의미다.
놈의 위치를 대략 파악했다고 해서 섣불리 들이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인원들은 모르지만, 자칫 선량한 시민들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띠!
[에코, 알파]
-띠!
“알파, 에코 대기”
-띠!
[에코, 알파 밴 핀 이상]
-띠!
“알파, 에코 현 위치 대기 이상”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교신이었다.
놈은 빠져나갈 틈을 찾고 있다.
사라졌다 해도 놈은 포위망 안에 있다.
맨홀 뚜껑 아래에도 배치된 상태다.
-우웅웅! -우웅웅!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말해,”
[국장님, 표적이 도착해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쯤인가.”
[자유로를 막 지났습니다. 13분 거리입니다.]
“알았다.”
놈을 끌어낼 그가 오고 있다.
-띠!
“알파, all 대기 13.”
***
“잔돈은 됐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덜컥
-쿵!
언제나 그렇듯 택시는 집에서 좀 떨어진 동구청 앞에 세웠다.
길 따라 비탈길을 오르며 능안공원까지 걷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놈이 왔다면 시안을 집에서 처리하는 게 무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녀석은 지금 쫓기는 중이다.
작업하고 튀기에는 탁 트인 이런 시내가 좋다.
[“허흠···어허···”]
연신 헛숨을 과하게 토하는 바사놈 때문이다.
‘왜 똥 마린 놈처럼 기함 질이야?’
[“지랄, 네놈 뒤에 붙은 놈들은 누구냐? 한두 놈들이 아니다.”]
‘있다 그런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하니 엿 같아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
[“용병이냐? 이 세상 용병들은 무척 약하군.”]
‘그래도 이 세상 일반인들보다는 그나마 엄청 강한 거다.’
[“음?”]
‘쉬!’
역시, 놈이 그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바사의 의문과 시안의 긴장이 일었던 건 동시였다.
그 상황에 떠오르는 시스템 문구
-대군주의 위엄이 열립니다.
가로등 이면의 어둠에서 은밀히 다가오는 살기.
그리고 곧이어 나타난 기척은 고작 열 걸음도 안 된다.
신형이 흐릿하게 보이는 순간,
때를 같이해 패시브스킬이 작동했다.
-혜안 발동
약간 느려진다 싶게 시간의 밀도가 옅어진다.
어느새 코앞에서 심장을 향해 칼끝이 들어왔다.
-훅!
예기를 겨드랑이 아래로 흘려보낸 시안이 오른팔로 놈의 칼 쥔 팔을 휘감아 잡으며 왼팔로 놈의 입을 틀어막고 바닥으로 몸을 기울여 힘껏 밀어 눌렀다.
-우득!
“으읍!흐푸푸···”
관절이 꺾인 고통에 입까지 틀어 막혀 비명마저 제압된 놈을 길바닥에 처박았지만,
그 지경이 되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왼팔 소매에서 칼날을 뽑아 쥔 놈의 손이 시안의 옆구리 쪽을 노렸다.
지금 자세에서 가장 치명적일 간동맥을 향해···
-퍽!
그러나 시안의 주먹이 더 빨랐다.
관좌놀이를 가격당한 놈의 의식이 끊어졌다.
“후우! 능력치 안 올렸으면 이번에도 확실하게 골로 갈 뻔했네 진짜.”
-탁탁탁다닥
뒤를 따라 시안을 경호하던 9인이 달려와 멈췄다.
“괜찮으십니까?”
기절시킨 놈을 바라보던 시안이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오르던 길을 걸어갔다.
[“우쭐하기는··· 네놈이 강한 게 아니라 저놈이 약한 거다.”]
‘그래 너 잘랐다.’
그래도 어제의 그였다면,
좀전의 상황에서 놈이 지른 첫 칼에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건 명백했다.
아무리 격투술을 익히고 웬만한 킬러들을 제압해왔던 그였어도 말이다.
은신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놈의 은밀한 동선과 순간 가속은 사람이 실행할만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놈은 분명 특급 킬러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존재한다는 스페셜 킬러
암살을 청부한 인간이 누군지는 짐작이 간다.
‘이제는 아예 제 놈의 목숨까지 걸고 일을 저지르는 군···’
깜도 안 되는 인간들이 어설프게 조커로 불리는 괴물들을 킬러로 쓰고 제명에 죽은 인간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바라는 건 이제 하나다.
미끼 역할까지 해주었는데 간수 잘해주기를···
놈을 미국에 넘길 거였으면 이곳에 CIA 냄새가 진동했어야 했다.
‘국가 기관인데 그 정돈하겠지···’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부족함이 있더라도 추천과 응원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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