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휘이잉-휘익···휘리리-휘릭-휘익···
누가 보더라도 저건 바람 빠지는 소리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바사는 발라가 뭔 말을 하는 건지 대략은 알아듣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알이 아니라 차원과 연결된 통로라는 거지?”]
그러나 바사가 지금 한 말이 그대로 전해지지는 못했다.
이곳의 언어가 그녀에게 일부만 걸러져 전달되는 상황,
그래도 다행히 ‘통로’라는 단어는 그대로 전달된 듯했다.
발라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녀가 다시 바람 새는 전음을 주었다.
-휘이잉···휘익···휘리리···휘릭···휘익···
{“역행의 지평선···시공의 차원···우주의 순행···들어간 것-나오는 것, 여기···”}
번역기처럼 걸러서 들려지는 내용이라곤 항상 비슷한 단어들이 이어지다가 다시 품에 안은 것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마무리하는 것에서 맥이 빠질 뿐이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지, 뭐가 다르다는 거야?”]
그 말이 그 말 같은 생경한 단어들의 조합이 저런 식으로 애매하게 나열되는 것을 이해하는데 통로라는 개념 외에 다른 수식은 없었다.
수수께끼로 이어지는 문답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저 존재가 왜 이곳에 왔으며, 그녀가 애지중지 품에 안고 있는 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신성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발라와 마주 볼 수 있다는 특별함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언가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기에 바사는 없는 인내심을 쥐어 짜내며 하루종일 답도 안 나오는 대화를 이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과거를 깨끗이 잃어버린 자신의 전승을 되찾는 일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시공 차원을 가까이 접하며 존재하는 발라라면 자신의 전승을 찾는 길을 안다고 확신했다.
그녀도 답답했는지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알을 박박 긁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시간 개념이라는 것이 없는 시공 너머의 존재는 이 세상 언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휘이···
그녀의 바람 새는 소리는 시공을 넘나드는 파동이었다.
신성의 차원에서도 들리지 않는 높은 차원의 파동,
파동은 낮은 차원에서 걸러 듣기에는 언어적 한계가 있었다.
-휘익···휘잉···휘릭···휘익···
{“기달···말···배워···기달···”}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알아들을 만했다.
[“어! 말을 배워서 올테니 기달리라는 거지?”]
반색하는 바사를 야리며 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것에 찌들어 세상을 등지고, 신성의 차원마저 등졌을 정도로 게으름에 쩐 발라가 결국 어학연수를 결심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녀가 무슨 사명감을 가져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바사의 전승이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님을 예고한다고 생각기에는 충분했다.
[“역시 이몸이 범 우주적인 전승을 가진 존자임이 분명하군. 핫!”]
-피릿···
발라가 조소어린 비웃음과 함께 한쪽 팔을 슬며시 들어 공간에 둥근 화경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의 일렁이는 표면에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배경이 드러났다.
점점 뚜렷해지는 도시의 풍경으로 화경이 가득 채워졌다.
한데 비춰진 도시 가운데 둥글게 자리한 괴이하고 이질적인 공간 균열도 함께 보여졌다.
[“이건···”]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을 하는 순간,
도심의 풍경을 보여준 화경이 물결처럼 일그러지며 바사의 의식 속으로 빠르게 삽입됐다.
[“어?”]
순식간에 기습적으로 벌어진 일에 얼이 빠진 바사를 향해 발라가 이제 그만 꺼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입을 처음으로 열었다.
“꺼-져-”
그건 발라가 처음으로 뱉어낸 이 세상 첫 번째 말이었다.
***
“기어이 오라고?”
청와대와 교신을 마치고 통신기를 내려놓는 시안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혜성의 공장을 돌릴 발전용 엔진 5000개와 정부가 기간시설을 복구하는 것에 쓰일 발전용 엔진 5000개 도합 만개의 알콜 엔진을 조달했다.
거기에 60대의 차량도 함께 말이다.
그것으로 우선 순위 정해서 배정하고 무너진 시스템을 수습할 기틀을 마련하면 된다.
그렇게 생산되고 복구된 시스템을 대피소로 공급하고 몰려오는 이재민 안전에 총력을 쏟아야 할 때였다.
정부라면 사람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저들이 자신을 왜 보자는 건지 알기에 더욱 답답했다.
조금 전, 통화로 정부가 무너진 산업의 기반을 최우선으로 일으키려 한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더 희생되어야 알게 되는 걸까.
‘광인’이라고 명칭까지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미친놈들에 의해서 두 달만에 1000만명이 죽어 나갔다.
총도 폭탄도 무용지물이 된 마당에 앞으로는 더욱 강해진 광인들에 의해 꾸준히 죽어 나갈 것이다.
차원의 균열과 몬스터 웨이브까지 얘기할 필요도 없다.
국민의 30%가 광인이었는데,
1000만의 희생이 예상되는 지금은 그 비율이 50:50이 된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게다가 도시 몇 개는 이미 광인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다.
그런데 현대 무기가 깡그리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2000만 대 2000만이 비등하게 육탄전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쪽은 미친놈들이라 아이들까지도 전투의지가 만만치 않은 것에 비해 정상인들일 뿐인 이쪽은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노약자들은 싸울 의지도 없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가닥을 잡지 못하고 패닉상태에 빠져버린 정부는 뻔한 참혹한 미래를 상정하지 못해 외면하고 있다.
만일 이 나라 정부가 그런 인적 희생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앵무새처럼 말을 한다면,
시안은 단호하게 뒤돌아설 것이다.
어차피 살아남을 사람은 15% 내외일 뿐이다.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약속한 시간은 새벽 6시
-뚜우-뚜우-뚜우-뚜우-뚜우-뚜
-띠!
‘다섯 번? 괜히 연결했나?’
JM에서 마리아는 상시 대기 파트였다.
[······네 마스터,]
“자고 있었어?”
[아닙니다. 운동 좀 하느라···]
마리아가 에이르의 가호를 받고 아신주르의 공간에 초대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강했던 여전사가 각성을 하고 지금은 오우거와 맞짱뜰만큼 강해져 있었다.
“마리아, 6시간 후 서울에 간다.”
[네 마스터,]
그렇게 마리아와 통신을 끊고 침실로 향하는데···
[“네놈 그쪽으로 가면 죽는 수가 생겼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발라와 짝짝꿍이 한창일 바사의 등장과 뜬금없는 경고,
‘어떻게 위험한데?’
바사가 서울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말을 시작했다.
[“그곳에 총 9개의 균열이 생겼다.”]
‘뭐? 그게··· 벌써 생길 이유가 없잖아?’
[“그야 나도 모르지. 균열의 크기가 제각각인 걸 보면 몬스터의 규모도 다를 것 같기는 한데, 지금 당장 정신없을 인간들이 고작 몽둥이와 부엌칼로 저걸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군··· 아무튼 너 그쪽으로 가려면 긴장은 하고 가란 말이다.”]
이제 바사에게 위치 추적 네비게이션 기능이 생긴 건가?
‘바사, 혹시 너 발라와 대화하더니 차원이라는 것과 연결이라도 된 거야?’
전에는 감지라면 모를까 분명 그런 건 없었다.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여자와는 수수께기 같은 문답의 연속일 뿐, 이 세계의 언어를 모두 걸러내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건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나의 과거가 무엇이었을지도···]
허이구··· 언제는 죽자고 하던 놈이 이제는 삶의 의지를 불태우듯 말하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이제 나의 전지전능함을 굳이 네놈에게 감출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말하는 꼴이 이제 좀 바사 같네.
‘그래 계속 전지전능 좀 해라. 그럼 발라와 통성명은 한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바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앵무새처럼 같은 파동을 걸러서 들어보기는 했는데, 쉽게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호오 넌 그게 번역기에 걸러서 들리기는 하는구나? 그래 어떤 말을 해?’
[“역행의 지평선/시공의 차원/우주의 순행/들어간 것/나오는 것/여기, 매번 순서만 바꿔서 나열하기도 했지만 대충 그 단어들의 반복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통로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흐음··· 통로라···’
바사의 추리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통로가 아니라면, 경로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발라의 번역기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통로’를 ‘경로’라고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얼마 전 네가 다녀온 그 시공과 관련이 있다면, 그곳이 그녀가 말하는 <역행의 지평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
바사의 감정선에 흔들림이 감지 된다.
[“호오··· 그럴듯한데?”]
‘그럼 다시 가서 그걸 물어봐. 그때 만났다던 그 노친네와 나눈 얘기도 첨부해서 물어보면 다른 말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지금 말한 것이 오답이라도 상관없다.
바사가 발라를 붙들고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 중요할 뿐,
원래 어학연수라는 건 원어민과의 잦은 소통이 답이니까 말이다.
바사의 의식이 잠잠해진 걸 느낀 시안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바사의 말에 의하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균열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통로였다.
다른 세상의 비밀을 털어 낼 수 있는 기밀의 연결고리···
시안이 발길을 돌려 다가선 곳은 프레이야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럼 나도 너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겠네.”
[“······”]
균열이 나타났다면 반드시 서울로 가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나올지도 모를 균열을 맞아 준비 없이 간다는 건 미친 짓이 아닐까.
조금이라도 더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공부 방해되니까. 넌 발라한테 가봐.”
그 말을 듣는 바사의 뇌리에 문득 폭탄 돌리기가 떠올랐다.
[“이 자식!”]
***
“형 즞된 거 같은데···”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갑자기 등장한 검보라색 둥근 공간의 일렁임을 보고 입을 연 지효준의 말에 박인식보다 먼저 우지연이 입을 열었다.
“폐급 균열/ 고블린 코볼트 집결 중 예상 수용 가능 수 5000/ 대응은 알아서 잘··· 이라는데?”
“와아··· 지연이 좀 하는데? 근데 폐급은 뭐지? 설마 그 폐급?”
우지연은 그 물음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아재 티 내는 것 좀 보소. 그럼 그 폐급이겠지. 글자 그대로 쓰레기 등급!.”
우지연의 말에 눈만 껌벅거리던 박인식이
“뭐야, 차원 너머에서도 그런 잼민이 언어영역을 쓴다고? 역시 말세는 말세다.”
“삐빅! 아재입니다!”
“그래도 우지연은 인정.”
엄지를 치켜든 칭찬에 우지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아재요, 그럼 알아서 좀 모시세요.”
“응 아니야···”
“그거 반어법이잖아. 속으론 아니면서···”
“근데, 너 그 능력을 일단 감출 필요는 있겠다,”
“응, 나도 그럴려고. ”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걸 알게되면 사람들은 그녀를 구속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박인식이 비상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이곳에서 멀리 도망간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익숙한 장소에서 가지고 있는 자원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싸우는 게 오히려 생존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 기준이면, 우리 즞된 거 맞아··· 아무리 폐급이라도 5000마리면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런데 아파트의 이점을 잘 살리면 방어는 될 것 같지 않아?”
만에 하나 저 균열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건 방어조차 무의미한 지옥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걸 아는 지효준은 그의 말이 의아했다.
“어떻게?”
“비상계단에 식용유를 넉넉하게 뿌려 놓는 거야. 그리고 녀석들이 아파트로 몰려오면 지급된 알콜을 계단에 뿌리는 거지. 마지막으로 옥상에서 화로에서 가져온 불을 툭! 입구로 던지는 거야. 어때 죽이지?”
5000마리가 그들이 있는 아파트로만 모두 달려오는 건 아니다.
분산될 테니 많아도 100 내외일 것이고, 지금은 어떻게든 무조건 살고 봐야 했다.
“형,”
“응? 왜 뭐 잘못된 거 같아?”
“천잰데?”
“천재는 무슨··· 일단 장비부터 구하자. 식칼은 좀 그렇잖아.”
이제 몇 남지도 않은 동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그게 잘 될지 모르겠지만···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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