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크리스마스
라푸아 매그넘 8.6
지상 58층,
모든 등이 꺼진 실내는 어두웠다.
살짝 열린 베란다 창문 안으로 소음기로 보이는 총구가 고정되어있다.
이곳은 의뢰자 쪽에서 제공한 안가다.
목표로부터 약 2,250m
온도와 습도를 고려해도 17그램 .338구경 매그넘 총알이 2.5초 안쪽에서 도달하는 거리,
오늘 단 한 번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
목표 위쪽의 이해할 수 없는 광원의 반사가 스코프 렌즈를 직격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목표는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은 첫날에 불과하다
시간은 많고 당황할 것 없다.
더 좋은 기회는 반드시 오니까.
유리 벨로프가 이 의뢰를 받았을 때,
목표 근접 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저 경호가 삼엄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동봉된 세 개의 동영상을 보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돌려보고 얻은 결론은 하나다.
의뢰받은 표적은 근접전으로 세계 초일류 특급을 가져다 놓는다 해도 잡을 수 없는 신체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의뢰를 받아들인 자신을 원망했다.
근접 경호 인력과 2차 원거리 경호 인력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CIA와 FBI는 도대체 왜 주변에 죽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이해 범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파치슈바벤 가문의 경호 인력···
그리고 알베로 파치슈바벤의 등장,
오늘 낮에 간만 보려고 들렸던 게임 행사장에서 만일 그가 총이나 칼이라도 꺼내 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벌집이 될 상황이었다.
총을 쓰지 않는 근접전이라는 설정이라면,
장담하건데 러시아 특전병력 세 개 팀이 목표가 있는 곳까지 돌격해도 뚫기 힘든 구조였다.
특히 파치슈바벤 가문에게 그림자라도 밟히는 날에는 죽는 날까지 저들의 암살 시도로와 싸우면서 연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은밀한 일발 필살만이 답이다.
그리고 모든 장비를 준비해온 염산에 담근 채 사라지는 게 유일한 살길이다.
극도의 조심성이 그를 지금까지 살게 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공간인데도 그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철칙 중에 원거리로 의뢰를 마무리해야 할 상황에는 씻거나 잠도 자지 않는다.
음식도 선식으로만 해결한다.
소변은 특별히 제작한 용기에만 보고, 움직임을 필요한 최소한으로 줄여 처리할 뿐이다.
이번처럼 원거리 저격은 총도 그가 직접 제작해 손에 익은 것으로만 사용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흠···”
한탄 어린 숨을 작게 내쉬고 스코프 커버를 닫은 후 움츠려 어두워진 실내로 모습을 감췄다.
***
저녁 10시,
주현아가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무럽,
뉴욕매거진 차량이 시안의 집에 도착했다.
다섯 명의 인원을 직접 시안이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오 미스터 조민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본사에서 이번 일이 너무 뜻밖이라서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제임스 밀러 팀장님, 일단 내일까지 주말 휴일은 자유시간으로 쉬고 촬영할까 하는데 괜찮으시죠?”
“아··· 그렇군요. 저희야 괜찮습니다만···”
“그렇게 하시죠.”
말을 마치고 정비서를 돌아다 봤다.
“정비서님.”
“네 도련님.”
시안이 정비서를 불러 영어로 지시했다.
“내일 스텝분들 가이드 할 인원을 미리 섭외해 주세요. 1대1 맨투맨으로 배정하려고 하는데 어떨까요.”
“네 가능할 겁니다. 일러두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시안이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의아해하는 밀러 팀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팀장님과 스텝분들 하루 푹 쉴 수 있도록 개인 휴일 일정계획을 채크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휴일에 일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하루 쉬고 쵤영을 시작하자는 시안의 제안에 잠시 당황했던 제임스 밀러는 가이드 제공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달리했다.
‘하루 여유를 가지고 서울의 도심 탐방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네 그러시다면, 스텝들과 별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미스터 조민의 배려 고맙게 받겠습니다.”
원하던 대로 일정 조율을 마친 후 일일이 모든 스텝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목’을 열어 둔 채로···
운명을 보는 눈을 봉인 당한 스쿨드는 그 들의 정보를 시안 통해 공유받으며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우! 얘네들 다 내가 거두어도 돼?]
‘다 맘에 들어? 그럼 나야 땡큐지. 그래도 일단 하루쯤 더 두고 봐.’
[아니 왜? 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아··· 역시 누나는 아직 요즘 인간들을 모르네. 먼저 인성을 보고 건져야지 진국을 얻을 수 있다니까. 나중에 뒤통수 맞으면 죽여 버리고 싶을 걸.’
[그런 뜻이! 그래 알았다. 그래도 오늘 너무 기분이 좋다.]
‘응 누나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
이들은 방송을 위해 해외로 파견되는 인력들이었다.
말하자면 저 분야의 베테랑들···
그러니 스쿨드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단 스텝들을 각자의 게스트 룸으로 안내하고 그들이 녹화 전 식사와 함께 회의를 할 수 있도록 거실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주현아가 오면 바로 녹화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이 상황에 잔소리 한마디를 할 만한 바사는 웬일로 조용했다.
‘바사 네가 웬일로 닥치고 있는 거냐?’
[“말하면 말한다고 지랄, 닥치면 닥친다고 지랄하는 거냐?”]
‘알았다 이제 지랄 안 할 테니 계속 닥치고 있어라.’
[“어제 그 마왕 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뭔가 집히는 거라도 있어?’
[“너도 알다시피 역시 그놈은 오딘이 보낸 것 같다.”]
‘그래 호문쿨루스일 수도 분신일 수도 있겠지.’
시안의 대군주의 위엄이 그렇게 씨도 먹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스쿨드가 처음 보였던 반응처럼 정말 오딘이었던가···
움직임에 약간의 오류가 보여서 호문쿨루스라고 단정했을 뿐이다.
[“그게 오딘이라면 어째서 이 세상을 완전히 부숴버릴 것처럼 말을 한 걸까 생각했다.”]
바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시안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틀을 부숴버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만든 게임이라는 말을 두고 얘기한 것일 테니까.
그건 세상을 부숴버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 내용이었다.
인류가 태동하고 온갖 시행착오로 천천히 발전된 사회 시스템,
그래서 0.01% 지배 계층만이 써먹기 좋게 영글어 버린 모순된 법과 위선적 윤리로 뒤범벅된 사회 시스템 틀을 부숴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쉽게 말해 지금의 제도권과 질서를 모두 박살을 내겠다는 얘기도 된다.
자신의 눈알 한쪽을 빼주고서라도 진리와 지식을 갈망했던 오딘으로서는 그런 모호한 협작과 편법으로 인간 사회가 관리되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를 않았을 테니까.
오딘이 만들고 싶어 하는 판은 세계 질서의 리셋에 가까웠지만,
그게 바로 그가 생각하는 미드가르드의 해방이었다.
흔하디흔한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말하는 종말론적 개벽,
‘바사,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너는 그냥 그 부서진 세상을 나와 함께 일으키고 즐기면 되니까.’
[“극··· 그런가?”]
‘응. 그래서 네가 갱생인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과거를 잊고 바로 서야 하는 갱생···
***88
작전명 “택배배송”이 실행된 건
시안이 국정원 요원 서문정과 얘기를 나눈 지 12시간이 지난 아침 7시 출근 시간대였다.
시안은 놈의 위치를 안다.
옥탑 현관에서 왼쪽으로 60° 2.2Km 전방···
모르긴 해도 지금 시안이 문을 열고 마당에 머물면 놈은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약간의 곡선 궤적을 그리며 그의 머리와 심장 사이를 부수고 관통할 만한 거리였다.
‘혜안’이라는 패시브 스킬은 그를 향해 오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시간의 밀도를 엷게 만든다.
페어리의 쉴드는 날아오는 총알을 결계처럼 삼키고 되돌려 놈의 미간에 되박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거잖아 이드라실···’
[응! 나라면 그럴 수 있어!]
‘근데 오늘은 안 그래도 돼.’
[왜?]
‘파드리안이 놈을 반쯤 죽여 놓을 거거든···그러니까 이쁜 이드라실은 내 위치에 쉴드만 쳐주고 정원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가 파드리안 오면 잘했다고 칭찬해주면 돼.’
[헤헤! 응 알았어.]
준비물을 확인하고 놈 곁에 머무는 페어리를 소환했다.
‘파드리안 나와.’
공간이 뒤틀리며 파드리안이 인상을 찡그린 채 얼굴만 내밀었다.
[응? 바쁜데 왜 또 불러써]
‘놈이 손가락 까딱하면 바로 저주 시전 해.’
[우왁! 드디어 시작하는 거시냐!]
‘그래. 이드라실도 너한테 기대가 아주 크더라고.’
[악! 이드라실이? 아라따 손가락 까닥하면 바로 조지러 간다]
‘그래. 이제 가라.’
파드리안이 사라지고 시안이 현관문을 열었다.
***
어젯밤은 촬영용 조명들이 저택을 환하게 밝힐 뿐이었다.
표적이 늦게까지 방송 촬영을 하는 것 같은데 아쉽게도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도 인내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상황.
“···!”
드디어 3-27배율 스코프 랜즈를 통해 현관문이 열리는 것이 보인다.
표적이 옥탑집 마당으로 나와 멈춰 서서 정원을 내려다본다.
유리 벨로프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스코프를 들여다보는 눈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아··· 이건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절호의 기회다.’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쓰으으으흡.”
크게 들어 마신 숨을 죽이고,
온도, 습도, 바람, 곡사율···
조준에 소요된 시간은 3초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서서히 당겨진다.
-끼릭, 끼리릭-틱!
-투쿵!
격발직후,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고 탄도가 목표에 닿는 순간을 지켜본다.
1초···
‘됐ㄷ···?’
어쩐 일인지 격발되는 순간 목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2초···
어?’
···!
그 짧은 순간 갑자기 나타난 넓적한 프라이팬이 탄착점을 가렸다.
그리고 구멍이나 멈춰있던 프라이팬이 서서히 치워지고, 마치 반갑다는 듯 자신을 향해 목장갑을 낀 왼손을 흔들어 보이며 해맑게 웃고 있는 표적이 보였다.
저 불가해한 일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처럭!
-츠럴컥!
-팅!
무의식적으로 볼트 하우징 손잡이를 당겨 탄피를 약실에서 비우고 약실에 탄알을 밀어 넣으려던 손이 움찔 멈췄다.
‘어? 이게 아니잖아···’
유리 벨로프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목표가 자신을 비웃는 듯 보이는 저 기이한 연출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위치 노출···
다시 격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탄창을 빼고 총을 분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그다음 액션을 실행할 수 없었다.
“어헉?”
의식이 아득해지며 둔중한 어둠이 감싸는 공포를 느껴야 했던 그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 산타클로스는 어디 살아요?
자신의 네 살적 크리스마스 이브,
자신의 아스라한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기억만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에 남겨질 뿐이다.
***
[“브라보, 핀 위치 원거리 확보.”]
[“브라보, 알파! 핀이 볼트를 격발했다! 타겟 확인 요망. 브라보, 발포 대기.]
[“어? 극···그···”]
[“챨리! 타겟 상태 확인!”]
[“챨···챨리, 타겟 안전 확보”]
[“정신!···양호!”]
[“로저···”]
[“브라보, 핀 생포. 대기”]
[“로저”]
[“델타, 1조 비상계단 접수 진입”]
[“델타, 2조 전 층 엘리베이터 구조물 확보”]
[“델타, 3, 4, 5조 핀 위치 진입 대기”]
[“델타, 6조 옥상 확보”]
[“all, 현 위치 대기. 브라보 목표 고정. 계속 대기”]
[“로저.”]
[“브라보, 알파 핀 유동 없음”]
[“델타, 진입! 핀 위치 진입!”]
[“로저.”]
[“진입 완료! 핀 확보! 상태 양호.”]
[“작전 성공. 핀 인계하고 귀환하라.”]
[“로저.”]
***
패트릭은 놈을 넘겨받아 호송하고 있다.
그런데 계속 헤실헤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놈의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인다.
‘혹시 한국 애들이 약물이라도 투여한 것일까?’
도핑 테스트를 해보면 알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현장에 놈을 확보한 건 자신이 최초였으니까.
놈을 덮쳤을 때는 이미 약을 빨았는지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포획됐다.
이 정도면 한국의 첩보라인에 경의를 표해야 맞았다.
순순히 놈을 넘기기보다 반병신으로 넘기는 것이 저들에게는 유리할 테니까.
‘그런데 원거리에서 우리 눈을 피해 저런 게 가능하다고?’
불가능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놈을 대사관에 호송한 후,
본국으로 택배 배송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런 패트릭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놈이 동심에 가득한 눈으로 패트릭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말투로 지껄였다.
“아저씨!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안 되는데!”
“뭐?”
“웃어야 되는데!”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욕하면 안 되는데! 그럼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는데!”
“하··· 시발!”
쌍욕이 나오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샌디슨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야 샌디슨 이 새끼 지금 연기하는 거 맞지?”
패트릭의 물음에 그가 놈을 슬쩍 보고 말했다.
“연기를 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약물이 의심되기는 하는데···”
놈을 급습했을 때 1조는 모두 CIA요원들 뿐이었으니 한국의 국정원에 뭐라 할 일도 없다.
역시 도핑테스트 결과를 기다려야 할 상황,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달리는 차량에서 때 이른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졌다.
크리스마스 90일 전이고,
차원의 문이 열리는 건, 88일 전이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찾아주신 독자님들의 선작과 추천 응원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