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박인식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균열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명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역시 한결같았을 뿐이다.
“몬스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지만, 젊은 사람이 그런 망상을 하면 쓰나.”
“아니 멀쩡한 아파트에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야?”
“이게 어떻게 마련한 집인데, 그딴 소릴 해!”
하다 못 해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핀잔까지 들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집값 떨어지는 걸 걱정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같은 동 아파트에 살아남은 멀쩡한 사람들은 8가구에 불과했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정말 망상으로 괜한 걱정을 한 것일까?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맞이한 아침,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목을 축인 후,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저치자 도로변에서 벌어지는 급박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 왔다.
“어? 저건 또 뭔 일이래···”
우지연이 균열이라고 알려준 것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군인들이 집결한 것을 확인했다.
대충 보더라도 1만은 족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군인들이 확성통을 이용해 목청껏 외쳤다.
“주민 여러분, 유사시 군인들의 방문에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민 여러분들은 밖으로 나오시지 마시고 침입에 대비하십시오. 유사시 군인들의 방문에는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외출을 삼가시고 문단속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유사시 군인들의 방문에는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사시 군인들의 방문에는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박인식은 거실에서 자고 있던 지현우를 먼저 깨웠다.
“현우야, 일어나봐.”
“흐읍, 응?”
“밖에 난리야. 일어나봐.”
그때 우지연이 방물을 열고 잠이 덜 깬 얼굴을 내밀었다.
“아재··· 하암··· 무슨 일인데···”
박인식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마저 열어 저치며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와서 직접 봐. 아침부터 군인들이 새까맣게 깔렸다니까.”
“뭐? 진짜! 와아···”
“어머 무슨 일이래?”
건대 입구 골목골목을 가득 메운 군인들은 모두 완전 무장을 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균열 때문인가 봐.”
“그러게, 그런가 본데··· 우린 어쩌지?”
사태를 파악한 지현우와 우지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뭘 어쩨, 우린 우리 대로 준비를 해야지.”
박인식의 말에 지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군인들이 움직였으면 일단 문을 걸어 잠그고 관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제 했던 얘기는 군인들이 저렇게 올 줄 몰랐을 때 얘기잖아.”
지현우의 말이 맞았다.
괜히 지금 나섰다가는 오히려 위험할 뿐이다.
우지연은 다용도실로 달려가 어제 구해 놓은 쇠지렛대 들고 나왔다.
“우린 이거 하나씩 들고 대기하자고···”
그들이 있는 박인식의 집은 8층이었고, 예상대로라면 상대는 그래봐야 코볼트와 고블린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박인식이 쇠지렛대를 받아 들고 창밖을 주시했다.
***
김태원 중장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에 사고가 멎을 것 같았다.
전통을 통해 균열이라고 명명된 공간에서 끝도 없이 몰려나오는 작은 괴물들은 너무나 민첩해 쉽게 제압되지 않았다.
처음 준비한 대로 화공으로 일차 방어에 성공했지만 고불린이라는 것들이 쏘아대는 활과 독침에는 속수무책이었을 뿐이다.
그로 인한 희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전투복이 천 쪼가리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가장 큰 문제는 균열의 입구에 몰려있는 놈들로 파악된다.
부관의 얘기로는 그것들이 지휘하는 모양인데, 황당한 것은 화염발사기의 화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공격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1만의 군 병력으로 막기에 충분하리라고 여겼던 건 오산이었다.
현재 광화문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지휘 본부와는 갑자기 통신마저 두절 된 상황, 통신선을 연결할 엄두도 뭇 낼만큼 급박했다.
그때,
-두그득두그득두그득···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쉐에에에에에엑!파방!쾅!푸앙···
고블린의 진영에서 커다란 화염의 불기둥이 일어났다.
그 기괴한 장면을 연출한 진원지 쪽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을 때, 김중장의 눈에 들어온 존재,
몬스터들 사이를 가르며 도로 위를 날 듯이 달리는 건···
돼지?
말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커다란 돼지 위에 올라탄 소녀가 보였다.
걸그룹 출신 같은 눈부신 미모의 소녀가 긴채찍을 절묘하게 제어하며 사방의 몬스터들을 쓸어 나간다.
“비그! 자리 잡아줘. 균열 앞 주술사 몇이 아직 살아 있어!”
“퀘에에에! 꿀···”
송희재가 타고 있는 비그는 헤니르가 화신 송희재를 위해 직접 창조한 탑승물이지만, 생김새는 자신을 그대로 본뜬 분신체였다.
게다가 신성의 버프를 걸어 웬만한 신성력이 아니고서는 상처를 낼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쉴드가 갑옷처럼 씌워진 상태다.
송희재의 주문에 비그는 달리던 탄력을 제어해 급선회로 방향을 틀어 커다란 원을 그리듯 주변의 고블린과 코볼트들을 짓이겨 다져 놓고 멈춤 없이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굵직한 뇌전이 요동치는 그녀의 긴 채찍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휘몰아 무서운 속도로 공기를 갈랐다.
-휘릭!
-빠악!-우지직-지지직···
그 순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강렬한 섬광이 균열의 근방을 광범위로 뒤덮고, 그 뒤를 이어 요란한 벽력이 귀청을 때렸다.
-콰앙!
뿌연 연기가 쾌쾌한 고기타는 냄새를 풍기며 사방으로 분산됐다.
그 전격 한방으로 홉고블린 주술사무리들이 순식간에 숫덩이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쉴드 주술과 지휘체계를 잃은 고블린과 코볼트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늦추지 말고 승기를 끌어올 때다.
이번엔 그녀의 채찍이 화염을 뿜으며 사방을 내달렸다.
-크에에엑
-케륵!
고블린과 코볼트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균열을 중심으로 후방이 무너지니 앞서 나가 있던 전방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중장을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화염 발사해!”
부관이 그의 명령을 받아 확성기로 복명복창했다.
“화염 발사!”
지금껏 알 수 없는 벽에 막혀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화염발사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지금까지 주술사 홉고블린들의 쉴드에 막혀 제 구실을 못하던 화염이 기세 좋게 고블린들을 직격하면서 공세의 활로가 열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후방을 무너트리는 것으로 전방을 압박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폐급으로 명시된 균열에 오크는 없었다.
그래도 역시 육탄전은 현대전 전술 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익숙하지 않은 백병전의 양상이 초반 교전을 어렵게 했다.
때문에 한동안 수세에 몰렸던 병사들이 전투에 익숙해지고, 사기가 오르자 서서히 전진하며 울분을 풀 듯이 고블린들을 죽여 나갔다.
그런 가운데 이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봐야 할···
“꾸웨에에엑!···”
사방으로 질주하는 돼지의 모습이 점차 균열에 가까워졌을 무렵 남아있는 몬스터들은 시체들 뿐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한나절 동안 이어진 육탄전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김중장이 부관을 불렸다.
“신대위,”
“네. 사령관님.”
“수고했다. 지금 즉시 전사자와 부상자를 파악하고 통신선 신속하게 복구하도록 전달해.”
“네 바로 하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작전과장···”
그렇게 부대 재정비를 위한 지시를 내릴 무렵,
-다각-다각-다각···
“정지!”
커다란 돼지가 김태원 중장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다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의 제지를 받고 멈춰 섰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를 경계할 일이 아니었다.
“신대위, 저분을 안으로 모셔.”
“네 사령관님.”
제지가 풀리고 전장에서 그렇게 날렵했던 돼지가 천천히 걸어와 멈췄다.
그 위에 타고 있는 젊은 여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 아니, 고생 많으세요. 장군님, 저는 조민가문의 고용인 송희재라고 합니다.”
김중장은 눈앞에 벌어지는 이 기괴한 장면이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어···아 네, 수도경비사령부의 김태원 중장입니다. 정말 대단한 활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민가문이면···”
김중장이 아는 상식에 조민 가문이라는 건 대한민국에 없다.
그의 반응에 송희재는 비그에게서 내려오며
“어머! 미처 신경 못 썼네요. 그럼 JM재단의 조민시안 대표라면 아실 것 같군요. 저는 그분의 지시로 이곳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김태원 중장은 다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JM재단이···?”
참군인은 역시 사제인간에게 그닥 관심이 없었다.
***
같은 시간,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역삼역 주변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스팔트가 용암처럼 붉게 끓을 정도로 뜨거운 지옥의 염화는 주변의 모든 것을 녹일 듯 거세게 타올랐다.
“이거 맞아?”
요안나 파치슈바벤은 자신이 벌인 일을 되묻고 있는 상황,
프레이야가 초대해준 폴크방 앞마당에서 연습을 그렇게 많이 했어도 그녀에게 마법이란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문제는 힘 조절,
분명히 1단을 넣고 날리면 결과는 3단이었다.
그런 결과에 자신은 실망을 하는데, 정작 프레이야는 박수를 치며 천재 소리를 연발했었다.
요안나는 과격한 걸 좋아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아무리 익숙치 않아 생소한 마법이라도 귀족으로서 남들 앞에 보여져야 할 부드럽고 섬세함이 너무나 아쉬웠다.
오늘 시안의 통신을 받고 기꺼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섰다.
이원웅 중장이라는 군단의 사령관은 처음부터 자신을 멀리했다.
그런 와중에 오크들에 의해 한국 군병력들이 상당수 전사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군사령관 이중장에게 병력을 뒤로 잠시 물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것도 작용했지만, 어린년이 군 작전에 끼어든 것이 고까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그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때문에 그녀는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균열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안에 꺼지지 않는 염화를 질러 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힘조절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홧김에 제대로 저질렀다.
아스팔트가 용암처럼 일어나 지글거리는 소리도 끔찍한 지옥의 염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문제는 균열에서 나와야 할 놈들이 열기 때문에 머뭇거린다는 것이다.
균열에서 떠밀려 나온 것들은 여지없이 숫덩이가 되었지만, 염화의 열기 때문에 나오려던 놈들은 여전히 안에서 대기 중이었다.
균열의 정보를 보면 고블린과 코볼트들은 이미 나왔고 오크가 나올 때, 그녀가 시전한 염화는 60~70의 오크만을 태워버린 것으로 나머지 430가량의 오크는 여전히 균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냥 끄자니 튀어나올 오크가 만만치 않고, 두자니 사고다.
곁에 있던 집사장 로렌조 코스타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대로 그냥 놔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가요? 그래야 하는 이유는?”
요안나가 되묻자 로렌조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야 조민 가주님이 이곳에 한번 들리지 않겠습니까. 저거 해결하려고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요안나가 무릎을 탁 쳤다.
“굿!”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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