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새로운 가족
눈을 뜨자 병원이었다. 누군가 가슴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으, 으. 저기.”
김혁의 기척에 몸을 일으킨 여자는 서정이었다.
“어? 오빠! 오빠? 저기요?”
서정은 호출벨을 누르고 질문을 되풀이하고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정신 들어? 내가 보여? 나 누군지 알겠어?”
“왜 그래? 서정, 너 이상해졌다. 얌전하던 서정이 왜 이래, 안 어울리게.”
“아, 정말 깨났어. 아!”
서정이 와락 껴안는 바람에 얼떨결에 안기고 말았다. 응? 이 물컹한 것이...하! 으음. 좀 더 그렇게 있고 싶었으나 의료진들이 다가온 바람에 서정은 멀찍이 떨어졌다. 좋다 말았다.
김혁은 한동안 의료진들의 실험쥐처럼 몸을 맡기고 있어야 했다. 눈꺼플도 까뒤집히고 손발도 만져지고 꼬집히고 팔을 들어봐라 다리를 들어봐라... 그리고는 정상이라고 판정 받았다.
내가 언제는 정상이 아니었단 말이야?
창밖 나무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서정을 구하려고 원장방으로 뛰어들던 때가 꽃봉오리가 막 맺히던 즈음이었는데 그다지 시간은 많이 안 지난 듯 했다. 뭔가 스펙타클하고 긴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다. 정말 생생한 꿈이었다. 저승사자가 되었었지. 출생의 비밀도 알게 되고 ... 한편의 영화 같은 꿈. 평소에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꿈도 재밌게 꾸네 참.
“며칠동안 누워 있었어, 나?”
“1년 지났어. 지난 봄부터 쭉 의식불명 환자였어.”
“뭐?”
옆 침대에서 아저씨가 ‘하늘이 도왔지 도왔어.’ 하고 말했다.
서정이 작게 소곤거렸다.
“저 아저씨는 평소에도 하늘이 도왔다고 맨날 그래.”
응? 뭔가 기시감이...
“거울 좀 줘봐.”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조금 헬쓱해졌을 뿐 1년 전이나 별다를 게 없었다. 서정이 정성들여 간호를 한 덕분인지 얼굴도 깔끔한 편이었다.
평소에는 옆에도 못 오게 하던 서정이 아까부터 계속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모든 게 낯설다.
“어디 아프거나 이상한 데는 없어?”
“음 아픈 데는 없... 아 여기가 아파.”
“어디?”
“여기 얼굴에 감각이 없는 것 같아. 좀 만져볼래?”
서정이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 좋다. 난 전생에 강아지였나? 왜 이렇게 쓰다듬어 주는 게 좋지? 구복남 할머니의 주름진 손보다 훨씬 부드러운 서정의 손길이 쓰다듬으니 더 좋은 게 영원히 멈추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도.”
다른 데를 가리키니 서정이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운다. ... 우히히, 참다 참다 웃어버리고 말았다.
“장난 좀 그만쳐. 정말 놀랬잖아.”
“좋아서 그러지. 참, 근데 너 학교는 학교는 안 가?”
“음. 쉬고 있어.”
“왜! 나 땜에?”
“공부하고 있으니까 걱정마, 아, 나 가족도 찾았어.”
화제를 재빨리 돌려버리는 서정.
“정말? 어떻게?”
“기적 같은 일이지.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고 그러다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오랫동안 날 찾고 있었대. 나한테 쌍둥이 동생이 있었던 거 있지.”
“정말? 너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어?”
“아니 이란성. 남동생이야.”
“뭐? 남동생이라고?”
“응 그렇지 않아도 올 때가 됐는데 오늘 한번 오겠다고 했거든. 새로운 책도 갖다 줄 겸. 금방 올 거야.”
와 1년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구나. 지옥 꿈을 꾸는 동안 1년이 훌쩍 흘러가버리고 서정은 꿈에 그리던 가족을 찾고 1년 내내 이런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때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평범한 느낌의 고등학생 또래의 남자애가 병실입구에 들어서며 서정에게 아는 체를 한다
“누나!”
“응, 왔어? 봐. 깨났어.”
“정말? 정말?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는 거였어? 어디.”
남학생은 신기한 일을 구경하는 것 같은 얼굴로 김혁 쪽으로 다가들었다. 서정이랑 닮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아이다. 근데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어디서...
“야, 우리 누나가 지극 정성을 보여서 하늘이 감동했나보다. 정말 잘됐다. 누나. 안녕하세요. 저는 서진수라고 합니다.”
서진수? 진수? 설마 그 진수는 아니겠지? 얼굴이 안 닮았는데 그 마르고 누렇고 작은 아이와는 딴판인데 살도 적당하고 키도 제법 크고 혈색도 좋은 녀석이다.
대답도 없이 자신을 의심쩍은 눈초리로 훑어보기만 하는 김혁이 불편했는지 서정에게 급하게 말을 거는 남학생.
“어? 이제 이런 책은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이 형은 만화책밖에 안 읽는다고 했잖아.”
“뭐? 내가 만화책만 읽는다고 말했어?”
살짝 당황해서 남학생을 나무라는 서정.
“그런 얘기는 우리끼리 하자. 진수야 쫌. 뭐, 사실이잖아. 그동안 내가 오빠 마음의 양식을 위해서 숱하게 읽어준 명작들이 제발 뼈가 되고 살이 됐으면 할 뿐이고.”
둘러보니 옆 협탁 위에 책 몇 권이 놓여 있긴 하다. <어린왕자>, <백경>. <갈매기의 꿈>. 어린왕자는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백경이니 갈매기의 꿈이니는 처음 보는 책들이다.
“이걸 다 읽어줬어?”
“응.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우리 누나가 얼마나 열심히 읽어줬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두 번, 세 번, 지겨워서도 그렇게는 못 읽을 텐데. 와, 그 열성 대단해요.”
서진수란 아이는 천성이 밝은 아이인 듯 보인다. 그 쓰레기방에 검푸른 오라를 드리우고 있던 아이랑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많이 들려주고 하면 의식이 깨어날 수도 있다고 해서 그런 거지.”
“갈매기의 꿈이랑 백경은 무슨 내용인데?”
진수가 서정보다 먼저 끼어들었다.
“내가 말해줄게.. 백경은 에이헙이라는 선장이 흰고래를 잡기 위해서 망당대해를 누비면서 쫒아다니는 내용인데요. 그게 ....”
“아 진수야. 그런 긴 얘기는 지금 막 깨어난 사람한텐 좀 무리일 것 같은데?”
망망대해를 누빈다고?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떠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태양을 향해서 날아갔었지. 끝없이 끝없이 그리고 바다 위 ....
“알았어. 짧게 할게. 갈매기의 꿈은 무리에서 추방된 갈매기가 초월의 경지에 이르러서 고도의 비행술을 연마하고 나중에 다른 갈매기들을 교육시키는 갈매기가 된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갈매기, 하늘을 날아다닌다, 초월의 경지? ... 확실히 이 책들이 내 꿈에 영향을 주긴 했던 모양이다. 내가 그런 파란만장한 꿈을 꾼 게 다 이런 이야기들 덕분이라는 건가?
“책을 얼마나 읽어준 거야? 서정.”
“응, 글쎄. 일주일에 두세권쯤이니까...”
“뭐? 그렇게나 많이?”
“내가 경험이 없잖아. 책밖에 들려줄게 더 있어?”
“교과서도 읽어줬어요.”
“야!!”
서정이 진수에게 소리쳤다. 진수는 싱글거리기만 한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