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화 인형의집(2)
진소영은 화장을 완벽하게 마치고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이리저리 살펴가며 화장 상태를 점검했다. 화장대에서 일어서는 진소영, 정말 영화배우답다. 자태며 치장이며 걸음걸이까지 우아하다.
저런 모습을 영화 속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왜 그렇게 빨리 은퇴를 했을까? 좀 더 영화 속에서 늙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요즘은 50대 여배우들도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만큼 젊음을 과시하기만 하던데 아무리 봐도 너무 빨리 은퇴를 한 것 같다.
진소영은 주방에서 큰 유리잔에 물 한컵을 따라 가지고 침실로 다시 들어왔다. 협탁 서랍에서 꺼내든 것은 약병이었다. 진소영은 침대에 반듯하게 앉아 약병에 든 알약을 손에 수북하게 담았다.
응? 뭐하는 거지?
진소영은 한알을 먹고 물 한모금을 마시고 또 한알을 먹고 물 한모금 그런 식으로 계속 알약을 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먹다간 손 안에 든 것을 다 먹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잠시 손 안에 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냐 저거. 수면제인가? 김혁은 그제서야 진소영의 뜻이 뭔지를 알아챘다. 진소영의 오라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벌써부터 오라가 검게 물들어 있었을 텐데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보고 있지 못했던 것이리라.
김혁은 얼른 다가가 진소영의 손을 탁 쳤다. 알약들이 공중으로 낱낱이 흩어지며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이상한 힘에 의해 알약들을 놓쳐 버리고 진소영은 어리둥절한 채 바닥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침실에 모습을 드러낸 낯선 남자를 보고 진소영은 깜짝 놀랐다.
“누,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진소영은 공포에 떨며 김혁을 바라보았다.
“이건 뭐죠?”
김혁은 알약들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는데 진소영은 엉뚱한 상상중인지 공포에 질려 딴 소리를 한다.
“설마 남편이, 당신 킬러에요?”
“뭐라고요?”
혹시 영화 찍는 걸로 착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현실에서 킬러 따위가 있을...리가... 있을.... 수도 있으려나?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
진소영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제발 울지 좀 말라고 왜들 우는 거야 대체, 내가 뭘 어쨌는데 나만 보면 다 울고 그러냐고.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을 하시고 진소영씨. 영화배우 진소영씨 맞죠?”
“그럼 누구, 배우에요? 남의 침실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진소영이 큰 눈을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주룩 흘렀다.
“아 저 배우 아니고요. 그러니까...”
“당장 나가요. 남편이 보면 안돼요. 어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주명석이 사나운 얼굴로 들어왔다.
“아니, 뭐야? 이제 침실에까지 남자를 끌어들여? 너 간이 배밖으로 나왔어? 넌 뭐야, 이 자식아. 이것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졸지에 유부녀와 바람피우다 들킨 놈팽이가 돼버렸다. 이게 뭐냐 대체, 저승사자 체면이 말이 아니다. 진소영은 당황한 목소리로 재빨리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나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당신 손님인 줄 알았어, 나는.”
“아니 화장까지 하고 어디서 거짓말이야? 이년이.”
진소영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주명석의 손을 김혁이 막았다.
“뭐하는 겁니까? 지금.”
“이 자식 안 놔? 주거 침입에다가 너 오늘 잘 걸렸어. 내가 그렇지 않아도 어떤 놈인가 잡히기만 하면 아작을 내주려고 했지.”
진소영이 무슨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던 걸까? 진소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은 얼굴이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어떤 놈은 또 뭐고.”
진소영은 정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너 같은 여자들이 어떤지 잘 알아.”
“정말 왜 그래요 또! 대체 어떻게 해야 믿나요? 네?”
주명석이 진소영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김혁이 팔을 붙잡았다.
“이거 안 놔? 이 자식. 아악.”
격렬하게 뿌리치려 하기에 팔을 비틀자 주명석이 소리를 질렀다. 주명석의 팔에서 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뭐, 뭐야? 년놈이 짜고 날 죽이려고 작정했어? 내가 그럴 줄 알고 여기 CCTV랑 다 달아놨어. 촬영도 다 했고 벌써 경찰도 불렀지. 나한테 해코지 하면 너희 둘 다 콩밥이야. 알아?”
“CCTV라뇨? 그게 무슨, 그럼 계속 절 감시한 거예요? 정말....”
진소영은 어이가 없는 건지 절망한 건지 힘이 없어 보였다.
“너 같이 헤픈년을 내가 어떻게 믿어. 보라고 이렇게 남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남자를 집안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해? 어?”
“나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나 죽이려고 고용한 거잖아요.”
진소영도 소리를 빽 질렀다.
“어디서 되도 않게 발뺌이야? 내가 미쳤어? 그런 짓을 하게? 증거만 잡으면 자동 이혼인데.”
이 사람들 부부는 맞는 건가? 함께 살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김혁도 어이가 없었다.
“그냥 이혼하자고 하면 되잖아. 왜 이렇게 더러운 짓을 해. 정말.”
진소영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영화일도 하지 말래서 은퇴하고 친구들도 안 만나고 집밖에도 안 나가고 있는데 대체 내가 뭘 어떻게 더 해? 어떻게! 차라리 나를 죽여 그럴바엔. 흑흑!”
“지 남자 앞이라고 큰 소리도 치네? 이게.”
“저기.”
김혁이 끼어들어 보려 했지만 주명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여? 이만큼 살게 해준 게 누군데 어디서 딴짓거리야. 위자료 같은 건 받을 생각 꿈도 꾸지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자꾸 ... 당신은 누구야?”
진소영은 억울하기도 하지만 이 낯선 남자가 누군지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말 할 기회가 온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김혁이 대답했다.
“나? 저승사자.”
진소영은 애써 한 화장이 다 얼룩진 얼굴로, 주명석은 비틀려 아픈 한쪽 팔을 감싸쥔 채 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 말을 먼저 좀 들으라고 둘 다. 내가 저승사잔데 말이야.”
“오호, 뭐냐 너? 어디서 연기 좀 배웠냐? 야 진소영, 정신차려. 이런 날건달들이 널 좋아서 만나겠어? 뭐라도 뜯어먹을려고 만나는 거지. 아직도 그렇게 몰라? 이래서 골빈년들은 안 된다니까.”
아니 이 인간은 왜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건지, 진실을 들을 귀가 없는 인간만큼 답답한 존재도 없다.
“아니, 이것 봐. 내가 저승사자라고, 저승사자.”
김혁은 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가 나타나게 만들었다. 그래도 부부는 무슨 일인가 눈치를 못 챈 듯 보였다. 한번 더 몸을 사라지게 만들고 멀찍이 떨어진 데서 몸을 나타나게 만들었다. 그제야 주명석이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반면에 진소영은 눈꺼플이 무거운지 느리게 깜박이더니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앗, 아까 수면제를 몇 알 집어 먹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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