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그 바닷가에서는 무슨 일이(2)
[김만재. 남자. XX시(바닷가 도시), 51세. 무직]
종이 위 이름에 손을 대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한 집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시각이다. 낡디 낡아 쓰러져 가는 작은 집. 칠이 벗겨진 초록색 대문이 반쯤 열려 있다. 조그만 마당에는 아무도 없고 방안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뭉텅이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살림살이가 깨어지는 소리, 난폭한 남자의 고함소리. 여자의 짧은 비명소리와 뒤섞인 아이들의 울음소리.
후, 이번엔 난봉꾼인가? 세상엔 참 자신이 괴물인 줄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저승사자가 되고서야 알았다. 검은 오라의 물결. 변태들의 천국. 지옥을 능가하는 이 세상.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검은빛에 물든 오라를 갖고 지나쳐 가곤 했다. 그 모두에 일일이 간섭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흔하디 흔했다.
김혁은 그 집 담벼락에 기대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엉망진창일 집안의 싸움까지 구경하고 싶진 않았다. 동네 여자 둘이 지나가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집은 또 시끄럽네.”
“허군헌날인데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정식이 엄마도 참 대단하지? 어떻게 사나 몰라. 도박에 미쳐 날뛰는 인간을 누가 감당해? 쯔쯧.”
“그럼 어째, 애가 둘이나 있는데 애들 땜에 사는 거지. 맨날 멍들어서 돈 꾸러 다니는 거 보면 불쌍은 한데, 에휴.”
두 여자는 딱하다는 표정을 가득 담고 지나쳐 갔다.
집에선 갑자기 문이 열리고 겁에 질린 아이들이 쪼르륵 달려 나왔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쳐나가 황급히 도망쳤다. 열린 문으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헝크러진 머리를 한 여자가 보였다.
“애들을 왜 때려? 날 쳐라, 나를.”
“아니, 이년이 못 놔?”
김혁은 아이들을 찾아보았다. 어느 집 뒤안에 옹송그리고 있는 두 아이.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어린 남자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꼭 껴안듯이 하고 머리를 파묻은 채 떨고 있었다.
김혁은 그 아이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게 가슴 아팠다.
'그래, 내가 저 남자를 데리고 간다면 이들은 그나마 평온하게는 살겠지,'
처음으로 저승사자가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까지 들었다. 김혁은 다시 남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곧 문을 박차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며 남자가 튀어나왔다.
“여편네가 집구석에 돈 한푼 없다는 게 말이 돼?”
챙 있는 모자에 주머니가 덕지덕지 달린 조끼를 입은 남자는 등산화 같은 걸 우겨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간으로 성큼 성큼 걸어 나왔다. 호리호리하고 크지 않은 키에 약간 사납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오라는 핏빛이 도는 검은색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두워져 오는 도로 쪽으로 나갔다. 김혁은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도심지에선 약간 떨어져 있는 곳이라 차들의 통행이 그리 많지 않은 2차선 도로였다. 도로가를 걷고 있는 남자 외에는 인적도 끊겨 있다. 멀리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김만재.”
김혁은 크게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남자가 돌아보았다.
“누구요? 누군데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당신이 김만재요?”
“누구냐니까?”
김만재는 대뜸 짜증스럽게 소리부터 질러 놓고는 김혁이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목소리에 힘을 빼고 다급함을 담아 말했다.
“아, 그 돈은 아직 기한이 남았을 텐데 정사장한테 내가 얘기를 했는데 ..... 알았다고 했다고. 전화해봐. 분명히 정사장이 알았다고 했어.”
남자의 눈에 살짝 공포가 어렸지만 그건 아마도 다른 존재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나는.... ”
김혁이 채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남자를 낚아채듯 치고 갔다. 저만치 나동그라지는 김만재.
뭐, 뭐지?
끼이익, 기분 나쁜 소음을 그으며 승용차는 좀 더 가서 멈춰 섰다. 아직 완전히 깜깜하지도 않은데 멀쩡히 도로가에 서 있던 사람을 치다니 무슨 일일까?
가만히 서 있던 승용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승용차는 그냥 달려가기 시작했다.
뺑소니?
김혁이 샛길이 꺽어지는 쪽에서 아직 도로가까지 다가가지 않은 시점이어서 아마도 승용차 운전자가 김혁을 못 본 모양이었다. 목격자가 없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김만재한테 가보니 의식도 있고 아주 심하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았다. 저 놈 먼저 잡아야겠군. 김혁은 승용차를 향해 날아갔다.
승용차 안에 타보니 운전석에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수석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차내는 그들의 검붉은색 오라로 물들어 있고 공포의 냄새와 정염의 냄새가 뒤섞여 혼탁한 분위기였다.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많이 안 다쳤을지도 몰라. 돌아가자 오빠.”
“니가 운전 안 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목격자도 없잖아. 이런 시골에 오늘 여기 있었던 거 와이프가 알면 난 끝장이야. 나 이혼당하는 꼴 보고 싶어? 알잖아, 우리 장인 성격. 회사서도 쫒겨나고 알거지 되면 합의금이니 뭐니, 난 감당 못해. 안돼 안돼.”
“그래도 뺑소니는....”
“아 씨X, 조용히 좀 하라니까. 벌써 이만큼 왔잖아. 나더러 어쩌라고. 그러니까 니가 그 난리만 안 피웠어도 이런 일 없잖아.”
남자의 가시 돋힌 말에 이어 여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친다.
“오빠도 좋아했잖아. 이런 거 해보고 싶다고 한 게 누군데?”
늬들 달리는 차 안에서 대체 무슨 짓거리들을 한 거냐? 무슨 짓거리를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제발 운정 중엔 운전만 해라. 쫌.
“아우."
남자는 분을 못 이기는지 핸들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냥 지나가던 차였다고 하면서 병원만 실어다 주자. 응?”
여자가 다시 목소리를 누구러뜨리고 남자를 설득하려고 한다.
“결국 들켜. 인생 조질 일 있어?”
남자는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는 듯 단호하다. 김혁은 길바닥에 피흘리는 사람을 뉘여 놓고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될 듯하여 끼어들기로 했다.
“저기, 사랑 싸움은 나중에 하고 말이지.”
갑자기 뒷좌석에서 들리는 웬 남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기겁을 하고 돌아보았다. 여자는 꺄악, 비명을 내지르고 차는 찌우뚱 흔들렸다. 운전하던 남자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또 한번 끼이익, 기분 나쁜 소음이 공기를 갈랐다.
“누, 누군데 거기...”
남자는 김혁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백미러로 흘끔거리고는 물었다.
“지금 댁들이 나를 불렀어. 한 남자가 죽어가더라고.”
“무, 무슨 말인지...”
“저기 도로 위에 말이야.”
김혁이 뒤쪽 도로를 가리키자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김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그냥 그 사람만 데려가려다가 젊은 두 청춘이 불쌍해서 경고해주려고 왔어.”
“네?”
여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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