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우리는 모두 외톨이(3)
“진수라고 하던데?”
진수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표정이 환해지며 웃는 얼굴로 변한다. 그 얼굴은 좀 낯이 익다고 김혁은 생각했다.
“아, 드디어 나한테도 악마가 손을 내미는 건가요?”
“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거요. 내가 너에게 재능을 줄 테니 니 영혼을 팔아라 그거.”
진짜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전 꿈과 현실은 구분할 줄 알아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전 영혼이 없다고 단정 짓지 않아요. 죽으면 귀신이 될 수도 있고 또 천사나 메피스토 같은 악마도 있을 수 있죠. 그렇다면 영혼을 파는 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겠어요? 전 세상의 소설이나 전설이 전부 거짓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저승사자도 말문이 막히게 하는 아이다.
“ ..... ”
“그러니까 내 영혼을 사면 뭘 주실 건가요?”
“난 그런 거 안 사.”
“그럼요?”
“난 영혼을 거둬가지.”
“에? .... 아, 그럼 결국 내가 죽는 거군요. 난 또 메피스토가 내 작가적 재능을 업시켜 주러 온 줄 알았는데.”
진수는 정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다.
“메 뭐? 넌 안 무섭냐? 이렇게 사람도 아닌 것이 공중에 떠 있고 영혼을 거둬간다고 하는데 무슨 반응이 그래?”
“이렇게 사는 건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하세요?”
되려 큰소리다. 이거 참 이상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말야. 내가 할 소리지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뭐 저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전 이런 삶을 살기 시작한 것뿐이에요.”
이건 또 뭔 소린지, 철학하는 꼬마를 만나 미치게 되는 저승사자도 있을 수 있으려나?
“방에서 안 나간다지?”
“사람들은 절 안 좋아해요. 저도 그들을 안 좋아하긴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이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그렇긴 한데 그건 뭐 그러거나 말거나 하면 되지. 뭔가 다른게 더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학교도 안 가고?”
“그까짓 거 시시해요. 다 아는 얘긴데 듣고 있는 것도 짜증나고.”
“다 안다고?”
정말 다 알아서 저렇게 말하는 건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검정고시 칠거예요. 3년이나 시간 낭비하느니 전 그 시간에 제 할 일을 하려고요. 물론 이렇게 일찍 죽게 된다니 놀랍긴 하네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이런 걸 소설로 써놓고 죽는다면 그 소설은 대박날 건데 그러면 제 이름이 영원히 남겠죠?”
김혁은 눈까지 반짝이며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아이가 낯설기만 했다. 소설이 뭔데 저렇게 저 아이를 사로잡은 걸까? 어디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진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마치 연극배우처럼 주절이 주절이 떠들기 시작했다.
“악마가 나타나 나는 말했다. 영혼을 사실 건가요? 아, 아니지. 악마가 말했다. 네 영혼을 거두러 왔다. 그날밤 나는, 이렇게 시작하면.... 혹시 이름이 있나요?”
“얘가 진짜 ....”
김혁이 뭐라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겠다는 듯이 이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하는 진수.
쟨 뭐냐 진짜! 서정보다도 더 이해 불가한 존재가 있다니. 세상엔 정말 다양한 별별 인간이 다 존재하는구나!
새삼 김혁은 놀라고 있었다. 말을 더 시켜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진수는 키보드를 두들기느라 정신이 없다. 정말 악마를 주인공으로 한 대단한 소설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낼 기세다.
김혁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왜요?”
창문 소리에 진수가 돌아본다.
“넌 이 냄새를 어떻게 견디냐? 날도 더워죽겠는데 문도 안 열고.”
“무슨 냄새요? 전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진수는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이 지독한 악취가 아무 냄새도 아니라고?
“코가 막혔냐?”
“글쎄, 축농증이라던가? 아마 그럴 걸요.”
“아 내가 미쳐. 할, 아니 엄마는, 엄마는 이 방을 치우려고도 안해?”
“사실 엄마 못 들어오게 하려고 이렇게 널려놓은 거예요.”
“뭐라고? 그건 또 뭔 말이야?”
“난 엄마가 싫거든요.”
진수는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왜? 엄마는 너만 끔찍이 생각하던데.”
“그럴까요?”
점점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한다. 이 집안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족들이 다 이 모양인 걸까? 할머니는 손주를 자기 아들로 키우고 애 엄마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도 않고 애는 수다쟁이 히키코모리라니.
“너 아빠는 어디 계시냐?”
“아빠요? 음, 태어날 때부터 없었는데요.”
“그래? 흠, 누나는 언제 집을 나간 거야?”
진수의 눈꺼플이 살짝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의 오라도 좀 더 짙푸르게 물들었다.
“뭐 꽤 오래 됐어요. 한 7년 넘은 것 같은데 음, 누굴 찾아다니고 있대요.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제 생각엔 누나도 엄마가 싫어서 그냥 집을 나간 것 같아요.”
“연락도 안하고?”
“네.”
하지만 진수의 얼굴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서둘러 다시 키보드를 치기 시작하는 모습이 좀 어색하다. 할머니 모르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건가? 설마 엄마가 할머니인 것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김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3층 아래 세상은 고요했다.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새벽을 깨우는 키보드 소리만이 나직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엄마가 싫어서 쓰레기를 방안 가득 널려 놓았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할머니의 말과는 다르게 할머니가 생각하는 진수와 원래 진수는 다른 아이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그 반댄가? 어젯밤에 본 할머니가 원래는 그렇게 친절하고 따뜻한 할머니가 아니라면? 어떤 일들로 인해 할머니가 이 아이를 여기다 가둔 꼴이 된 거라면? 그 내막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래도 이 아이가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엄청 헷갈린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고 반가워하다니, 소설이 유명해지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라니 ... 저승사자를 앞에 놓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수를 본다. 악마 같은 건 만난 적도 없다는 얼굴로 모니터만 바라보는 진수의 얼굴은 여태껏 만난 이들과는 정말 다른 것이었다. 그게 뭔지는 아마 오랫동안 모를 것 같았다.
저승사자임을 알고 나면 으레껏 풍기게 되는 그 흔한 공포의 냄새도 거의 없고 반응도 예상과는 늘 다르다. 방의 악취 때문에 공포의 냄새를 못 맡은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진수는 정말 악마든 귀신이든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런 존재를 만나게 돼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 할 상대가 생겨서 기쁜 것일까? 정말 이해불가다.
고개를 가로젓던 악마가 떠올랐다. 아직 어리구만, 그래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이 어리다는 다른 말이라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악마의 이름이라, 악마도 이름이 있을 수 있단 생각을 왜 못했지? 지옥에서 자신을 반기는 그 새빨간 덩어리에게 이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 확실히 머리 좋은 애들은 뭔가 생각하는 게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오늘은 저들을 관찰해봐야겠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한다. 빛과 함께 김혁도 모습을 감췄다. 김혁이 사라지든 말든 진수는 여전히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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