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그 바닷가에서는 무슨 일이(8)
“맥주 안 마실 거면 김 다 빠지기 전에 내가 마실게요.”
여자가 자신이 마시던 캔을 흔들어 보더니 김혁의 맥주를 가리켰다.
“아, 네.”
여자에게 마개만 딴 채로 그대로인 맥주캔을 건넸다.
“나이 드니까 술만 늘어 하하. 옛날에는 정말 술 못 먹었거든요. 아, 그래도 누군가하고 얘기를 좀 하고 났더니 속이 시원하다. 진짜 진짜 고마워요.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내 영혼의 치료사기도 해요. 이 은혜를 뭘로 다 갚아야 하나... 끄억, 어머나 이런 실수를...”
하하, 여자가 트림한 것이 민망해서 웃음을 터뜨리자 김혁도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달은 여전히 밝았다. 미세한 표정까지 그대로 보였다.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다.
그냥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표현하면 대화가 되는구나. 대화하는 법을 조금 배운 느낌이었다.
여자는 혼자서 맥주 네 캔을 다 비울 동안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 풀어놓았다.
공부시간 쪼개서 주말에만 잠깐 만날 수 있고 그래서 더 애틋하고 못 견디겠는데도 참아야 하는 인내를 요구하는 사랑. 시험기간에는 못 만나기도 하고 전화 통화만 하면서 그리움을 달래고 만나고 싶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하는 그런 사랑. 요약 노트 만들어주고 도시락 싸다 주고 고시원 냉장고에 반찬 만들어다 채워 넣고 하는 우렁각시 같은 사랑이었다. 그 여자가 한 사랑은.
범생이들은 그런 식으로 사랑을 한다는 걸 김혁은 처음 알았다. 듣고 보니 정말 별것 없는 사랑이야기였다. 하지만 듣고 보니 거의 고행 수준인데 그 끝이 이렇다면 좀 억울할 것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란 게 원래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도 사랑이고 이 여자가 한 것도 사랑이고 그 고시생 남친이 한 것도 사랑일 거다.
다만 언젠가는 식어버리고 다른 대상을 찾고 그렇게 배신하고 상처 입히고 그런 것이 사랑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저 갈게요. 너무 떠들어댔네.”
여자는 일어설 때부터 약간 중심을 못 잡는 느낌이더니 결국 얼마 못 가 다리 한쪽이 꼬이더니 모래사장에 푹 고꾸러졌다.
김혁은 얼른 다가가 일으켜 줬다. 성숙한 여자의 몸과 이렇게 가깝게 맞닿은 것이 처음이라 난감하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것.
“아, 괜찮은데.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가봐요.”
다리에 힘이 없는 건지 여전히 걸음은 불안하고 또 얼마 못가 넘어질 것만 같아서 쉽사리 팔을 놓을 수가 없다. 정말 술을 못하는데 많이 마신 건가, 아니면 설마 술 취한 척 하는 건 아니겠지? 만화에 보면 남자를 꼬시는 여자들의 그런 수법이 가끔 나왔다.
“머무는 데가 어딘가요?”
“아,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제가 불안해서 그럽니다. 물에서 건져 놨더니 도로에 헤딩하고 죽으면 안 되잖아요.”
“하하하, 진짜 재밌어. 그래요. 그럼. 저기 저 호텔.”
여자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호텔 간판이 보였다.
술취한 여자를 데리고 호텔 입구로 들어가려니 이상하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어색하고 여자의 방까지 가는 내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붉은 오라를 휘감은 연인들이 지나쳐 갈 땐 왜 자신이 부끄러운 느낌이 드는지. 그런 곳에 출입한 게 처음이라선지 그런 곳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여자를 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여자는 자신이 머무는 방 앞에서 멈췄다.
“아, 네. 그럼.”
여자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돌아보았다. 가려는 김혁을 붙잡는 한마디.
“들어올래요?”
허걱. 다 큰 여인네가 남자더러 호텔방에 왜 들어 오라는 거지?
“네? 아, 아니 전 가겠...”
갑작스럽게 김혁의 팔을 잡아끄는 여자의 손은 지금까지 흐느적이던 것과 달리 굳센 의지가 들어가 있었다. 갑자기 여자의 입술이 덮쳐 와 김혁의 입술을 눌렀다. 아, 입술이 원래 이렇게 부드러운 거...
“어, 어... 저기요?”
김혁은 정신을 차리고 여자를 살짝 민다고 밀었는데 여자가 멀찍이 방 가운데까지 밀려나 있었다. 여자도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술을 많이 드셨군요."
김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햇다.
"그냥 오늘만 같이 있어주면 안돼요? 저도 제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그래요. 못 견디겠어요. 혼자 있는 거."
애원하듯 말을 끝내고 고개를 숙이는 여자, 긴 머리가 상체를 덮듯이 앞쪽으로 쓸려 내려왔다. 여자의 회색 오라가 붉은 빛으로 반쯤 물들어 있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그렇게 하면 ....."
"맞아요. 미안해요."
여자가 침대 위에 주저앉으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자신의 여성적 매력이 여전함을 확인받고 싶은 게 아닐까? 김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서정에게 매몰차게 거부당하던 자신도 저 여자와 다르지 않았었다. 서운하고 섭섭하고 화나고 ... 만약 서정이 어떻게 해주면 위로가 될까 상상해 보았다. 칭찬이라도 한마디 하면...
"당신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제 맘속에 정이만 없었으면 저도 거부하지 않을 거예요."
여자가 고개를 들고 김혁을 쳐다보았다.
"정이? 그 여자 이름이 정이인가요?"
"아니. 정. 외자에요."
여자의 얼굴에 슬픔이 어린다.
"아, 정말 그분이 부럽군요. 왜 그 인간은 다른 여자의 유혹을 이렇게 뿌리치지 못했을까요? 나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하고 멋지게, 그게 왜 안 됐을까요?"
여자는 이제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 정말 여자여! 눈물은 제발!!
"잘 모르지만 일평생을 가난하게 살던 남자가 출세길이 확 열린다고 하면 흔들릴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꼭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미끼가 너무 크고 화려한 거였을 거예요. 사람 욕심이란 게 그렇잖아요. 못 가본 길이기도 하고. 익숙한 것보단 새로운 것에 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원래 남자란 본능에 충실한 법이잖습니까"
서정이 보던 인기 드라마를 간간이 본 덕을 여기서 보네. 그럴듯한가? 흠흠.
"그래도 ....그런 걸까요?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그냥 그때는 나 같은 여자가 필요한 거였을 뿐이고 사랑하지는 않았던 게 아닐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미치겠어.“
여자의 오라에 검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김혁은 일단 지금까지 계속 열려 있던 방문을 닫고 방 한켠에 자리를 잡고 섰다. 저런 상태라면 그냥 두고 갔다간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남자 마음이야 그 남자밖에 모르지. 무슨 생각으로 헌신적인 애인을 버릴 생각을 했는지, 어떤 대단한 배경을 가진 여자한테 낙점이 되면 그럴 수 있는지, 혹은 사랑이 식은 다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가 가능한 것일까?
“만약에 말이에요. 그 남자가 의리 때문에 결혼하고 몰래 바람피우는 게 더 나았을까요?”
갑자기 어젯밤 도로에서 뺑소니를 하려던 불륜 커플이 생각나서 해본 말이다.
“뭐라고요?”
“음, 남친이 당신과의 세월 때문에 배신 못하고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당신과 결혼을 하긴 했는데 만약에 몰래 바람을 피우게 된다면 말이에요. 그게 더 나은가요? 아니면 미리 헤어지자고 한 게 나은가요?”
“뭐야, 그럼 결국 날 사랑 안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죠. 5년이면 사랑의 유효기간을 한참 넘긴 시점인데요.”
“공부한다고 자주 만나지도 못했어요. 기간만 그렇게 긴 거지.”
여자는 그것도 억울한가 보았다.
“아무튼 5년이면 사랑이 바닥 날 때도 됐다, 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랑이 아니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해요?”
여자의 오라가 살짝 밝아졌다.
“아무리 치마만 둘러도 좋아하는 게 남자라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하고 5년 동안이나 관계를 유지한다?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요.”
“그렇겠죠?”
여자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다른 사람하고 얼마든지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어요. 잘못한 건 그 사람인데 왜 당신이 죽나요? 그렇게 해도 될 만큼 당신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생은 소중한 겁니다.”
“...”
“...”
“근데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보기엔 어려 보이는데 말하는 건 또 안 그렇네?”
봄에 만난 여학생은 말하는 게 어린 느낌이라고 했는데 뭔가 달라졌나?
“전 나이 따위는 무의미한 존재죠.”
으,왠지 이 말 멋있는 것 같다. 자기가 한 말에 자기 혼자 감탄중인 김혁.
“정말 특이한 것 같아. 그 여자분한테 고백해 보고 차이면 나하고 사귈래요?”
김혁은 쓸쓸히 미소지었다. 서정을 다시 볼 수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김혁이 말이 없자 여자는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무 연상이라 싫구나. 싫겠지.”
빈말이라도 좋지요, 하고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솔직한 게 나을 것 같다. 절망한 여자에게 절망을 더 얹어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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