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바람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1)
계속 걷다보니 언뜻 눈에 스친 인적 드문 골목길 끝에 뭉쳐 있는 검회색 오라. 뭐지?
다시 보니 골목길 끝 담벼락에 매달리듯 서 있는 키작은 중늙은이가 보였다.
뭘 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가보니 담 안쪽 쪽창으로 샤워중인 젊은 여자가 엿보인다.
하, 이 늙은이가 추접스럽게.
김혁은 중늙은이의 뒤통수를 갈겼다. 너무 세게 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쿵. 남자의 대머리진 이마가 담장에 부딪친다.
“아악.”
"악"
중늙은이의 비명 소리가 나고 이어서 욕실 안쪽에서도 젊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창밖의 낯선 남자들을 발견한 여자가 후다닥 거품이 묻은 몸 그대로 욕실에서 빠져나갔다.
중늙은이가 무슨 일인가 해서 돌아보았다. 이마에서 몇 가닥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피비린내와 뒤섞인 공포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김혁은 증강된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여전히 힘 조절이 힘들었다. 힘을 최대한 뺀다고 뺐는데도 이렇다니. 피를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중늙은이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으? 피?”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 떨어지자 중늙은이도 그제서야 이마가 찢어진 것을 인지한 듯 했다.
“어르신, 밤도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셔야죠.”
“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 ”
“잘못하면 저승사자한테 잡혀가요.”
좀 더 혼을 내줄까 하다가 그만두고 김혁은 그냥 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눈앞에서 갑자기 남자가 사라지자 중늙은이는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잠깐 뭔가에 홀렸었나보다고 생각했는지 안도하는 듯 하더니 곧 제 손에 묻은 피를 보고는 겁에 잔뜩 질려 쏜살같이 바로 옆집 대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김혁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걷고 또 걸어 다닐 생각이었다.
어느 공원 옆을 지나칠 때였다. 어디선가 둔탁한 마찰음이 들리고 있었다. 낄낄거리는 웃음과 욕설이 뒤섞인 변성기의 목소리들. 퍽 퍽 뭔가를 두들겨 대는 마찰음이 그치질 않았다.
공원으로 들어서니 멀리 가로등 근처에 한 무리의 교복 차림 남학생들이 둘러싸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학생을 발로 차고 있는 게 보였다.
떼거지로 무리지어서 강한 체 하는 것들은 정말 못 참겠다. 그건 강한 게 아니다. 비겁한 거다. 김혁 안에서 분노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어느 늦은 오후, 시골 중학교의 나른한 교실 안 풍경이 번뜩 떠오른다.
“야 김혁!”
종례시간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 소년에게 다가온 세 아이.
“좋은 말 할 때 형이라고 해라.”
소년은 서 있는 세 소년들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계속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우리 좀 보자 따라 와.”
“뭐 땜에?”
“잠깐 보자고.”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된 때라 서로 서로 이합집산이 가장 심할 때였다. 누구누구와 친구를 맺을 것인가 어떤 아이를 끼워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아이를 희생타로 삼을 것인가를 탐색하는 시기.
여러 시골 마을에서 각각의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한 중학교로 모여들다 보니 서로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더 잘났었는지 인기가 많았었는지 공부를 잘 했었는지 주먹이 셌는지 등을 소문으로 가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세 소년은 중학교가 위치한 동네에 사는 부잣집 아이 이수민과 그 똘마니들이었다. 꼴에 자기 동네가 제일 크다고 더 시골에서 온 아이들을 마음 놓고 무시하는 꼴이 그렇지 않아도 눈꼴시렸던 참이었다.
소년은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학교 뒤쪽 소각장 앞 공터였다. 화장실 쓰레기나 청소 시간에 나오는 각종 쓰레기를 태우는 곳이었다. 아직 다 타지 못한 쓰레기들이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냄새 뒤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장소인지 한켠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먼저 보여 소년은 처음에 얘네들이 장소를 잘못 골랐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학년들은 소년들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를 비벼 끄고 슬며시 다가왔다
“니가 김혁이냐?”
소년은 그들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눈깔 깔아. 이 새꺄. 니가 애들 괴롭히고 그랬다며?”
“안 그랬는데요.”
“하, 그럼 우리가 거짓말 하냐? 앞으로 말이지 얘네들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고학년의 말이 끝나자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우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수민과 똘마니들.
‘형들의 후광으로 교실에서의 자유를 보장받겠다 이건가?’
소년은 다른 애들보다 자신이 좀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괴롭히기 위해서 그 힘을 써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 먼저 시비 걸면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주먹을 쓴 적은 없었다.
깔짝깔짝 약 올리거나 고아원 산다고 무시하면 분노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한 대씩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건 잘못이 아닌가? 때로는 말이 주먹보다 더 아픈 법이다.
이수민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었는지 소년이 꽤나 무서웠던 모양이다. 형들까지 동원할 생각을 하다니.
“난 애들 안 괴롭혀요.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이 자식이.”
고학년 한명이 때리려고 손을 들어 올리자 나머지 한명이 말린다.
“야야, 참아. 그러니까 짜샤, 건드리든 안 건드리든 얘네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뭔 말인지 몰라?”
“.... ”
쉽사리 '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약속을 한다 해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한마디로 이 자리를 모면한다 해도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짐작 가능했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약속은 깨지게 되리라. 그러면 또 불려오고 ...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고학년들과 한바탕 맞짱 뜨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각처에서 모여든 남학생들이 아직 다 파악이 안 된 터라 살짝 두려움이 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갑자기 왼쪽 뺨을 강타한 주먹으로 소년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은 뒤 주먹이 먼저 올라갔다. 이건 소년도 어쩔 수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왜 그런지 누군가 건드리면 참아지지가 않았다.
소년의 주먹이 고학년 한명의 턱을 강타하고부터 고학년들과 소년의 주먹이 얽히고설키고 발길질이 오가고 땅바닥에 처박고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러져 코피를 흘리고 있는 고학년과 바닥에 널브러져 배를 움켜잡고 있는 다른 고학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잔뜩 겁에 질린 이수민과 똘마니들의 눈과 마주쳤다. 그들은 재빨리 소년의 눈길을 피했다.
소년은 그냥 가야 할지 그들이 먼저 도망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고학년들은 쉽사리 도망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차마 도망치는 꼴까지 보이고 싶진 않은 듯 했다. 그래서 소년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어이없게도 그 일로 학교 짱이 됐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 고학년들이 그 당시 학교 짱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무마하기 위해서 김혁의 능력을 엄청나게 부풀려 말한 모양이었다. 학년으로는 두 학년이지만 나이 차이로는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 김혁이란 아이가 엄청 세다면 질 수도 있다, 엄청 부끄러운 건 아니다 뭐 그런 논리.
아무튼 그 이후론 아무도 소년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짱이 될 수도 있다니. 어쩌면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리라.
그날 얼떨결에 고학년들에게 '네' 하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고학년들이 더 셌다면? 또는 학교짱과 먼저 싸우지 않고 또래 애들과 먼저 싸워야 했다면 아마 좀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1년 내내 싸움의 연속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곳 중학교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곳은 소도시와 그 옆에 점점이 자리한 소읍들로 이루어진 곳이라 돈 있고 학업에 신경 쓰는 부모들은 자식들을 멀리 타도시로 유학 보내곤 했다. 그러니 자연히 고등학교까지 남아 있는 아이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고등학교에서도 소년을 건드리는 사람이 없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어느 운좋은 학교 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김혁은 무리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면서 나쁜 짓을 시키거나 괴롭히거나 하며 지내지는 않았었다. 그냥 건드리지 않고 눈치 보는 정도의 뒷자리 형이었을 뿐이지. 오히려 자신이 있는 반은 큰 싸움이나 큰 괴롭힘이 없었던 것도 다 자신 덕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김혁은 우선 두들겨 맞는 아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원의 교복 입은 무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야, 거기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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