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너 자신을 알라
설마. 그런 인간이 내 아버지라고? 내 부모님은 어떤 분들일까 궁금해 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막장일 거라고는 상상해본적도 없었다. 왠지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야. 히히힛!”
“이게 정말.”
김혁은 삼지창을 든 악마 캐릭터로 변신하고 웃어제끼는 악마를 한 대 쥐어패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장난 칠 게 따로 있지. 하지만 또 마음 한켠에서는 깊이 안도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김만재는 ...유상철의 아버지야.”
“....?”
김혁은 잠깐 멍했다. 성도 다르고 둘의 체형이나 그런 게 쉽게 부자간으로 매치가 안된다.
“유상철의 친아버지라고, 김만재가.”
“성이 다르잖아.”
“그거야 김만재 호적에 안 올랐으니까 그렇지. 다른 남자 호적에 올랐다가 버려진 거라서 그래.”
“진짜 상철이형 아버지가 김만재라고?”
“응. 둘이 닮지 않았어? 특히 그 돌아볼 때 찡그리는 얼굴. 난 한번에 알겠던데?”
그러고 보니 도로에서 어두워서 그랬지. 그 짧은 순간 뭔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있긴 있었다. 듣고 보니 정말 닮았다. 한쪽은 말랐고 한쪽은 딴딴하고 덩치가 큰 느낌이라 잘 매치가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 하고 보면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야, 그럼 상철이형이....”
병원에서 버럭 소리지르던 상철이형과 움츠려 있던 김만재가 떠올랐다.
“그래서 인연이란 묘한 거지. 돌고 돌아 어디서 만날지 알 수 없거든. 자업자득이랄 수도 있고.”
이런 걸 정말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건가? 근데 진짜 그런 거면 상철이형 너무 불쌍하잖아. 영원히 모를테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설마 나도 어디선가 내 부모님을 만났는데 못 알아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저... 내 부모님은 어딨어? 혹시 내가 만난 적이 있어?”
“아니 없어”
“그럼?”
“그건 비밀이야. 아직은 말해줄 수 없어. 너 하는 거 봐서 말해줄 거야. 넌 너무 느려터져서 말이야. 알고 싶으면 속도를 좀 높이라고.”
“으 저게 정말.”
별걸 다 가지고 거래를 하려 드네. 정말 얄미워 죽겠다.
그때 뒤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김만재, 아직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왜 이래?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인 것 같아? 야, 나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천하의 김만재를 누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악마에게 끌려가는 김만재의 뒷모습에서 상철이형의 먼 미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 건 단순히 악마가 들려준 말을 들은 다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사는 삶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정말 지옥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면 김만재에게 유상철이 자신의 아들임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응 걱정마. 죄를 태우다 보면 자연히 알게 돼 있으니까.”
김혁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악마가 먼저 대꾸했다.
“뭐야, 마음도 읽었던 거야?”
“당연하지. 난 악만데 그럼.”
그럼 말 같은 건 안 해도 되겠네? 김혁이 속으로 생각하자 악마가 대답했다.
“그래도 앞에 놓고 말 않고 나 혼자만 떠드는 건 대화 같진 않잖아?”
으.... 저 자식. 이건 뭔가 너무 반칙 아닌가? 남의 속까지 들여다보고 맘대로 할 수 있다니.
“그러니 악마지 달리 악마겠나? 아, 그리고 그 긴머리 언니의 유혹은 잘 넘겼어. 제법이야. 아직 여자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암튼 잘 했어. 예전에 너만한 녀석이 저승사자로 돌아다니면서 카사노바라도 된 듯이 온갖 여자들을 후리고 다녀서 애를 먹은 적이 있었지.”
“저승사자도 그게 가능한 거였어?”
“느끼는데 안될 건 또 뭐야?”
“음식맛은 이상하던데?”
“그거야 불필요하니까 그렇지. 냄새도 다 느끼고 촉감도 살아 있는데 게다가 가공할 힘까지 보유했는데 안 될 리가 있나. 큭.”
악마는 짧게,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살았을 때 못한 거 죽어서라도 원없이 하고.”
“아서라. 미리 말해준 건 하지 말라는 뜻에서였지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니까 그 카사노바 녀석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한두번은 봐줬지만 지 일은 딴전이고 계속 그럴 궁리만 해대는 통에 일이 되질 않아서 결국 지옥불로 보내버렸어. 난 너만은 그렇게 빨리 지옥불로 보내고 싶지 않다구.그러니 제발 참아줘.”
“ ...”
" ..."
“서정을 만날 순 없어? 한번이라도. 고아원에 가보면 안돼?”
“그런 건 안돼. 넌 리스트대로만 움직일 수 있어. 사실 그렇게 시간 낭비하는 것도 봐주면 안 되는 일이야. 처음이니까 그냥 두는 거지. 우리라고 아량이 없는 건 아니라고. 모르지.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면 고향에도 가볼 기회가 있을지도. 그곳이라고 리스트에 오른 자가 없을 리는 없잖아. 아직 차례가 안 온 것뿐이지. 안 그래?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마. 이곳에서의 삶은 길어.”
악마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혁은 풀이 죽어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인연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소멸되는 게 아니야. 전생에서 못 이루면 후생에서 이룰 수 있고 후생에서 안 되면 그 이후에도 이룰 수 있는 거야. 전생, 저 전생 이전에선 너희들이 무엇이었을 것 같으냐? 악연이었을까 옷깃 한번 스친적 없는 사이였을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데.”
악마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아직도 그걸 모르겠나?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고 니가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건가? 넌 저승사자야. 저승사자. 사자라고. 죽은 자. 그걸 잊지 마. 네가 돌아가고 싶어도 넌 인간이 될 수 없어. 서정을 만난다고 해도 서정과 어떻게 할 건데 서정이 지금의 너를 보면 니가 저승사자로 돌아다니는 걸 알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 텐데. 안 그래? 서정에게도 인생을 잘 살 기회를 주어야지. 처음 니 마음은 그거 아니었어?”
“.... ”
“서정은 잘 살 거야 걱정마 천재급의 아이도 낳아서 잘 키울 거고 그 아이는 세상을 빛내게 될 거야. 그게 누구 덕일까? 서정도 그걸 알아. 평생 널 잊지 않을 거야.”
눈물이 차올라 김혁은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이 결국 날 울리네. 쪽팔리게.
“으휴, 핏줄은 못 속이네.”
악마가 갑자기 혼잣말을 내뱉듯이 한 것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핏줄?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니야.”
조금 당황한 악마. 분명히 핏줄은 못 속인다고 했지? 그러면 그러면 부모님에 관계된 얘기?
“말해줘. 뭐야, 무슨 얘기야?”
“안돼. 다음에, 리스트를 끝내면 말해줄게.”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지난 여름처럼 휙휙 날라다니면 되지. 그때 정말 깜짝 놀랐는데.”
“.... ”
“이봐, 김혁군. 방황도 너무 길게 하면 안돼. 이제 방황을 끝마칠 때도 되지 않았어? 벌써 두계절이나 지냈는데 아직 그러면 어쩌겠다는 거야? 난 니가 정말 맘에 들어. 널 지옥불로 보내기도 싫고 잘 해서 계속 저승사자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 ”
김혁은 계속 말이 없다. 악마도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고 사라졌다. 김혁은 이상한 공간에 홀로 남아 생각한다. 저승사자로 계속 살아가는 건 어떤 것인가? 지옥불에 떨어지는 건 어떤 걸까? 둘 다 처음 겪는 일이고 아무도 그 경험을 말해준 적 없으니 당연히 상상도 어려웠다.
그래, 일단 이 리스트는 끝내보자. 지금 달리 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말 저승사자로 써먹으려면 전생의 기억을 지워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원망을 안 할 수가 없다. 죽었다면 이미 서정이나 고아원의 기억들은 모두 전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대로 두어서 이렇게 그리움과 가슴 아픈 경험들을 반복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승사자가 인간의 감정이 필요한 일이라서일까? 김혁으로선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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