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겨울이 가르쳐주는 것들(2)
악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 여자는 자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다며 한동안 동네 사람들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돌아다녔어. 예쁜 옷도 사다 입히고 방도 꾸며주고 진짜 자기 아들을 찾은 사람처럼 그랬으니 온 동네 사람들도 다 그런 줄 알 수밖에. 아이가 죽었을 때는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자살쇼까지 벌였지. 대단했어. 아주. 그러니 아무도 보험사기라고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도 꼭 그렇게 악용하는 인간들은 있다니까”
김혁은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악마가 손짓하여 뒤돌아보았다.
연옥자가 조용히 악마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김혁은 누구보다도 그녀가 진정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승사자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무서운 그 광기가 다시 한번 소름 돋게 만들었다.
*****
김혁은 꽁꽁 언 빈 들판 위를 날쌔게 지나쳤다. 차가운 바람이 몸속에서 얼음 알갱이들처럼 으스러졌다.
죽고 죽이고 죽게 만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이곳. 왜 그래야만 할까?
‘너는 원장한테 왜 그랬는데?’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했다.
‘복수할 기회를 주겠어 지옥으로 갈래, 천국으로 갈래‘
'세상에 일조하는 거야'
'서정 같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죽어 마땅한 놈들이잖아 안 그래?’
‘숨어서 더러운 짓거리 하는데 벌도 안 받아’
‘으하하하!!! 으하하하!!’
김혁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악마의 목소리를 잊기 위해 더 빨리 날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전선들이 웅웅 울었다. 사람들은 옷깃을 더 여미며 불안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김찬. 39세. 무직. XX동. XX빌라 202호]
이름이 자신과 같은 외자라서 은근 친숙한 마음을 느끼며 리스트의 이름을 찍자 어느 허름한 방안에 서 있었다. 어둡고 가난한 방. 이제껏 본 중에 가장 가난한 방이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매달려 있는 죽음 외에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남자의 몸, 김혁은 간발의 차이로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이제 막 숨을 거둔 직후였다. 리스트에서 그의 이름이 불타 없어졌다.
김혁은 줄에 목을 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덩이 속에서 자신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충격과 슬픔이 느껴졌다. 어차피 자신이 데리고 가야 할 영혼이었지만 그 전에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자책감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건 기분이 또 달랐다. 사람들의 심장에 주먹을 날릴 때와는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 어차피 악마의 리스트에 오를 정도라면 무언가 중범죄자이긴 하지만 얹지 않아도 좋을 죄를 더 얹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인지 무언지.
이 남자는 아직 젊은데 왜 이렇게 살았을까, 왜 자기 스스로 생을 놓아버렸을까 궁금했다. 말로만 듣던 고독사. 주위를 둘러보니 이 사람이 언제쯤 발견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김혁은 전화를 걸었다. 112.
“여기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XX동. XX빌라 202호. 나요? ... 나 좀도둑이라 신분은 못 밝혀.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다가 발견했는데 차마 그냥 가지는 못하겠네. 혼자 사는 남잔 것 같은데 이대로 두면 썩은내 풀풀 풍기면서 몇 달이고 방치될게 뻔해서 알려주는 거니까”
그러고는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상대방은 여전히 뭐라 뭐라 떠들고 있는 중이었지만.
아무래도 112에선 장난전화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느 도둑이 경찰에 직접 전화를 걸어 그런 신고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와보긴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매달린 남자를 돌아보고 지옥으로 돌아왔다.
악마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다. 아마도 리스트가 거의 끝나가서 그런 것 같았다. 하루 빨리 자신이 지옥불에 끌려가며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겠지
“이번엔 손 안대고 코 풀었네?”
“이 사람의 죄는 뭐였어? 왜 자살한거야?”
“김찬. 불쌍한 인생의 종말이지. 어쩌면 너도 오래 살았다면 저 사람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었어. 김혁, 김찬 뭔가 짚이는 게 없어?”
“뭐? 뭐가. 외자 이름이 특별한 건 아니잖아. 뭐야 또 내 아버지라고 하려는 거야?”
악마의 장난질도 의심되긴 하지만 39세면 또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설마... 이젠 모든 것에 혹시 내 아버지? 하는 마음이 따라붙게 돼 버렸다. 김만재 이후에 리스트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혹시 내 어머니는 아닌가 내 아버지는 아닌가 그런 생각 한 자락이 슬며시 고개를 들다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그건 아니고. 저 사람도 고아야. 너희 고아원 초창기 원생 중 하나지”
“그럼...?”
“너희 고아원에 왜 외자 이름이 많은지는 생각해 본적이 없나? 김혁, 서정, 김민... 또 몇 명이야 대체?”
맞다. 고아원에 특히 외자 이름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원생들 중 절반에 가까운 아이들이 거의 외자 이름이었다.
“그거야 원장이 외자를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 본명을 모르는 애들한테 그렇게 이름을 지어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려”
“....?”
“그건 원장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지어준 거야. 그 사람은 뭐 차차 만나게 될 거니까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아무튼 김찬은 너희 고아원 출신이지. 젊어서부터 시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참 많이 했네. 시킨 놈이 더 나쁜 거지만 어쨌든 하란다고 한 놈도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어떻게 보면 얘도 피해자긴 한데, 청년시절부터 청부 폭행, 청부 살해, 그런 걸 주로 했어. 자신은 열성을 다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는데 막상 병이 걸리자 돌봄을 받지도 못하고 버림받았어. 말기암이었거든”
김혁에게 갑자기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 리스트 고아원이랑 관계된 거야? 그래?”
“....”
악마는 뭔가 망설이는 눈치다. 지금 말해줄까 말까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리스트는 뭐냐고 나와 관련 있는 거야?”
“오, 아니야 뭐 다 갖다 붙일 생각이야? 뭐 너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또 연관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뭐야 쉽게 말하라니까 왜 자꾸 비비 꽈!!”
악마녀석이 꼭 소리를 치게 만든다.
“아직 남았잖아. 리스트가. 다음 사람을 데려 오면 다 말해주지. 그때면 모든 걸 다 알게 될 거야. 서둘러. 이제 두 명 남았군. 지옥불이 멀지 않았어. 으하하하”
“내가 안 돌아오면 어쩔 거야? 리스트도 안 끝내고 그냥 구천을 떠도는 채로 살겠다고 한다면”
“음, 그런 건 선택적이진 않지만.... 넌 스스로 돌아오게 될 거야”
악마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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