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우리는 모두 외톨이(2)
김혁은 집 밖으로 나왔다. 여름밤의 더운 공기가 가득 찬 거리를 조금 걸었다.
야외에 플라스틱 테이블을 내놓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붉은색 오라들이 넘쳐난다. 불쾌지수가 높다는 걸 저승식으로 표현하면 붉은 오라가 둥둥 떠다닌다, 아니 붉은 오라가 자욱하다라고 하면 될까?
그런 번잡한 곳을 지나치고나니 한켠 인적 드문 주택가 골목길에는 회색 오라를 두른 한 할머니가 슬렁슬렁 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꼼꼼하게 골목 끝부터 훑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 밤에 잃어버린 고양이라도 찾고 있는 건가? 호기심이 일어 보고 있자니 누군가 쓰다 버린 걸 주웠는지 낡고 더러워진 유모차에다 종이들을 채우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누군가 까 내버린 아이스크림 껍데기까지 종이란 종이는 조각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 유모차에 갖다 넣고 있었다.
저렇게 모아서 저게 돈이 될까? TV에서 가끔 페지 줍는 할머니들을 보곤 했었다. 리어커에 잔뜩 실어가도 몇 천원에서 만원이나 넘길까 말까 하는 걸 본 터라 그 할머니의 밤 산책이 꽤 안쓰럽게 여겨졌다.
저렇게 해서 언제 유모차 하나를 다 채우시나, 얼마나 돌아다니셔야지 집에 돌아가신다지?
김혁은 이 골목 저 골목 빠르게 돌아다녔다. 때로는 날고 사람이 보일 땐 걷고 커다란 박스건 뭐건 버려져 있는 종이들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휙휙 날아다니다시피 했으니 금세 한아름이 모아졌다. 그것을 할머니가 안 볼 때 걸어 나올 골목 앞쪽 한 귀퉁이에다 숨겨 놓았다.
조금 지나서 페지 줍는 할머니는 역시나 그것들을 발견하고 얼른 달려갔다. 할머니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니 의외로 페지 줍는 노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시골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도시의 노인들은 이런 삶을 사는군. 시골 노인들은 밭일로 세월을 보내고 도시의 노인들은 페지를 주우며 세월을 보낸다.
김혁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던 구복남 할머니의 메마른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런 분을 제 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방밖으로 나가지 않는 손주를 위해서 더 악착같이 바지런 떨며 살아왔을 할머니를 왜 지옥에 끌어가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천당에 가야 하는 거 아닐까?
하긴 긴 세월, 67년 동안 착한 일만 하고 살진 않았겠지. 악마가 죄의 종류는 다양하다고 했었던가? 기껏해야 18년도 못 산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하고 겪어보지도 못한 무수한 일들, 그래 산전수전이라고들 하지.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떤 죄든 지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악마의 리스트가 괜히 만들어진 건 아닐 것이다.
날이 많이 더워져서 그런지 밤이 늦어도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리저리 사람들에 쓸려 산책을 하다가 지루해져 공원 벤치에 가서 앉았다. 다른 벤치 여기저기에 노숙자나 술 취해 누워 잠든 사내들이 더러 보였다.
그 소년, 진수는 왜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됐을까? 50이 다 돼서 낳았다고 말한 걸 보면 열 일곱? 열 여덟? 내 나이쯤 된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그거 갑갑해서 어떻게 살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지?
나다니기 좋아하던 김혁으로선 그런 게 조금도 이해 가능한 세계가 아니었다. 엉덩이에 좀이 쑤셔 PC방에도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차라리 몇 바퀴든 운동장을 달리든가 산을 올라가든가 뭐 그런 일들이 적성에 맞았다.
세상엔 이런 놈 저런 놈 다 있는 거니까, 뭐 공부가 제일 좋다는 서정 같은 애들도 있는데 뭘. 또 서정이다. 왜 항상 생각의 끝엔 서정이 있는지 참. 스스로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서정의 오라는 무슨 색깔일까 궁금해졌다. 오렌지색? 핑크색? 너무 오랜 세월 불행 속에 물들어 있어서 제 색깔을 잃어버렸을 것 같다. 아니 원래 밝은 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조용하고 사색이 많은 타입인데 보라색이나 좀 환하다면 청보라색 정도? 아니다. 모르는 일이다. 무지개색일지도. 그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애였긴 하다.
보고 싶다. 서정.
오빠, 하고 부르던 그 얼굴.
악마의 리스트에 적힌 주소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고향과 가까운 도시가 있다면 거기로 간 다음에 날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지 말라고는 안 했는데 왜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리스트엔 고향 근처 지역은 없었다. '이런', 실망감이 들었지만 이내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날쌔게 바람처럼 날아간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면 거기로 갈 수 있을까? 아, 이럴 땐 방위를 알아보는 법, 초속계산법 뭐 이런 공부를 안 해놓은 게 후회가 되긴 하는구나. 공부든 뭐든 때에 따라 해놓고 볼 일이다. 쓸모없어 보여도 어느 때건 쓸데가 한번은 반드시 생기는 듯하다.
그래도 날아서 가니까 금방 갈 수 있지 않을까? 왠지 바람의 속도로 쌩쌩 간다면 금방 가 닿을 것만 같다. 한번 가볼까? 생각이 한번 불붙기 시작하니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당장? 못할 거 없잖아!
김혁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혁은 밤의 한가운데를 오래오래 날았다. 그쪽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로.
처음엔 차도를 따라 날다가 생각했다. 이거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밤하늘은 검었고 달도 뜨지 않았다. 아무리 가도 가도 이정표가 안 나와서 방향을 틀기도 했고 갈림길이 나와서 망설이기도 했다. 가로등도 없는 공간을 날거나 산속을 지나기도 했다. 결국 거기가 어딘지 어디쯤에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둠속을 끊임없이 날다가 마침내 생각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 밤새도록 날아다니면서 깨달은 결과가 그거였다. 짧은 방황의 끝. 김혁은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리스트의 구복남 이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할머니의 방으로 돌아 와 있었다. 어둠 속에 낮게 드르렁거리는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잠들어 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안해 보인다. 내일 죽음이 온다고 해도 잠은 잘 수 있는 건가? 다른 방에서 타닥타닥하는 희미한 소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두운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컴퓨터만 켜놓은 채 진수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작은 몸집에 구부린 등 뒤로 검푸른 오라가 그림자처럼 의자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뭘 하는 걸까 싶어 모니터를 들여다 보니 긴 문장들이 가득 차 있다.
[엄마가 이상하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음식맛이 이상해져서 엄마가 주는 음식을 끊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다가 더 이상 핑계 댈 게 없어 방밖으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엄마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아닐까? 그동안 모아둔 용돈으로 이것저것 시켜먹고는 있지만 이제 돈도 다 떨어져간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집을 나가는 게 좋을까?]
무슨 소설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아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하더니 과대망상증인가?
“일기야 소설이야?”
난데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진수는 손을 멈추고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보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창백하다 못해 누렇게 뜨고 거의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다. 표정도 없는 가면 같은 얼굴.
“무슨 소리였지? 아우, 이제 환청까지 들리나?”
진수는 이내 모니터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김혁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깜빡했던 거였다. 당연히 진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일 리 없었다.
진수는 다시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기 시작했다. 꽤 심각한 표정이다.
설마 유서를 쓰는 건 아니겠지? 김혁은 이번에는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뭐 하고 있지?”
진수는 다시 천천히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김혁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방을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요. 엄마 방은 오른쪽이에요.”
진수는 다시 키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난 너한테 볼일이 있는데?”
“저요? 왜요?”
“뭔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여서 말이지.”
“뭐가요?”
김혁은 방바닥의 쓰레기들을 둘러보는 몸짓을 했다. 발디딜 틈이 없기 때문에 김혁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진수도 김혁의 시선을 따라 방바닥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김혁의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 기색이다. 표정의 변화조차 없다.
쟨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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