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우리는 모두 외톨이(6)
고아원의 부엌. 소녀는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한 꼬마가 달려 와 서정에게 원장님이 설거지 다 하면 방으로 오란다고 말을 전했다. 그걸 들은 소년이 소녀에게 물었다.
"왜 자꾸 오라는 거야?"
어느 날부턴가 저녁을 먹고 나면 소녀를 부르는 원장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원장방 쪽을 슬몃 바라보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몸이 아프대. 어깨 좀 주물러달라고.”
“그럼 내가 갈게.”
소년은 당장이라도 갈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다급하게 따라오는 소녀의 말.
“힘센 손으로 누르면 아플 것 같아서 그러는 거래. 너무 어린애들은 아직 손힘이 부족하고 내가 딱 적당하다는데 어쩌겠어. 걱정마. 정말 안마만 시켜.”
처음엔 고아원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가 안쓰러웠다. 그런 애한테 안마까지 시키는 원장이 마뜩치 않았지만 고아원의 왕 같은 존재가 원한다는데 어쩔 것인가 딱히 거스를 방법이 없기도 했다.
소년은 그저 소녀를 쉬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원장이 이상한 마음을 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이상한 예감이 엄습해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밤 몰래 원장의 방을 엿보았다. 원장은 이부자리에 누워 있고 소녀가 등을 안마하고 있다.
"조금 더 위로, 조금만 더, 더 거기,"
원장은 소녀에게 안마할 위치를 알려주면서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간 조용히 안마만 계속되는데 갑자기 원장이 몸을 뒤집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소녀를 와락 끌어당겼다. 어맛, 짧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소녀가 원장의 품에 쓰러졌다. 서둘러 일어나려는 소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원장.
“가만 있어봐 어허.”
소년은 더 이상 보고 있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원장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 이 자식. 누가 여길 들어오라고 했어?”
“정아, 나가자.”
소녀를 일으켜 나가려는 소년을 원장의 손이 낚아챘다. 멱살이 잡혀버린 소년은 원장을 째려볼 뿐이었다.
“이 새끼가 대가리 좀 컸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소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원장에게 손찌검을 당해왔던 터라 몸이 먼저 순응했다. 오랫동안 학습된 무기력. '그래, 차라리 나를 때려라.' 소년은 맥없이 원장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소녀가 울면서 매달렸지만 원장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년을 계속 때렸다.
그때는 원장을 때리겠다거나 대들겠다거나 그런 생각 자체가 소년의 머릿속에 없었다. 원장은 언제나 어른이었고 소년은 아이 때부터 이미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었다. 뭔가에 부딪쳤던가? 그리고 깨어나 보니 구덩이를 파고 있는 원장이 보였던 것이다.
김혁은 죽던 밤의 기억에서 빠져 나와 텅 빈 공간의 한 점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자신에게 가공할 힘이 주어진다면....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 기회를 차버린다? 한번 제안을 듣고 나니 그것은 도저히 뿌리치기 힘든 어떤 것이 돼버렸다.
복수를 하고 싶다, 원장이 서정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배곯는 것도 서러운데 매까지 맞아가며 살아가는 고아원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더 이상 눈물이 차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지옥을 살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나 혼자만 천국에 가라고?
김혁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하겠어. 하겠다고. 어서 나와.”
악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히힛, 그럴 줄 알았어. 생각보다 결심이 빠르군."
“날 보내줘. 갈게. 내가 원장을 데리고 올게.”
“가는 거야 뭐 어렵지 않아. 그리고 네 주먹 한방이면, 심장에 한번 내지르면 그걸로 끝이야. 참 쉽지? 대신 해뜨기 전에 돌아와야 해. 해가 뜨면 넌 인간의 몸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좀 곤란해져. 처음이라 잘못하다간 원장과 함께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될 수도 있거든. 무슨 말인지 다 이해했나?”
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잘 갔다 오라고.”
악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혁은 밤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시골길. 칠흑 같은 어둠속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진흙창에 쓰러져 있는 서정이 있었다.
그리고 페가에서의 밤. 잠에서 깨어난 원장이 놀라던 표정. 으슥한 숲의 그 구덩이를 다시 파내고 흙 묻은 푸르뎅뎅한 자신의 시체를 보았던 일, 거기에 원장을 밀어 넣었던 일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키보드 소리도 멈춘 지 좀 되었다.
김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진수 방으로 들어갔다. 진수는 이불을 폭 덮고 잠들어 있다. 김혁은 그런 진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계절도 시간도 무리에서도 이탈해버린 아이. 이 아이는 고아원 아이들과 다른가? 이 아이가 할머니를 괴롭히는 원흉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 그 안을 파고 들면, 이 아이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뭔가 또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겉보기와 다른 일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지 않은가. 아니 고아원 안과 밖은 어땠던가. 원장의 이중적인 태도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건 고아원 아이들뿐이었다.
이웃의 사람들은 고아원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줄 몰랐을 것이다. 소년이 그러고 다니는 것은 근본도 모르는 아이여서 그런 거지 고아원 원장 때문에 삐뚤어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려진 아이를 거둬서 키워주고 있는데 은혜도 모른다고 소년을 타박하는 동네 여자도 있었다. 고아원 원장이 소년에게 손을 대는 것도 그런 소년의 버릇을 고치기 위함으로 이해되었다. 아무도 나서서 애를 때리는 건 잘못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소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음에도 화풀이 대상으로 맞고 또 맞았음을 알았다. 그건 서정이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매를 든다면 그런 원한이 생길 리 없다.
원장은 밖에서 무슨 일을 겪고 들어온 날은 반드시 누구 하나를 데려다 때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원장이 외출한 날은 해질녘부터 고아원 안에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늘 그래왔으니까, 오늘은 누가 될 것인가가 의문일 뿐 누구 하나는 원장 방으로 불려가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맞지 않아도 누군가의 매맞는 소리와 작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우울한 시간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을 때리는 게 아니라 고아원 아이들 전체를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그럴 때마다 차라리 자기가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귀를 막곤 했다. 자신이 맞는게 마음 편했다. 둔탁한 마찰음을 들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견딘다는 게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김혁은 그런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하지 않았지만 진수를 보고 있자니 다시 그때가 떠올랐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진수가 고아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불행하기 때문인지 아직 어리다는 느낌 때문인지는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고아원 아이들을 볼 때 느꼈던 그런 안쓰러움. 매를 대신 맞고 싶은 마음이었다.
진수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이 녀석이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죄책감을 느끼면서 평생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방문을 두들기며 그토록 간절하게 밥 한끼 같이 먹자고 애원했던 어머니를 외면했던 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진수에게는 아직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고 그게 더 중요했다. 이 아이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건 분명하다. 뭔가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김혁은 잠든 진수의 몸에서 이불을 확 걷어냈다. 바싹 마른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아이. 불쌍한 녀석. 김혁은 진수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이상한 기척에 잠이 깬 진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공중에 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어? .... 어어.”
쓰레기가 널린 바닥에 내동댕이쳐줄까 어쩔까 하다가 침대 옆 벽에 살짝 던졌다.
팟, 텅.
진수의 몸은 벽에 몸을 부딪치고 나서 살짝 튕기며 침대로 떨어져 내렸다.
“아, 아우 아파라 아.”
진수는 팔꿈치를 문지르며 침대에 똑바로 앉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승사자를 바라보며 진수가 내뱉은 말은 이랬다.
“아 좀 살살 하시지. 그렇잖아도 왜 안 오시나 했어요.”
“...?”
역시 이 아이의 반응은 예상밖이다. 김혁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의 어스름 속에서 진수는 대충 시간을 짐작하는 듯 했다.
“되게 일찍 오셨네요? 깊은 밤에나 올 줄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요. 들어주실 거죠? 저기 지옥은 어떻게 생겼어요? 그것 좀 설명해주세요. 지옥을 최초로 묘사하는 거잖아요.”
“.....! ”
“빨리요. 금방 써요. 오늘 밤 안으로만 가면 되는 거죠?”
“야!!!!”
김혁의 갑작스런 일갈에 진수는 움찔 놀라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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