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인형의집(3)
김혁은 진소영에게 다가가 목구멍에 손을 넣었다. 토하게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이미 의식이 없어서 구토를 저 혼자 힘으로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야 떨어져, 내 마누라야. 어디다 손을 대?”
“아, 거 가만히 서 있지 말고 119에 전화 걸어 얼른. 수면제 먹었다고 아까, 많이 먹었어.”
“뭐?”
“죽으려고 했다고 이거 안 보여?”
그때서야 주명석은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약 알갱이들을 바라본다. 급한 마음에 일단 119에 전화를 걸고 난 다음 주명석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사이 김혁은 진소영을 들어 침대에 눕혀 놓았다. 수면제 몇 알로는 죽지는 않을 거다. 근데 몇 개나 먹었더라? 생각나지 않았다.
“주명석. 당신이 주명석이야?”
김혁은 고개만 돌려 주명석을 바라보았다.
“그 그런데....당신 뭐야?”
“저승사자라니까 왜 자꾸 물어봐? 돌대가리냐?”
“그런, 게... 뭐야? 그럼 이 여자를 데리러 온 거야? 저승사자가 어떻게 CCTV에 찍히지? 그게 말이 돼?”
널 데리러 왔다 밝히기 전에 우선 CCTV에 찍혔다는 말에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내가 CCTV에 찍혔어?”
“봤으니까 내가 왔지.”
“그거부터 지워라. 좋은 말 할 때.”
김혁은 주명석을 앞세워 서재로 갔다. 모니터에 가득 떠 있는 집안 곳곳의 내부 풍경이 보였다.
하, 집에서 뭐하는 짓이냐! 이 인간. 할 일도 되게 없다.
침실의 영상을 되돌려 보니 김혁이 감자기 나타는 장면부터 모두 찍혀 있었다. 인간의 몸이니까 찍히긴 하겠지만 몸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도 다 찍혀 있어서 만약 이게 세상에 공개된다면 엄청난 문제가 될 것이었다. 주명석이 손을 덜덜 떨며 서둘러 파일을 찾아 지웠다.
“다 지워.”
“지웠잖아.”
“그동안 찍은 거 말이야. 누가 지 부인을 몰카로 찍어? 미친놈이냐? 더구나 유명 영화배우를. 유출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경찰들도 몰려오는데 얼른 다 지워.”
“그래도 그건...”
“안 지워?”
김혁이 팔을 들며 때리는 시늉을 하자 주명석이 움츠러들며 파일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렇게 많은 파일을 찍을 동안 진소영이 바람피는 거나 뭐 딴짓하는 게 찍힌 게 있어? 대체 언제부터 찍은 거야? 이런 건.”
“그, 그런 건 없지만...”
“근데 왜 그렇게 아내를 못 믿고 그 난리야?”
“그거야 워낙에 결혼 전부터 좀 그랬으니까.”
“그런 거 싫었으면 결혼을 하질 말든가.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왜 결혼은 했어? 영화배우가 그 정도 인기도 없으면 어떻게 돈을 벌어?”
“다, 다 지웠어.”
김혁으로선 다 지웠는지 어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믿기로 했다.
“정말 경찰 불렀어?”
“올거야. 곧.”
“햐, 진짜 가지가지한다. 정말.”
"..."
“그냥 이혼하면 안 되겠든?”
“위자료 엄청 뜯길 텐데 내가 미쳤어? 저 여자가 한게 뭐가 있다고.”
대체 결혼은 왜 한 거냐?
“위자료 때문에 이러는 거야? 무슨 감옥도 아니고 CCTV에 외출도 못하게 하고 참 우리의 톱스타가 이렇게 사는 줄 알면 펜들이 까무러칠 거야.”
“소영이를 알아?”
“알지. 유명한 배운데 모를 리가 있나!”
“저승사자라고.... ”
“저승사자는 뭐 TV 안 보란 법 있어?”
경찰이나 119 대원이 도착하고 주명석이 문을 열어준 다음에 데려가는 게 나을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절차가 꽤 복잡해질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소영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저승사자로서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피해가 덜 가게 하자는 게 평소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진소영은 119나 경찰이 몰려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십거리에 오르내리게 생겼다. 가엾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남편 잘못 만난 탓에 좋지 않은 일로 구설수에까지 오르다니.
119 대원이 먼저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이 진소영을 들어 구급차에 싣고 있는데 경찰들이 도착했다.
주명석, 진소영의 대저택 앞은 구급차, 경찰차, 구급대원들과 경찰들이 뒤섞여 어수선했다. 전부 대저택들이라 주변 집들은 멀리 있었지만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해서 나와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명석은 경찰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진소영을 따라가려나 집에 남아 있으려나 보고 있는데 눈물까지 흘리면서 엄청 서러워 하는 연극중이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내가 평소에 영화를 너무 하고 싶어 했는데 은퇴 이후 우울증이 심해서 어쩌구 저쩌구 .... 아주 꼴값을 하는구만. 누가 보면 엄청 자상한 남편인 줄 알겠다 참나.
“남자가 있다고 했잖습니까? 누가 침입했다고.”
경찰이 우선 신고 접수된 내용부터 확인했다.
“글쎄, 저도 분명히 봤는데 강도라고 생각해서 전화부터 먼저 걸었는데 방에 가보니 온데간데 없고 아내는 수면제를 먹고 쓰러져 있어서...”
주명석은 궁색한 변명을 계속 늘어놓으며 경찰들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경찰들은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명석은 여전히 납득시켜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대로 계속 두면 방송 카메라도 부르고 그 앞에서 진소영을 아주 이상한 여자를 만들어 놓을 기세다. 눈하나 깜짝 안하고 엄청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대단히 자상한 남편 행세를 하면서 교묘히 아내 탓을 하는 남자. 안과 밖이 달라도 너무 다른 남자다. 저 정도면 진소영이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김혁은 틈을 보아 몸을 숨긴 채 주명석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퍽.
잘 서 있다가 억하고 주명석이 갑자기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구급대원들이 달려왔다. 이런 경우는 목격자가 많을수록 낫다.
********
지옥에 돌아가자 악마는 싱글벙글이다. 왜 저러지?
“오우, 너란 녀석은 정말 대단해. 대단해.”
“뭐가?”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좀 볼만하겠다 생각했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강하네. 으음?”
능글거리는 웃음하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모양새가 역시 악마놈이 수작을 부린 것이 맞았나보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려고 일부러 리스트에 그런 사람들을 끼워넣은 거야. 으으~~
“오우, 아니야. 그 리스트는.... 아, 그런 걸 의도한 건 절대로 아냐. 그냥 우연히 그런 상황에 떨어진 거지. 나야 그냥 오랜만에 좋은 구경 좀 하나 했는데. 쩝!”
악마가 또 멋대로 속마음을 읽고 먼저 떠들어댔다.
“그러지 좀 말지? 엄청 기분 나쁘거든?”
“미안. 버릇이 됐네.”
“대체 주명석이란 인간은 죄목이 뭐야? 뭐 저런 이상한 인간이 다 있어?”
“아, 그 사람은 말이지. 유명 배우들을 많이 배출해내는 기획사 사장인데 배우들이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편이지. 악덕기업주 같은 거야. 노예처럼 부리기도 하고 싫어하는 일도 억지로 시키고 뭐 뭐 그런 일 있잖아. 그런 것들 때문에 자살한 배우도 있고 연기를 아예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지. 진소영 같은 경우는 연습생 때부터 눈여겨보면서 키워주긴 했는데 딴 놈한테 가는 걸 절대 못 봤어.
또 집착이 엄청 심해서 아주 젊은 시절부터 진소영은 행복할 수가 없었어. 아 불쌍해라. 저 인간 뜻대로 결혼까지 했는데 또 저놈이 의처증이 대단해. 그냥 길가던 남자만 봐도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고. 폭력도 서슴지 않고 아유, 그러니 은퇴를 할 수밖에 없잖겠어?
진소영은 정말 우울증이 심하긴 해. 그 화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남자 한번 제대로 못 만나봤지. 연애도 못해보고 독수공방한 게 벌써 몇 십년이지. 영화도 하고 싶었는데 못하지. 남편은 아무도 못 만나게 하면서 거들떠 보지도 않고 거의 정신적 학대 수준이니 뭐 누구라도 그럴만 하지. 주명석의 이혼한 부인이 한명 있는데 그 부인도 지금 정신병원에 있어.“
“윽.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그러니까 니가 데려온 거지. 뭐, 난 또 저승사자를 보고 그러는 놈은 처음봤다. 히힛"
“그, 그러게.”
그때 뒤에서 주명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뭐야? 어디야? 날 어디로 납치한 거냐. 진소영이 시켰어? 내 그년을 가만 안 놔둘 거야. 얼마면 돼. 몸값이 얼마야 내가 다 줄게. 나 돈 많아. 누가 시켰어? ...응? 지옥? 내가 왜? 그 저승사자가 데리러 온 건 진소영이라고 했다고. 근데 왜 날, 너희들 일처리 잘못 한 거 아니야? 사람 잘못 데려다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이래? 난 안 가. 안 가! 진소영이가 왔어야 하는데 왜 내가. 아악.”
주명석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끝내 횡설수설만 하다가 지옥문으로 사라졌다. 참 희한한 사람이다. 저 사람 곁에 있던 사람들이 저 자가 사라진 걸 얼마나 다행스러워할지 생각하니 저절로 안도감이 들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