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겨울이 가르쳐주는 것들(3)
이제 리스트의 끝자락에 두 개의 이름만이 남았다. 리스트가 백지가 되면 지옥불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약간 두려운 마음도 일었다. 이름 하나에 손을 갖다 댔다.
[장규석. 51세. 남자. XX동. 태양빌딩 3층]
늦은 오후, 눈으로 히끗히끗한 산들을 뒤로하며 국도를 타고 달려가는 차 안. 운전하는 중년 남자와 차 뒷좌석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있는 중년 여자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두 사람 다 오라가 검었다. 누가 더 옅고 진하다를 구별짓기 힘들만큼 칠흑같은 검은색이었다.
김혁은 투명한 몸으로 여자 옆에 앉아 있었다. 열선이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가죽 시트는 너무 포근해서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장님들이 뒷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이 이런 거군. 음. 약간 그런 편안함을 음미하고 있을 때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제 거의 다 와갑니다. 이제 마을이 보일 겁니다.”
남자가 백미러로 여자를 보며 대답했다.
“그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일처리도 느릿느릿하고 미련맞아서는. 별걸로 다 속을 썩이네. 연락 안 된 지가 얼마나 됐다고?”
“전화를 하면 아이들만 받아서 없다고 한건 한참 됐고요. 한동안 연락할 일이 없어서 전화를 안 하긴 했는데 요번에도 또 그러기에 이상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한 몇 달 된 것 같습니다.”
“도망갈 이유 같은 건 없잖아?”
“모르겠습니다. 뭔가 빚같은 게 있었는지도. 좀 오래 됐잖습니까. 왕래가 끊긴지가.”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관리는 하고 있었어야지. 애들도 있는데.”
“죄송합니다. 워낙 전화만 하면 죽는 소리를 하면서 돈 얘기를 꺼내니까.”
여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차는 계속 달려갔다.
창밖을 보니 점점 눈에 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기는?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눈이 여기 저기 쌓여 있었지만 눈에 익은 가옥들, 그리고 서정과 비를 피했던 그 페가를 지나치고 있다. 그토록 그립던 고향 마을이다.
아, 서정을 볼 수 있는 건가? 가슴이 설렜다. 이렇게도 올 수 있구나.
김혁은 이 뜻밖의 행운에 속으로 흥분감을 감출 수 없었다. 먼저 고아원에 가서 들러본 다음에 일을 처리해도 늦지 않을 터. 김혁은 차에서 빠져나와 급하게 고아원으로 날아갔다.아이들과 서정이 먼저 보고 싶었다.
고아원 건물에 도착하자 한겨울이라 모두 문을 꽁꽁 닫고 안에서만 있어선지 마당과 주변은 매우 조용했다.
아직 해질녘 전이라 서정은 학교에서 안 돌아왔을 수도 있었다. 겨울방학일 수도 있을까? 지옥에 가 있던 동안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어서 지금이 몇 월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날씨만으로 본다면 한겨울이었다. 방학이 아니라도 주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정이 있기만을 바라면서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숙제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만화책을 보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서정은 주방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좀 큰 남자아이, 명수가 이것저것 거들고 있는 게 보였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활달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 각자의 천연색 오라들이 뒤섞여 더욱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원장이 살아 있었을 때는 원장이 없을 때라도 이렇게 활기찬 느낌은 있을 수 없었다. 원장은 외출한 날은 꼭 아이들을 데려다 때렸기 때문에 원장이 없더라도 그 전에 이미 불안 속에 우울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집 같다. 아늑한 숲속 오두막에서 도란도란 살아가는 평화로운 분위기. 태양과 무지개빛, 서정과 크고 작은 일곱 명의 아이들이 그래 보였다. 서정의 오라는 상상했던 것과 다르게 붉은기가 도는 눈부신 노랑색이었다.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
“누나 누나, TV 조금만 보면 안돼? 지금 ‘날라간다 우주로’ 할 시간이란 말이야.”
성민이가 서정에게 다가가 말을 꺼낸다.
“모두 숙제 다 했어? 전체 다 숙제 끝낼 때까지는 안돼.”
서정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 누나. 그것만 보고 얼른 끌게.”
“안돼.”
성민이는 실망한 채로 아이들 쪽으로 돌아갔다.
“야 김민. 너 얼마나 남았어. 아우 진짜 그거 하나 빨리 빨리 못해?”
성민은 김민의 숙제를 들여다보다가 답답한지 투덜거렸다. 대신 써줘도 되는 거면 다 해줄 모양샌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건가 보다.
녀석들. 여전하네.
서정은 봄에 봤을 때보다 키도 조금 크고 훨씬 여성적인 느낌이 난다. 머리카락은 더 길어지고 좀 마른 것 같지만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잘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다.
그때 밖에서 차소리가 들렸다. 대문밖에 찌그럭거리며 멈춰서는 자동차. 무슨 일인가 싶어 서정이 물 묻은 손을 닦고 창밖을 내다본다.
아까 김혁이 타고 있던 그 차다. 뭐야, 저들이 찾아온 데가 여기야? 그럼 연락이 안 되는 게 고아원 원장? 저들은 누구지?
김혁은 이 낯선 자들이 여기 아이들만의 작은 안식처를 파괴하러 온 사람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져서 마뜩치 않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는데 그냥 장규석을 빨리 데리고 가는 게 나으려나? 그러면 그 일로 우왕좌왕 하겠지. 순간 갈등이 일었다. 정이를 만나보고 싶은데....
악마는 전에 서정에게 잘 살 기회를 줘야 한다고 했었다. 자신이 저승사자로 떠도는 걸 알면 서정이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그 말은 맞다. 어쩌면 이렇게 본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하지만....
“안에 있나?”
장규석이 큰 소리로 물으며 고아원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서정이 문 쪽으로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뒤이어 따라 들어온 여자가 고아원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원장님 계시나?”
장규석이 서정에게 묻자 서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장님 지금 안 계신데요?”
“니가 전화 받던 그 여자애냐?”
서정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들이 누구든 여기까지 찾아온 걸로 보아 그냥 단순하게 넘길 사람들 같지 않은데 김혁으로선 보고만 있기가 걱정스러웠다.
“네 제가...”
“임원장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왜 항상 없다는 거야?”
“저희도 몰라요. 언젠가부터 돌아오시지 않아요.”
듣고만 있던 여자가 끼어들었다.
“언제부터, 그럼 계속 너희들만 있었다고?”
“네. 정이 누나도 있고 우리끼리 잘 지내고 있어요.”
명수가 대답했다.
“연락도 없었어?”
장규석은 의심이 가득찬 목소리로 물었다.
“전화는 가끔 했었는데 요즘은 전화도 안 하셔서...”
서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거짓말 하는 게 아슬아슬하다.
여자와 장규석은 더 묻지 않고 원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서류들을 뒤적이면서 살펴본다.
서정과 아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이 무례한 손님들이 누구인가 궁금하고도 불안한 얼굴로 모여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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