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지옥을 선택한 남자, 김혁
소녀야, 너를 위하여 돌아왔다.
멀고 먼 길을 떠나기 전.
이제 안심해라.
악몽은 내가 가져간다.
안녕.
-복수의 화신
밤, 어둠속 거센 빗줄기를 뚫고 달려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게 찢긴 블라우스를 앞쪽에서 움켜쥐고 달려가는 소녀.
빗물인지 눈물인지 얼굴은 온통 젖어 있고 그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녀는 달리고 또 달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둠 저 앞에 검은 바다가 넘실댄다고 해도 소녀는 멈출 것 같지 않을 기세다.
오래 오래 달리던 소녀는 돌에 발이 걸려 넘어져 버린다. 비에 젖어 진창이 된 바닥에 얼굴을 반쯤 묻고 엎어진 채로 소녀는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젖어서 달라붙은 블라우스에 얼비친 맨살이 파들파들 떨고 있다. 얇은 블라우스 한 장과 젖어 다리에 휘감긴 긴 치마 외에 소녀는 신발도 신고 있지 않다.
소녀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찰박찰박 빗물을 밟으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소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아....
소녀는 짧은 외마디를 내뱉고 그대로 멈췄다.
“정아.”
“....너는 ....너는....”
“그래 설명해줄게. 일어나, 어서.”
“혹시 내가 죽은 거야?”
“아니야. 먼저 비를 좀 피해야 해.”
소녀를 부축하고 남자는 멀리 보이는 폐가 쪽으로 향해 간다.
소녀의 젖은 어깨에 제 겉옷을 덮어주고 남자는 분주히 움직였다. 부엌 여기저기서 버려진 물건들을 뒤적이던 남자는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성냥을 발견했다. 불을 피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동그라져 있는 찌그러진 냄비를 가져다 방 가운데 놓고 문짝을 잘게 부숴 넣었다.
어차피 여기저기 구멍 투성이고 무너져 가는 집이라 문이 있든 없든 바람은 막을 수 없었다. 바닥에 뒹구는 먼지 투성이 공책을 찢어 불쏘시개를 한참 넣으니 부서진 나무는 매캐한 연기를 뿜다가 간신히 불이 붙었다.
“나 꿈 꾸고 있는 거지? 나 아직도 빗속에 누워 있는 거지?”
“꿈 아니야.”
“넌 죽었잖아. 여기 있을 수 없어.”
“그래, 난 죽었지. 하지만 돌아왔어. 널 위해서.”
“그런 일은 불가능해. 꿈에서라도 보았으면 했는데 아마 그래서 네가 나타난 걸 거야. 그런 거지?”
소녀의 입술은 새파랗고 가녀린 어깨가 떨리고 있다. 머리칼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남자는 소녀 곁으로 다가가 앉아 살포시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정말 돌아온 거야.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진짜야. 걱정마. 내가 널 지켜줄 거니까.”
소녀는 남자의 가슴에 기대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가슴에 뜨뜻하게 배어드는 소녀의 눈물을 느끼며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난 널 위해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났지. 널 위해 난 뭐든지 할 거다.’
밤이 이슥하도록 그들은 그렇게 불 곁에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맹렬하던 빗줄기도 어느새 주춤하는가 싶더니 새벽녘쯤에는 그쳐 있었다.
“정아, 정아, 서정?”
남자는 어깨에 기대 졸고 있는 소녀를 살며시 흔들었다.
“으... 응?”
“돌아가자.”
“어디? ... 싫어!! 안 갈 거야.”
소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린다.
“날 믿어. 난 이제 예전에 그 어린애가 아니야. 난 천국으로 갈 수 있었지만 지옥으로 가기로 하고 복수의 기회를 얻었어. 악마를 먼저 만났지. 그는 내게 힘을 주었어. 난 그걸 널 위해 쓸 거야.”
“무슨 말이야. 복수라고? ..... 설마 ....? 안 돼. 그러지마! 아직 안 늦은 거지? 다시 돌아가서 천국으로 가겠다고 해. 정말 천국이 있다면 내가 죽으면 되잖아. 그러면 복수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제발 그러지마!”
“늦었어. 이미 악마와 계약을 했는 걸. 그건 되돌릴 수 없어. 지금 네가 죽는다고 해도 너는 천국으로 가겠지만 나는 어차피 지옥으로 가야만 해. 넌 여기서 더 이상 지옥을 맛보지 않아도 돼. 진짜 생을 살아야지. 그놈만 없으면 가능해.”
“안 돼. 안 돼. 그러지마!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천사를 만날 순 없을까? 안 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넌 여기서도 지옥을 살았는데 또 또 지옥을 가다니.... 흑..... 그러면 너무 불쌍하잖아. 흑흑 ....”
“그때 널 구하지 못하고 죽은 게 마음에 걸렸어. 너를 계속 지옥에 두느니 내가 지옥에 가는 게 낫겠다 생각했어. 내 걱정은 하지마.”
해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소녀와 남자는 조용히 고아원 건물로 다가갔다. 삐걱이며 대문이 열린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원장은 깊이 잠들어 있다.
남자는 잠시 잠든 원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잠결에 이상한 기척을 느꼈는지 원장이 눈을 떴다.
“아윽, 뭐, 뭐냐, 누구냐?”
“날 잊어버린 건가?”
원장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듯 하더니 곧 알아본 모양이었다.
“너는, 넌....”
“그래, 난 죽었지.”
너무도 놀란 원장은 자신의 뺨을 철썩 때리기까지 했다.
“아니야. 이건 꿈일 텐데?”
“네가 때려 죽였지. 네 손으로 구덩이를 파고 묻었던 김혁, 기억나지? 자, 이제 네가 묻힐 차례다.”
남자는 원장의 심장에 단 한번 온 생애를 실어 분노의 주먹을 날렸다.
퍽.
남자는 원장의 시체를 짊어지고 자신이 묻힌 구덩이로 향한다. 그에겐 정말 신비한 힘이 부여된 모양인지 뚱뚱하게 살이 찐 성인 남자를 너무도 가볍게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 소년일 때 죽었는데 몸은 청년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했다.
남자는 소녀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작별을 하자. 그냥 너희들끼리 한동안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나중에 누군가 찾아온다면 원장이 어딘가 가서 오지 않았다고 해.”
남자는 작은 고아원 건물을 돌아보았다.
“하긴 이런 촌구석의 고아원. 누가 찾아오기나 하냐? 온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그 구덩이를 못 찾을 거야. 너도 모르는 게 나아. 좀 지나면 너도 어른이 되니까 그때는 세상에 나가서 자유롭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오빠!”
소녀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남자를 본다.
“어쭈. 어릴 땐 그렇게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르더니 이제야 오빠 소릴 듣는군. 약속해, 서정. 잘 살아야 해. 알았지?”
“혁이 오빠...!”
“나 만나고 싶다고 지옥에 올 짓은 절대로 하면 안돼.”
남자는 한번 씨익 웃어주고 돌아선다.
“정말 가는 거야? 다시 안 와?”
“이 놈을 데리러 온 거니까 더 있을 순 없지. 난 간다. 해가 뜨기 전에 가야 해.”
그는 해뜨기 직전의 어스름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소녀는 그가 사라진 앞 오솔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소녀의 등 뒤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며 세상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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