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슈퍼맨의 마음2
또 다른 주말, 아직 기는 것밖에 못하는 둘째 아이가 침을 질질 흘리며 김혁에게로 기어온다. 기어오긴 하지만 그 속도가 엄청나다. 기는 건지 뛰는 건지 운동 신경은 역시 아빠를 닮았나보다. 사람들이 김혁과 붕어빵이라고 하는 아들 녀석. 쉬는 날마다 아이보기에 여념이 없는 불쌍한 아빠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데 서정은 위로는 못해줄망정 매일 구박이다. 오늘도 서정은 외출했다 들어오자마자 아는 척보다 먼저 리모컨부터 찾아든다.
나 먼저 아는척 해주면 안 되는 거야? 마음속으로 간절히 되뇌이며 보고 있자니 서정은 김혁 의사는 묻지도 않고 아직 끝나지도 않은 드라마에서 멋대로 TV 채널을 돌려버렸다.
“아, 왜 그래? 지금 주인공이 ... ”
“오늘 TV에 나온대.”
“누가?”
“조용히 해봐. 나오잖아.”
한국의 최연소 XX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의 인터뷰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나운서] 서진수씨, 수상소감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진수] 제가 한때 학창시절에 실의에 빠져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제게 큰 힘이 되어주신 그분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하마터면 골방에서 페인으로 생을 마감할 뻔 했었는데요. 그분 덕분에 오늘날 이렇게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어서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아나운서] 그런 분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참 복이 많으시네요.
[서진수] 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심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도 그분의 한마디가 제 인생의 등대가 되어주었습니다.
[아나운서]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
[서진수] ‘넌 큰 작가가 될 거다’라고요. 그때는 뭐 믿거나 말거나이긴 했지만 그 말을 믿고 정말 열심히 쓰고 또 썼습니다. 재능 없음에 시달리던 제게 그분의 한마디는 정말 큰 힘이 되었거든요.
‘그치? 그랬을 거야.’
김혁이 혼자 또 감격에 젖어 있는데 여지없이 서정이 끼어든다.
“녹화했어?”
“아니.”
“아니, 이 인간은 정말 쓸모가 없다니까. 그런 것도 안 하고 뭐 했어?”
“하라고도 안 해놓고 니가 해야지 그런 건, 아야!!”
사정없이 등짝으로 날아온 손바닥. 대체 그 새초롬하고 옆에만 가도 수줍어하던 서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런 걸 보면 사람은 변하는 게 좋은 게 아니다. 아니 다른 사람 다 변해도 ‘아내’란 존재만은 절대 변해선 안 된다. 수줍게 첫키스 하던 그 여자, 첫날밤 직전까지 아니 큰애 낳기 전의 모습으로라도 영원히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영원히.
“으이구, 대체 잘 하는 게 뭐야?”
“이젠 신랑을 패냐?”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판국에 그래, 모르니까 그런 거지. 내가 참아야지. 다 죽어가던 처남을 살리고 저렇게 만든 일등공신이 바로 나 김혁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렇게는 못할 것이다. 절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등짝이나 갈기고. 나쁜 기집애. 그래도.... 난、저 여자가 안고싶다. 좋은데 어쩔 것이냐!!
“여보, 자기야. 우리 그거 언제 해? 오늘 밤 어때?”
“여보야, 나 힘들다. 혼자 해결 좀 하면 안돼?”
“싫어!!! 내가 왜? 이쁜 마누라 두고 왜? 왜?!”
등짝을 갈기던 매운 손이라도 쓰다듬어 주면 좋고 으흥, 으허헝, 으헝! 이 여자도 구박은 하면서도 내가 안아주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이런 게 행복이지. 행복이 별건가?
처남의 책을 펼쳐본다.
[평생을 슈퍼마켓 점원, 식당 종업원, 파출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딸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진짜 우리 엄마. 유명한 구두쇠 구복남 할머니의 딸, 내 엄마는 이제 어엿한 건물주이기도 하고 고아원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엄마는 자신이 어렵게 살아봐서 그런지 자기 어머니의 구두쇠 짓을 너무나 혐오해서 그런지 사람들에게 인정스럽고 후한 편이다. 세입자들에게 모질지 않고 자식들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내가 밤낮 키보드만 두들기느라고 얼굴 볼 새도 없지만 어디서든 엄마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책을 내는 족족 잘 팔려나가서 대박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나를 ‘문학의 위기, 출판계 불황에 피폐해진 환경에 강림하신 보석 같은 존재’라고들 한다.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 출판계쪽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라며 신문에 실린 말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걸 예언한 그분이 가끔 생각난다.
요즘은 강연을 다니면서 은둔형외톨이였던 옛날 일도 털어놓고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그때 내가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이렇게 자기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차마 저승사자를 만났다고는 못하고 그분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 고마움이라도 표시했으니 봐준다. 요즘은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면서 은둔형 외톨이들을 위한 말도 많이 하고 있다고 어디 뉴스에서 본 것도 같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세상 구경을 더 해야 한다고. 1000명을 위한 작가로 남을 것인가 대문호로 남을 것인가 선택하라고 강변한다나 뭐라나! 그 말은 내가 먼저 한 말인데 나한테 저작권이 있는 거 아닌가? 쩝!’
김혁은 언젠가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베스트셀러,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을 읽고나서 처남 진수에게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저기, 근데 이 저승사자 말이야. 캐릭터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아니, 좀 이상하게 그려진 것 같아서.”
“그 저승사자가 원래 이상했어요.”
진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뭐라고? 뭐가 어떤 점이!!”
김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아, 깜짝이야. 왜 그래요? 그렇게 이상해요? 그래도 독자들 반응은 좋던데?”
“아, 아니 뭐가 이상했는데?”
“음 그게 꿈인가 지금도 생각하는데 꿈은 아닌 것 같아요. 진짜 침대에서 들어 올려져서 내던져지고 벽에 부딪쳐서 아팠던 것도 생생하고 나중에 보니까 팔에 멍도 들었더라고요. 아무튼 자기가 저승사자라고 하는데 생긴 건 그냥 멀쩡한 젊은 남자였어요.”
잘생겼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근데 사라지기도 하고 공중에 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믿은 거지. 어쩌면 그냥 그 건물에서 떨어져 죽은 몽달귀신이었을지도 모르죠. 어릴 때부터 가위는 많이 눌렸어서 별로 놀랍지는 않았는데 자기가 저승사자라고 하고 또 그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던 거죠. 너무 생생하고 기억에 남기도 하고 생각난 대로 최대한 소설에 묘사한 건데요. 그런 귀신은 처음 봐요. 느닷없이 막 절 집어던지고 혼자 화를 내더니 패트병을 발로 차고.... 음, 방이 좀 지저분한 편이어서 더러운 걸 싫어해서 그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죠. 어렸잖아요 제가.”
후~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리요!!!
“근데 또 막 그러다가 갑자기 또 착하게 보이고 싶었는지 대문호가 어쩌고 사파이어색 오라가 어쩌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 말은 제 가슴속에 남았어요. 인간도 아닌 존재가 그런 말을 했으니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 했거든요.”
그치? 내가 생각해도 그건 잘 했다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오늘의 베스트셀러 작가 서진수가 탄생할 수나 있었겠어?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 따위로 묘사해 놓다니. 이게 뭐냔 말이다. 동네 건달처럼 보이잖아. 참나. 잘생기고 멋진 저승사자 캐릭터를 갖다가.
드러내서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참아지지도 않고 속으로만 부글부글 거리는 김혁 앞에서 진수는 여전히 그 저승사자와 만났던 밤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어린 진수가 오버랩 되면서 김혁도 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듯 했다.
“아오, 아파라 좀 살살 하시지” 팔꿈치를 문지르며 앉더니 왜 이제 오셨냐고 되묻던 이상한 아이, 흠, 너도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방이 '조금' 지저분한 거였더냐?
아무튼 역시 진수를 볼 때마다 김혁은 속으로 슈퍼맨, 슈퍼맨을 발음해 보고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그러면 진수나 서정이 또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김혁은 가끔 이상해지는 사람으로 지난 10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어린시절 그토록 안 가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것 같았다. 어느날부턴가는 서정의 남편이었고 어느날 일어나보니 아이 하나가 생겨 있고 어느날 보면 또 다른 아이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불행은 현재의 평범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었다. 김혁은 결코 이보다 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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