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개와 늑대의 시간(2)
뭔가 딴 마음을 품은 게 확실하다. 고아원 원장이 여자애들에게 하던 짓이랑 비슷하다. 여차하면.... 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학생은 남자에게 붙잡히기 전에 도망쳐 뛰쳐나갔다. 그 바람에 몸에 부딪친 책상 하나가 우당탕 넘어졌다. 여학생의 오라가 심하게 검게 변했기 때문에 우선 여학생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에 김혁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여학생은 교문 쪽으로 달려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여학생은 계단을 계속 올라간다. 한칸, 한칸, 한층, 한층 오를수록 몸의 오라가 점점 더 검어지고 있다. 5층까지 올라가서야 복도로 들어섰다. 어두운 복도보다 더 검은 오라를 휘감고 여학생은 한 교실로 들어간다.
김혁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교실은 텅 비어 있고 여학생은 5층 창가 난간에 올라가 우두커니 서서 창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설마, 저 정도 일로 죽는다고?'
이해하긴 어렵지만 여학생의 오라는 거의 검은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내릴 것만 같았다. 해가 완전히 져서 김혁은 이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계획이고 뭐고 일단 말부터 걸고 봐야 했다.
"어이, 학생."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여학생이 기우뚱거렸다. 하마터면 창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김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는 조심 좀 해야겠는 걸. 높은 데 서 있는 사람의 뒤에서는 크게 부르지 말 것.
"거기서 뭐해?"
"누, 누구세요?"
여학생은 낯선 남자의 등장에 놀라기도 했고 자신의 현재 상태를 들켜버린 것에 대해 당황한 눈치였다.
" 다가오지 마세요."
" 잠깐만, 얘기를 좀 하자."
" 저리 가라고요."
" 알았어. 여기 서 있기만 할게. 근데 그렇게 위험한 데서 뭘 하는 거야? 창문 닦아?"
창문 닦아? 이건 아닌데 ...!
"누구신데요?"
"나? 지나가던 사람.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좀 위험해 보여서 말이지. 저기 내려 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 내가 심장이 벌렁거려서 보고 있기가 힘드네."
"그냥 가던 길 가세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
벌써 마음을 굳힌 건가?
"뭐를 알아서 할 건데? 뛰어내리면 뭐 좋아질 것 같아?"
"..."
지옥에 관한 얘기를 해도 되나? 안 된다고 하진 않았잖아. 에라 모르겠다.
"거기서 뛰어내리는 순간 지옥불구덩이 속에 떨어지는 거야. 죽지도 못하고 활활 타면서 고통을 겪게 되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죠? "
여학생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 얼굴이 은근히 예뻐 보인다. 바람에 실려 오는 긴 머리 샴푸 냄새도 코를 간질이고 살며시 펄럭이는 교복 치마와 그 아래 드러난 다리도 예쁘다. 아,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데 정신 차려, 김혁!
김혁은 재빨리 창가 앞 허공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 앞에 불쑥 나타난 김혁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여학생이 교실 바닥으로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졌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여학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그러니까 말이야. 나를 좀 믿어 봐. 여기서 떨어져 봤자 지옥불구덩이 속이라니까."
"귀, 귀신?... 내가 벌써... 나 안 떨어졌는데...?"
"죽으려고 했으면서 저승사자는 무서워? "
김혁은 여학생이 서 있던 창턱에 걸터앉았다. 여학생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있고 아까 창고에서 풍기던 냄새가 풍긴다. 아하 이게 공포의 냄새인가?
"너 잡으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마. 좋은 나이에 왜 이런 생각을 하지? 그런 허접한 인간쯤 무시하면서 살면 안돼? 엄마한테 얘기하든지 전학을 가. 왜 아까운 생을 버리려고 해. 충분히 다르게 살 수 있어."
음, 내가 이런 말을 다 늘어놓다니. 좀 유식해진 느낌이다. 이것도 악마가 준 능력인가?
"안 당해봤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저놈은 악마야. 나라고 뭐 아무것도 안 했을 것 같아? "
여학생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래, 그렇지만 좀 더...."
김혁의 평소 지론은 여자의 눈물은 보지 않을 수 있으면 보지 않는 게 좋다는 쪽이다. 여자의 눈물은 질색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는 돈봉투까지 쥐어주면서 저놈한테 나를 맡겨. 잘 부탁한다면서 갖은 아양을 다 떨지. 그 여자는 무슨 무슨 대회 수상 경력 같은 거, 공부 잘하는 딸, 일류대학에 가는 딸만 원할 뿐이야. 선생님이 격려 차원에서 조금 만질 수도 있대. 잘 지내서 나쁠 거 없으니 그냥 넘기래.
저 자식은 꽤 유명한 천재라고 다들 떠받들고 학교에서도 쉬쉬해. 저놈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여자애도 있었어. 소문인지 뭔지 몰라도 그 선배가 임신을 했다느니, 자살을 했다느니 그런 말이 떠돌고 있다구. 저번엔 ... 저번엔 .... 내가 전학을 갈 수 있겠어? 내가 뭘 할 수 있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여학생은 화가 난건지 서러움에 복받친 건지 모를 목소리로 쉴새없이 떠들다가 말을 뚝 끊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지? 그제서야 깨닫고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흠, 진실을 말하게 하는 능력도 부여받은 건가? 어쩌면 저승사자에게는 그런 능력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줄 수 있을 테니. 그래서인지 아니면 여학생이 갑작스런 자살 소동에 변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건 좀 두고 봐야 알듯하다.
이왕 능력을 부여할 거면 마음속까지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지.
"혹시 저놈이 조순철인가? 과학교사 마흔 아홉?"
"어떻게 알아? "
여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한번 해본 소린데 맞는 모양이다.
"맞아?"
"응."
"다행이네. 내가 찾던 놈이 저놈이라서. 너 죽을 필요는 없겠다. 내가 데리고 갈 거야, 저 악마는. 진짜 악마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버릴 테니 너는 이제 나쁜 생각 하지마라."
"뭐라고? 그게 ...."
여학생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김혁을 바라보았다.
"공부도 잘하는 것 같은데 저런 녀석을 능가하는 천재, 니가 하면 되잖아. 그게 좀 힘들면 천재 아들을 하나 낳든지....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얼굴이 붉어지거나 그러진 않았겠지? 여고생한테 쓸데없는 말을 ....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해야겠단 생각에 계속 말을 이어갔다.
"뭐 세상도 저런 천재 하나 사라진 거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 그런 말인데 암튼, 무슨 천재가 저런 삶을 사냐? 천재가 맞긴 맞아? 에디슨 정도는 돼야 천재지. 여자애들이나 만지는 놈을 갖다가."
"푸핫."
갑자기 여학생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가 오렌지색으로 변했다. 이제까지 나던 공포의 냄새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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