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악마가 원하는 것, 악마의 리스트
“돌아왔군.”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혁은 어느새 지옥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지옥 문 앞 공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얼핏보면 새빨간 덩어리 같으나 사람 형상을 한 작은 악마가 공중에 떠서 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땠나? 복수를 한 느낌이.”
악마는 빙글 빙글 웃고 있다.
“좋지만은 않지. 난 악마가 아니니까.”
김혁은 복수도 끝났으니 이제 불구덩이로 갈 일만 남았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나왔다.
“흠, 그 결기가 마음에 든다니까. 어때, 계약을 좀 연장했으면 하는데.”
계약 연장?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김혁이 미처 뭔가를 묻기도 전에 갑자기 한켠에서 겁에 질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어디야? 날 놔줘. 뭐하는 거야? 꿈이지? 꿈이 안 깨. 아, 놓으라고.”
돌아보니 뚱뚱한 고아원 원장이 다른 악마에게 끌려가며 반 실신 상태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원장이 지옥문으로 사라질 동안 악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런 인간이 어쩌다 고아원을 맡아가지고. 불구덩이 속에서 한 100년쯤 불에 타는 벌을 받게 될 거다."
원장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까지 보고 나서 악마를 바라보니 악마는 가로젓던 고개를 멈추고 말을 이어간다.
"잘 한 거야. 김혁. 앞으로 서정이나 다른 애들은 편안하게 잘 살게 되겠지. 너는 여럿을 구했으니 네 형벌이 조금 감경될 거다.”
그러나 김혁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시 잊고 있었던 원장에 대한 분노가 새삼 끓어올랐다.
“아니, 악마와 천사가 있었다면 왜 진작 저런 놈을 잡아가지 않은 거지? 왜 우리 같은 어린애들이 고통 받게 그냥 둔 거야?”
“그 원망은 인간들에게나 해. 널 버린 부모라든가 널 개패듯 하던 저런 놈한테나 하라고. 거긴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우리는 지금 이 공간에서만 너희들을 만날 수 있지. 안타깝게도 죽어야 만날 수 있는 존재들이거든 우리는. 계약 연장 얘기를 좀 더 해볼까?”
“무슨 계약을 연장하자는 거야?”
“너는 쇠사슬에 묶여 불구덩이에 처넣어지기엔 너무 아까워. 너무 어린 나이에 희생된 것도 마음에 걸리고. 좀 더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해줘도 괜찮을 것 같단 말이지. 원래부터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놈들을 데리고 일을 하면 꼭 뭔가 사단이 나. 너라면 깔끔하게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아. 천국에 가려다 못 간 녀석들이 일을 썩 잘 해. 드물어서 문제지. 난 그런 애들이 더 좋더라. 히힛!”
새빨간 덩어리가 불규칙하게 크기를 늘였다 줄였다 한다.
“나더러 무슨 일을 하라는 거야?”
“뭐 서정을 위해 한 일과 비슷한 일이지. 네가 가서 저런 원장 같은 인간들을 좀 더 빨리 데려와 준다면 우리도 좋고 인간 세상도 좋은 일이지. 저런 것들이 세상에서 활개를 쳐서 그런지 천국은 미어터지고 지옥은 텅텅 비었어. 뭐 쉽게 말하면 저승사자 같은 것이랄까.”
“뭐라고? 나더러 계속 이 짓을 하라는 거야?”
“죽어 마땅한 것들이잖아, 안 그래? 저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숨어서 더러운 짓거리 하는데 벌도 안 받아. 서정 같이 불쌍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제대로 들여다보면 아마 놀라 자빠질 거라니까. 뭐 어떻게 보면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하는데 일조하는 거라고 볼 수 있지.”
김혁은 뭔지 모르게 악마에게도 화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악마새끼가 천사인 척 하는 거냐? ”
“뭐라고?”
갑자기 시뻘건 화염이 악마의 몸을 휩싸고 확 불타올랐다.
“내가 네 친군 줄 아나?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너를 저 불구덩이에 처넣을 수 있는 몸이란 말이다!!”
김혁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자신이 지옥 문 앞에 있다는 것이 좀 실감이 났다.
내가 무슨 선택을 할 수나 있나? 어차피 지옥불에 떨어질 거라면 서정 같은 가엾은 애들을 위해 원장 같은 인간들을 좀 더 잡아들이는 게 뭐가 어떻다는 것일까? 하지만 원장이야 증오가 깊었으니 꺼리낌이 없었지만 다른 자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게 가능할까?
“직접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들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가서 보면 알지. 선량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해치라는 게 아니잖아. 아마 너에게 그런 능력이 생긴 걸 다행으로 여기게 될 거다. 아무렴. 이제껏 안 그런 녀석을 한 놈도 못 봤으니까. 나야 아직 수백 년 밖엔 못 겪어봤지만. 뭐.... 암튼.”
“그들을 어떻게 구분하지?”
“목록이 있어.”
“개입할 수 없다며?”
“물론. 개입은 안 하지만 이쪽으로 올 때를 대비해서 기록은 쌓아두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겠나?”
“좋아.”
“으하하하, 그래, 그래. 우선, 가만있어보자.”
악마는 손을 비비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더니 한참만에 손에 종이 한 장이 나타났다. .
“이거면 우선. 시험삼아 해보지 뭐.”
악마가 넘겨 준 종이, 한 장 가득히 빼곡한 명단에는 주소지나 직업, 남녀 구분 같은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전국구군.”
김혁은 리스트를 대충 훑어보고 말했다.
“재밌는 여행이 될 거야. 으하하하.”
악마는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시골의 작은 고아원에 살던 열 여덟살 짜리 고등학생이 갑자기 저승사자가 돼서 이승과 저승을 왔다 갔다 할 줄 누가 알았겠나!
악마가 부여해준 힘 때문인지 키도 좀 커진 것 같고 힘도 세진데다 제법 듬직한 사내 티가 난다. 아무도 나를 열 여덟살 짜리로는 보지 않을 것 같다.
밤에만 인간의 몸을 하고 다닐 수 있다 이거지? 낮에는 공기처럼 투명해져서 인간들 눈에 보이지 않고. 물론 만지거나 말을 걸거나 하는 것도 안 된다니 낮에는 그야말로 유령일 뿐.
유령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건가? 불친절한 악마는 종이쪼가리 하나 주고는 별다른 설명조차 없이 느닷없이 여기다 떨어뜨려 놓았다.
리스트의 첫 번째 장소, 도심지의 제법 큰 여자고등학교.
[S시, 조순철. 남자. 49세. XX 고등학교.과학 교사]
과학교사라, 음 학교 선생이 여학생들을 어떻게 한다는 거야 대체. 악마한테까지 찍힐 정도면 장난이 아닌 모양인데 이거, 어디서 찾는다지?
낮의 학교 운동장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소리 한점 없는 운동장을 걸어간다고 생각했는데 투명한 몸은 붕 날듯이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 날 수 있군. 멋진데?
그 참에 운동장 위를 한바퀴 돌았다. 미풍이 얼굴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그 넓은 운동장을 몇 바퀴나 뱅글 뱅글 돌았는지 조금 어지럽다 싶었는데 몸이 어느 교실 벽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아, 뭐야 벽도 통과해? 정말 대단하다.
둘러보니 영어 수업중인 교실이다. 모두 여학생들뿐인 교실은 무척 낯설기도 했다.
시골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는 이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교실에서 지금의 반도 안 되는 남녀 학생들이 섞여 수업이 이뤄졌었다. 본인이 공부엔 별로 흥미가 없었던 학생이었던지라 그런 아이들만 눈에 잘 들어온다.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는 여학생, 교과서 밑에 소설책을 끼우고 읽는 여학생, 단발머리를 늘어뜨린 채 얼굴을 교묘히 가리고 졸고 있는 여학생도 있었다.
하, 조는 모습이 귀엽네.
김혁은 과학 교사 조순철을 찾아 수업중인 이 교실 저 교실을 기웃거렸다. 누가 누군지 그냥은 알 수 없었다. 교무실에도 딱히 이름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누군지 알아낼만한 게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수업 종료 벨이 울리고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학생들만 득시글거리는 풍경이 낯선지 김혁은 옥상 끝에 앉아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시골에 두고 온 서정이 떠올랐다.
정이는 잘 있겠지?
김혁은 어느새 오래 전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