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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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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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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12.17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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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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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22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DUMMY

가벼운 차림으로 순찰을 돌던 병사도, 무기를 손질하던 기사도, 마력의 순환을 다스리기 위해 개인훈련 중이던 마법사도, 모두가 같은 표정과 같은 몸짓으로 눈앞에 나타난 지진의 원흉을 올려다본다.

그들은 치밀하게 훈련받았으며 각자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온 숙련자들이다. 온갖 위협과 변수가 넘쳐나는 죽음의 늪을 뚫고 지나오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깨달은 가치는 단 한 가지, 사고와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그런 그들도,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존재 앞에서 온몸이 굳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생명체라고 보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다.

누렇게 반짝이는 두터운 등껍질. 그 껍질이 보호하는 몸통이 연달아 이어져 있고, 몸통과 몸통 사이의 연결부분마다 양쪽으로 기괴하게 뒤틀린 다리가 꿈틀거린다. 뿔처럼 솟아난 더듬이 아래로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엔, 집게처럼 갈라진 입이 치명적인 날카로움과 함께 몸통과 같은 색의 체액으로 빛나고 있었다.


“템피드.......?”


백과사전이나 다름없는 고도의 머리는 어렵지 않게 이 절지생물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그러나 그녀의 말끝에 의문이 뒤따른 것은, 땅속에서 튀어나온 ‘저것’이 자신이 기억하던 ‘템피드’라는 지네와 같은 생명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전 속의 템피드는 아무리 커봤자 최대크기가 어린아이의 팔뚝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놈이다. 하지만 저 괴물은 성인남성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듯한 크기. 하지만 그 믿을 수 없는 크기보다도 고도의 경악을 훔쳐낸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벌레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괴한 팔들의 끝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검과 도끼. 게다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몸통과 몸통 사이의 연결부분은 마치 특수제작 된 갑옷처럼 금속으로 뒤덮여있다.

고도는 그 거대한 괴리감 속에서도 묘한 합리성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저 생물의 본래 모습이 저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덕분에 그녀는 순간 자신이 명령권자라는 사실을 잊고 말았고,

첫 번째 희생자는 그녀가 있는 여관 바로 아래에서 순찰을 돌고 있던 병사였다.


“-!”


비명의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병사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이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숨이 끊어지기 직전 허공을 향해 솟구친 것이 자신의 상반신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와하하하하-! 저게 뭐야?!”


오히려 고도의 정신을 일깨워 준 자극제는 렌의 경박한 웃음소리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어깨 위를 침범해온 렌의 손길을 뿌리치며, 그대로 창문 밖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저, 전투준비! 전투준비 해!”


영력이 실리지 않은 미약한 목소리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고도는 거침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살면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목은 곧바로 갈라져 버렸지만, 고도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고함을 외쳤다. 덕분에 여관 근처에 있던 몇몇 기사와 마법사가 상황을 파악하고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바닷빛 눈동자는 그들의 상황을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두 동강난 병사의 시체를 잘근잘근 썰어먹던 템피드의 입이, 어느새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압감이 다르다.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만, 병사는 물론이고 기사 앞에서도 이 정도의 위압감은 느낀 적이 없었다. 예전의 고도였다면 처음 스탠울프와 조우했던 그때처럼 얼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전투마법사라는 직책에 물들어있었다.


‘열.’


그녀의 머리는 곧바로 사전에서 읽었던 템피드의 속성을 끄집어낸다. 반평생을 땅속에서 지내는 이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열’. 템피드는 온도에 굉장히 민감한 지네로, 특히 사육장의 온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명시되어있었다.

고도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에 신경을 집중한다. 그 마력은 고도의 계획된 내성에 걸러지며 점차 순수한 속성의 성질을 띠게 되었고, 그녀의 손끝에 모였을 때엔 이미 새빨간 빛으로 분출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소름끼치는 굉음과 진동을 동반하여 템피드가 이쪽으로 달려드는 순간, 고도의 손끝에서 눈부신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실로 기초적인 화염마법. 그러나 그 불꽃의 크기와 품고 있는 열기의 깊이는 기초와는 거리가 멀었다.

화염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지네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주춤한다. 그러나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템피드는 수많은 무기를 휘적거리며 화염을 걷어내기 위해 애를 썼고, 불꽃의 근원지와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이윽고 도끼를 쥔 팔 하나가 높이 빛을 발했지만, 고도는 옆으로 몸을 던져 간신히 그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불꽃으로는 저 지네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찧은 무릎을 감싸며 일어서는 고도의 얼굴에 당혹감은 보이지 않았다.

저 곤충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저 곤충을 저딴 식으로 개조시켜놨는지는 몰라도, 그들 또한 템피드의 약점을 훌륭히 보완하여 군용으로 내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애초에 고도는 불꽃만으로 템피드를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열’에 대한 템피드의 신체반응을 염두 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템피드는 온도환경이 바뀌면, 자신의 체액을 외부로 배출시켜 일시적으로나마 생존기간을 늘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외피로 체액이 스며드는 그때야말로 템피드라는 생명체가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


고도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은빛의 줄기 하나가 템피드의 물렁해진 외피를 꿰뚫으며 박혀버린다. 눈은 없었지만, 지네는 천천히 자신의 심장에 박힌 회색 단창을 내려다보았고, 그대로 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다.


“허어, 관통시킬 생각이었는데. 더럽게 딴딴하네.”

고도와 같은 곳에서 뛰어내린 렌이 놀랍다는 얼굴로 지네에 박힌 자신의 단창을 빼내었다.

“그나저나 엉겁결에 던지긴 했는데, 만약 내가 안 도와줬으면 어쩔 뻔했어?”


위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흡을 정돈하는 고도. 그런 그녀를 향해 비죽 웃으며 다가오는 렌. 그러나 그를 올려다보는 고도의 눈동자에 감사의 기온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너한테 말한 거 아니거든?”


“흐응?”

천천히 고도의 시선을 쫓아가는 렌의 눈동자. 그 끝에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는 여기사가 한 명 있었다.

“하하, 그러셔.”


진득해지는 렌의 미소를 한동안 노려보고 나서, 고도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킨다. 급하게 피하느라 까진 무릎에선 피가 맺히고 벌레의 체액이 스며들기 시작한 도로에선 익숙한 악취가 피어오른다.


아무것도 없던 도시가, 어느새 혼란으로 가득해지고 있었다.







벤은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지네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계곡 중턱을 내려서는 순간, 굉음과 함께 땅속에서 튀어나온 이 괴물은 곧바로 자신의 앞에 있던 병사들을 썰어버리더니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며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주춤하는 벤을 대신하여 벌레의 팔을 잘라낸 것은 다름 아닌 오스타이나의 영주, 할라시드 로쿠베.


“씨이발! 내가 말했잖아! 괜히 통신도 못하고 산속에 틀어박혀 있던 게 아니라니까!”


팔이 잘린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을 향해 오스타이나의 기사들이 하나둘 달라붙기 시작했고, 배 쪽을 난자당한 지네는 결국 고약한 체액을 흩뿌리며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저게....... 저게 뭐죠?”


“템피드라는 지네입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꽤나 달라진 모습이지만요.”


벤은 대답이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허연 백골 하나가 로브를 둘러쓴 채 다가오고 있었다.


“지네? 지네를 저런 괴물로 변형시킨 거라고요? 비스트마스터가 저런 것도 할 수 있었나요?”


“비스트마스터가 아닙니다.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 템피드는 제대로 무장까지 하고 있었지요.”


오캄푸스의 말에 벤은 다시금 벌레의 흔적을 쫓아 아래를 내려다본다. 분명, 지네의 몸통은 갑옷으로 뒤덮여있었으며 각 팔에는 무기가 쥐어져 있다.


“저것들이 밤중에 갑자기 도시 곳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어! 영력은커녕 기척조차 없는 놈들이니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씩씩거리는 로쿠베. 벤은 마침내 도시 곳곳에 파여 있던 구덩이가 마법에 의한 폭격 때문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영력에 반응을 하고, 심지어 마력까지도 잡아내서 통신병들부터 싸그리 전멸시켜버리더군.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병사’들이야. 더 혐오스러운 게 뭔지 알아? 놈들은 우릴 죽이고, 곧바로 먹어버린다는 거다. 분명 우리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한 짓거리겠지. 씨발!”


부하들이 잡아먹히는 장면이 떠오른 듯, 로쿠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간다.


“비스트마스터도 없이 저게 가능한 일인가요? 명령대로 움직이는 변형괴물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야생동물의 개조와 병기화는 ‘인형’의 병기화와 더불어 예전부터 제국에서 추진해오던 전력증진계획 중의 하나입니다. 그 주체가 마법학회 쪽이 아니라 자세한 사항은 저도 모르지만, 대전쟁 당시 제국이 비슷한 부대의 운용을 시도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시도? 결국 실패했다는 뜻인가요?”


“예. 한 가지 중대한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캄푸스의 마지막 대답에는 벤뿐만이 아니라 로쿠베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의 시선도 집중된다. 그들의 눈동자가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지 망자는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다시 턱뼈를 움직인다.

“바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하는 중계자입니다.”


“중계자? 저것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까?”


“야생성과 변형된 개체의 모든 변수를 예측할 수는 없었기에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했지요. 하지만 통신마법사들이 암호화된 마력으로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저들 또한 군집마다 특정 영력에 반응하기로 설계되었습니다. 그 중계자 역할을 하는 기사가 명령을 내리지 않거나 죽어버리면, 저들은 곧바로 한 마리의 벌레로 되돌아갑니다. 투자에 비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나 이런 약점이 너무도 명확했기에 200년 전의 실전에서는 실패로 돌아갔던 겁니다.”


“.......폐기되었던 계획이 다시 표면으로 나타났다는 건.......”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있는 오스타이나 성의 전경. 그러나 그곳에 이미 평화는 사라져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과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미간을 찡그린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벤에게, 오캄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을 맺는다.


“예. 이미 폐기된 계획을 다시 끄집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제국의 사정이 위태롭거나, 아니면 그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다는 뜻이겠지요.”


“.......”


언급한 조건은 두 개였으나 생각할 수 있는 답은 하나.

벤은 갑작스럽게 밀려 들어오는 상황에 지끈 아파오는 이마를 부여잡는다.


“어쨌든 그 중계하는 새끼만 잡아 족치면 된다는 소리잖아? 뭘 꾸물거리고 있어?”


검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며 재촉하는 로쿠베였지만, 대답하는 벤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시는 물론이고 이런 산중턱에까지 괴물이 숨어있었어요. 정말로 한 명의 중계자가 통솔하고 있었다면 이런 범위는 말도 안 되는 거죠.”


“그게 뭔 소린데?”


“중계자가 여럿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중계자라는 존재가 없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뭐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벙찐 표정을 지어보이는 로쿠베. 벤은 한참이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더니, 이내 로쿠베를 향해 굳건해진 얼굴을 되돌린다.


“영주님은 영력을 숨기는 데 능숙한 기사들을 데리고 주변 계곡을 계속 탐색해주세요. 만약 중계자가 여럿이라면, 분명 도시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에도 숨어있을 겁니다. 그 후에 남쪽 진입로로 합류해주세요.”


“남쪽 진입로? 성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어요.”


자신을 향한 분노도, 적을 향한 환멸도 아니었다.

벤의 얼굴에 피어오른 것은, 깊은 ‘걱정’과 그로 인한 아주 전형적인 ‘짜증’일 뿐이었다.




“시작해보기도 전에 병력을 손실할 수는 없습니다.”






=======================






“모든 전선을 통해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베르달숲에 확장해놓았던 모든 전초기지로부터 통신이 두절 되었고, 투입될 시기를 놓친 예비대는 1030시를 기준으로 모두 퇴각 완료했습니다.”


보고서를 내려놓는 쥬넨. 그의 목소리에 이어서 댄이 입술을 움직인다.


“생각보다 베르달의 전력이 빠르게 회복되었던 모양입니다. 반격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현장지휘관들의 잘못도 분명 있지만, 어디까지나 군단장님이 그들을 자극한 탓이지요. 정식으로 들어온 것은 없으나 현장에선 아마 지휘관들의 불만이 가득할 겁니다.”


“하하, 그거 무섭군.”


아린 아이의 투정이라도 듣는 듯한 브란트의 태도에, 결국 댄의 미간이 뒤틀리고 만다.


“베르달 영주의 딸입니다! 무슨 목적이 있으니까 납치하신 거 아닙니까? 적이 먼저 움직이고 있는데, 적어도 인질교환을 위한 조건이라도 제의하셔야지요!”


“음, 딱히 목적이 있어서 납치한 건 아닌데. 그냥 그 아이가 운 좋게 내 앞에 나타났을 뿐이고.”


육중한 배를 흔들며 와인을 병째로 들이키는 군단장. 방안 가득 번져나가는 와인향과 그의 태도에, 결국 댄은 폭발하고 만다.


“브란트 장군! 제발 군단장으로서의 책임을 가지십시오! 하루하루 술에 취해 사고나 치라고 본국에서 복직시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이 코앞으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본국의 영토, 마즈다힐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영력을 다해 내려친 군단장의 책상이 파편을 튀기며 내려앉는다. 그 위에 발을 올리고 있던 브란트였기에 자세가 무너진 것은 당연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넘어지지도, 와인병을 놓치지도 않고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복직이라......, 핫. 댄, 너는 내가 이곳에 다시 온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지?”


“반역으로 즉결처형하셔도 좋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2군단의 모든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크핫, 역시 넌 솔직해서 맘에 들어. 원한다면 배신해도 좋은데? 배신이야말로 자네들 특기 아니었나?”


“.......!”


분노를 넘어 치욕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댄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빛은 쥬넨도 마찬가지였다. 카나반을 배신하고 적국에 자리 잡은 두 기사를 싸잡아 능욕하는 상관의 웃음에 어찌 동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놀랍게도, 이어지는 브란트의 미소에 적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댄, 그리고 쥬넨. 너희들 말인데,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냐?”


“어떤 생각말입니까?”


그에 비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댄.


“본국에 너희 정도 실력과 경험을 지니고 있는 영관급, 장군급 기사는 많아. 오히려 아주 차고 넘쳐서 탈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희같이 조국을 배신하고 기어 들어온 것들에게 장군직, 그것도 군단장의 최측근 부관직을 맡긴 이유를 생각해 봤냐, 이 말이야.”


“저는 제국의 그 어떠한 기사보다도 훌륭하게 현장에서 충성을 증명해내었고, 그것은 쥬넨 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외에 더 이 자리에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까?”


댄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가 제국으로 귀화한 뒤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의혹과 의심의 눈초리들. 그는 꿋꿋하게 그들과 맞서기를 택했고, 마침내 카나반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의지에 의심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브란트의 미소는 점점 그 색을 짙게 띠더니 이내 커다란 웃음이 되어 집무실을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십니까?”


댄과 마찬가지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쥬넨의 표정과 목소리. 그럼에도 브란트의 웃음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멎는다.


“당연히 웃기지. 야야, 생각해봐. 내 후임으로 들어왔던 드리브달가의 말괄량이 미친년은 결국 카나반의 최선봉에 서서 우리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지. 그리고 그런 딸내미 때문에 위태로워진 자리를 수습하기 위해 2군단을 도구로 삼았던 애미년은 그대로 목이 따였고. 근데 웃기게도, 그 모든 난장판을 수습하기 위해 보낸 인간이 바로 허구한 날 쳐발리기만 하던 나란 말이야? 그리고 부관이랍시고 붙여준 게 과거 카나반에서 꿀 빨던 기사 두 놈이라고. 너네, 정말로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


침묵하는 두 기사를 향해, 브란트는 표정을 지우고 머리를 기울인다.


“마즈다힐에 ‘다음’은 없다는 뜻이다.”


“.......!”


육중한 몸 위로 피어오르는 위압적인 영력에 댄과 쥬넨은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부서진 책상에 통통한 다리를 올려놓는 이 남자는, 더 이상 술에 찌든 한량이 아니었다.


“쫓겨났다가 돌아온 나. 조국을 버리고 뛰쳐나온 너희들. 우리 셋이 가져야 할 공통점이 있지.

바로 절박함이다.

그 절박함을 통해, 우리는 ‘다음’을 만들어야 해. 상대는 카나반의 최정예 베르달군. ‘붉은 장미의 검성’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전력은 우리가 앞섭니다. 지금이라고 지휘체계를 재정립하여 효과적인 요격군을-”


쥬넨의 목소리는 와인병이 깨지는 소리에 묻혀 이어지지 못한다.


“지휘, 요격, 재정비, 전열, 전략, 타격, 작전, 다 개좆까라 그래! 정정당당한 힘싸움? 우리가 전력에서 앞서? 지랄 좆까지 마! 우린 더 이상 최강제국군이 아니야! 떨거지 패잔병들의 모임일 뿐이라고! 여기서 한발자국만 더 물러난다면,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실패와 죽음 둘뿐이다!”

광기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에,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로즈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한다.

“기사도? 좆까! 병력운용? 지랄! 우리 앞에 있는 건 전선의 사수라던가 전투의 승리 따위가 아니야! 생존,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일 뿐이라고! 그것을 위해선 나는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지금 너희처럼 고고한 기사인 마냥, 고명한 장군인 마냥 진부한 말만 내뱉으며 늘어지고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단 말이다, 이런 씨발!”


댄이 박살낸 책상을 이번엔 브란트가 거칠게 걷어찬다. 그래도 분이 식질 않는지, 브란트는 새로운 와인을 하나 꺼내들어 거칠게 들이켜기 시작한다. 그리고 병목을 따라 이어진 시선의 끝에서, 그는 떨고 있는 소녀 하나를 발견한다.


“.......”


천천히 아이를 향해 다가가는 브란트.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나, 비틀거리는 몸집에 겁을 먹은 아이는 더욱 움츠러든다. 지켜보던 쥬넨마저도 순간 만류를 위해 움찔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군단장의 뒤룩뒤룩한 손은 떨리는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이 꼬마 말이야, 참 신기하단 말이지. 여기 온 뒤로 먹지도, 화장실도 가지 않았어.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울질 않더군.”

소름끼치는 미소로 뒤덮이기 시작하는 브란트의 입가. 이번에야말로 움직이려는 쥬넨의 팔을, 댄이 조심스럽게 붙들어 움직임을 봉쇄한다.

“이런 걸 보면 한번 울려보고 싶단 말이야. 어때, 한번 내기해보지 않겠나?”


“.......사양합니다.”


“거 재미없긴. 농담이다. 나 하는 거 잘 보라구.”

브란트는 크게 웃으며 꺼윽 크게 트림을 한 뒤에 소녀의 앞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로즈는 그런 그의 얼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지만, 군단장의 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꼬마야, 나 좀 봐봐. 배 안 고파? 화장실 가고 싶지 않아?”


“.......”


“음, 그래? 그럼 아빠엄마는? 아빠랑 엄마 보고 싶지 않아?”


아빠와 엄마라는 단어에 로즈는 고개를 들어 새카만 눈동자로 남자의 미소를 바라본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


“.......응.”


“응, 그렇구나. 보고 싶구나. 그런데 이를 어째?”

술냄새를 가득 풍기며, 소녀의 흐려진 눈망울로 얼굴을 들이미는 브란트.

“영원히 아빠엄마 못 만날 텐데? 절대절대로 못 만날 텐데?”


“.......로즈 이제 엄마아빠 못 만나?”


“응. 못 만나. 내가 못 만나게 할 건데? 영원히 못 보는데?”


“.......엄마아빠 볼 거야.”


소녀의 커다란 눈가로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것이 어찌나 즐거운지, 브란트는 크게 웃으며 소녀의 미간에 자신의 손가락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와하하하하! 못 만난다니까? 영원히 못 봐! 너네 엄마아빠 내가 죽여 버릴 거거든!”


결국,

로즈는 울음을 터트린다.

거대한 울음소리에 창문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책장이 흔들릴 지경이었지만, 브란트는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그 광경을 바라보는 댄과 쥬넨의 얼굴이 밝을 리 없었다.


“자- 그럼.”


소녀의 눈물에 만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제국2군단장.

어느새 그의 얼굴엔 붉은 술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엄마아빠랑 협상하러 가볼까?”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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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6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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