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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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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9.0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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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DUMMY

어둑한 겨울밤 아래로 흐르는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 같은 장소였지만 올라선 인물도, 그리고 품고 있는 표정도 몇 시간 전과 역전된 상태였다.


“뭐, 포로 교환이야 늘 있는 일 아니었나요? 뭘 그리 짜증을 내고 계시나.”


그리고 굳어있는 수많은 눈빛들 사이로 유일하게 여유로운 벤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성벽 아래로 흘러든다. 물론, 그는 자신을 향해 있는 수많은 적의를 눈치챈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가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


“.......”


바로 수많은 나무줄기에 구속되어 있는 렌의 존재였다.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벨레이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나반의 왕족이라는 훌륭한 가치의 포로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에 빠졌던 그였다. 일방적인 통보로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던 협상이었지만, 되돌아온 빈스가 들려준 ‘뒤바뀐 협상’ 내용에 그는 한숨을 짓게 되었다.


제멋대로인 데다가 반인륜적이며 지휘관으로서는 무능의 극치.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오열’의 양아들이다.


과연 그에게 카나반의 왕족이 포함된 2천 명의 가치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 가치를 자신이 판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벨레이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일이면 중앙에서 북군과 남군의 대대적인 교전이 벌어질 예정이다. 벤이 꿰뚫어 본대로, 그는 이런 곳에서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는 중앙의 답문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성문을 열어라.”


렌의 얼굴을 확인한 벨레이가 짤막한 명령을 내린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는 피폐한 성문이 거대한 마찰음을 일으키며 입을 벌렸고, 그 안에서 달빛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장해제 된 수많은 카나반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있던 푸근한 얼굴을 확인한 벤의 입가로 미소가 스미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자, 데려가.”


벤의 손짓에 벨레이를 향해 움직이는 렌과 꿈틀거리는 줄기들. 곧바로 뒤에서 지켜보던 빈스가 달려들어 렌의 몸을 옥죄고 있는 줄기들을 벗겨내려 노력하지만, 단단한 마력으로 무장된 줄기들은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포로 인도가 완료되면 풀어줄 거야. 기다려.”


벤의 느긋함에 빈스는 곧바로 적의를 품은 시선을 날려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까지 저 ‘같은 얼굴의 사나이’가 마력을 쥐고 있는 이상, 그의 의지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주인은 뒤틀린 줄기에 압사당할 테니까.


워낙 성의 규모가 작았기에 2천의 인원이 모두 빠져나오는 데에도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벤은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성에서 빠져나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선두에 있었음에도 가장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토우칸과 카논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에야 그는 손짓을 하여 렌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자유를 되찾은 렌의 입술이 처음 내뱉은 말은, 당연하게도 그와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는 남자를 향한다.




“이 땅은 너무도 좁아. 반드시 우린 다시 마주하게 되겠지. 서로 어떤 자리에 앉고 어떤 시간을 보내든 간에, 결국 너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내 악몽 속의 너와 그년, 그리고 네 악몽 속의 나.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결코 희미한 눈빛이나 굳은 표정뿐만이 아니라는 걸.”


“아아, 그러셔.”


미련은 남기지 않는다. 자신의 등 뒤로 꽂혀오는 수많은 적의와 의문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는 벤의 발걸음은 이번 겨울에 내딛었던 그 어떤 발걸음보다도 가벼웠다.



렌의 말대로, 그들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음에 또다시 같은 얼굴을 마주하게 됐을 때는 서로 어떤 감정과 어떤 시간을 품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 그들의 겨울은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자, 그럼.”


닫히는 성문을 뒤로하고, 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 기사들, 그 모든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짓는다.




“집으로 갑시다.”






===================






“용케 귀족들을 설득했네.”


“설득? 난 설득 같은 거 한 적도, 할 생각도 없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오직 명령 아니면 협박이야.”


지친 하루를 끝내고 마침내 보상의 시간이 찾아왔건만, 시작부터 업무의 연장으로 몰고 가려는 디미르 탓에 대답하는 크리스의 목소리엔 다소 불평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디미르는 이런 ‘왕의 불만’을 마치 귀여운 투정으로 여기는 듯, 특유의 느긋한 미소와 함께 의자받침대를 손으로 톡톡 건드린다. 그 손짓의 의미는 분명했기에 크리스는 곧 표정을 풀고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내던진다.


“그럼 뭐라고 명령한 건데? 설마 ‘디미르 경이 올라가자고 했으니까 까짓 거 한번 가보자.’ 이러지는 않았을 거 아냐?”


디미르가 꺼내든 것은 그가 엑스클라마트의 단장으로 취임할 당시 크리스가 선물해준 푸르스름한 빗이었다. 그녀는 ‘그 휘날리는 머리 좀 정돈하고 다니라’며 그의 눈동자색과 비슷한 빗을 하사한 것이었지만, 정작 그의 머리칼은 여자보다도 얇고 가느다랬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그 빗을 쓸 일은 없었다. 오히려, 밤마다 크리스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듬는 데에 본분을 다하는 중이었다.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억지로 설명하겠어? 그건 일종의 기만이야.”


“허어, 언제부터 그렇게 신하들을 신경써주셨데?”


푸석한 머리카락들과 함께 엉킨 마음까지 부드럽게 녹여주는 디미르의 빗질. 크리스는 의자 위에 반쯤 누운 채로 그의 손길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계속된 그의 질문과 비아냥거림에 미간만큼은 구겨진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망설임과 조급함을 보았다고 했지. 나는 그게 너의 ‘느낌’이기 때문에, 그 한마디에 이 전쟁의 말로를 기대해보는 거야.”


“ ‘전쟁’이 아니지요, 폐하. 어디까지나 ‘군사반란’이라고.”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마음을 풀고 있었어.”


빠른 인정과 사과.

그녀를 자기중심적인 폭군이라 부르는 자들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크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디미르는 미소와 빗질을 이어간다.




“나는 그가 될 수 없어.”




안식에 젖어 희미해져 가던 크리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발하며 위를 향한다. 거꾸로 마주하고 있는 디미르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가 방금 내뱉은 말이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너에게 그가 되라고 명령한 적 없어.”


“알아. 하지만 그는 이 왕국에 필수적인 존재지.”


“그는 기사의 본분을 잊은 반란분자일 뿐이야.”


“1년 전, 10년 전의 너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


물론 알고 있다.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가 브린타이나 왕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사인지, 그리고 악의와 의심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왕위에 오른 자신을 끝까지 지켜주며 힘을 실어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크리스의 분노는 더욱 깊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버렸어. 아마 지금도 그 영감탱이에게 ‘왕에 대한 기사로서의 본분과 왕국을 위한 길, 둘 중 무엇이 당신에게 우선시되는 미덕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지. 왕국은 물론이고 반도 전체의 기사들에게 ‘기사도’란 개념을 재정립해준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네가 언젠가 물었었지, 그런 아버지를 둔 기분이 어떠냐고. 그리고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나?”


“ .......‘토할 것 같다’고.”


“응, 그랬지.”

눈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계속 이어지던 빗질이 마침내 멈춘다. 디미르는 가지런해진 크리스의 머리를 완전히 쓸어넘겨 그녀의 이마를 드러내고는 그 위로 자신의 차가운 입술을 내리꽂는다.

“사실 그거, 거짓말이었어.”


“뭐?”


이해할 수 없다는 크리스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디미르는 이어서 굳어있는 그녀의 목근육과 어깨를 풀어주기 시작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절차였으나, 그 손길에 담겨있는 미세한 위화감이 크리스의 긴장을 돋운다.


“나는 그 영감탱이를 존경했어. 아니, 지금도 존경하고 있어. ‘기사로서’ 말이야.”


“.......그럼 왜-”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


그가 될 수 없다-.

‘오열의 검성’처럼 강한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블라르 트리스탄테’처럼 애국적이고 모범적인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디미르는,

‘그’라는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한 검성이라고는 해도 어쩔 수 없는 필멸자의 숙명. 그의 시간은 끝나게 되어있고, 누군가는 그의 빛을 이어받아 광명을 뿌려나가야 해. 하지만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창을 내미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처음 그에게 창을 건네받는 순간 깨달았지.

이 아이는 내가 될 수 없구나.

나는 그가 될 수 없구나. 라고.

이건, 단순히 내가 일찍이 그에게 받은 창을 버리고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야. 이 왕국이 ‘블라르 트리스탄테’라는 존재에 너무 의존해왔고 그의 존재감에 익숙해졌기에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라는 존재는,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금씩 완성된 작품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의 피를 이어받고, 그가 직접 후계로서 지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

내가 그에게서 봤다는 ‘망설임’과 ‘조급함’이 무엇인지, 이젠 알겠어?”


가장 위대한 아버지. 그리고 그런 위대한 빛을 절벽 아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들. 그 절벽은 아버지가 손을 내밀기엔 너무도 높았고 아들이 혼자서 오르기엔 너무도 험했다.

그래서 둘은 서로 마주하길 포기했다.

아버지는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다른 절벽 아래를 찾아 헤맸고, 자신은 절대 절벽 위의 빛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고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빛은 흐려졌으며 지상 위의 그림자는 짙어져 갔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결심을 한 것은,

절벽 위의 아버지였다.



“.......그럼.......그럼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건데?”


몸을 돌려 앉아 디미르와 똑바로 마주하는 크리스의 얼굴에서 분노나 불안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순수하게 궁금한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디미르가 정면으로 그의 아버지와 부딪치려 하는지.

어째서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것인지.


그녀에게 있어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이 질문 앞에서도, 디미르는 절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첫째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너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는 가만히 왕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가슴에 품는다. 덕분에 크리스는 잠시 그의 얼굴을 놓쳐야 했고, 그 사이 디미르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노릇 좀 해보려고.”










어째서 지금 어젯밤의 대화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디미르는 덕분에 지금 자신의 처한 상황에 대비되는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잊었던 전장의 혼란이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흐린 하늘을 향해 있는 시선을 움직이지 않는다. 비명의 가까운 반즈의 외침이 귀를 때리고, 저릿하고 싸늘하게 손을 타고 올라오는 낯선 기운에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사방으로 파편을 뿌리며 박살난 창은 이미 손을 떠난 뒤였다. 자신의 영력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다한 것인지, 아니면 이쪽의 목을 꿰뚫으며 파고든 아버지의 창을 막아내지 못한 것인지는 디미르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버지의 창날에 묻어있는 것이 자신의 피라는 사실 뿐이었다.


“.......”


뒤늦게 목에서 피어오르는 통증. 시선을 내리자 이스누시아 연철로 도금된 아버지의 창대가 보인다. 그가 한번 자신에게 물려주었었고, 자신이 다시 되돌려준 ‘콴탈루엘의 눈물’, 바로 그 창이었다.


“.......알고 있었나.”

먼저 입을 연 쪽은 아버지였다. 노인은 여전히 창대를 붙잡고 있는 채로 무거운 목소리를 흘린다.

“주저 없이 치고 올라오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사실 반신반의했어. 근데 이걸로 확실해졌네.”

여유롭게 웃는 디미르. 부자가 내뿜는 영력의 충돌을 견디면서 가까이 있을 수 있던 사람은 오직 반즈 뿐이었기에, 그녀는 깜짝 놀라 디미르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녀의 위치에선 검성의 창이 그대로 디미르의 목을 꿰뚫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고 있었던 탓이다.

디미르는 천천히,

자신의 목 옆을 살짝 찢고 지나간 아버지의 창대를 붙잡는다.

그러나 창을 빼앗을 시도나 그대로 반격해갈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창대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꽤 오래되었다.”


“이유는?”


“원래 기사의 생명이란 양초의 불꽃과도 같은 것. 영원히 타오를 것 같다가도 너무나 쉽게 사그라지는 법이지.”


여기까지 와서도 훈계질인가.

그러나 디미르는 비웃지 않는다. 붙잡고 있는 차가운 창대를 통해 느껴지는 아버지의 영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에.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수천, 수만 명이, 그것도 적도 아닌 같은 국민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피를 흘렸어.”


“ ‘오열’이라는 이름을 무너트리기엔 적당한 숫자지.”


“그런 말을 누가 납득하겠어?!”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모두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다!”


영력이 실리지 않은 냉정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바라만 보던 반즈가 깜짝 놀라기엔 충분한 목소리였다.



“보아라, 이 참상을! 내 한마디만으로 왕국이 둘로 나뉘어 서로 피를 흩뿌리고 있다! 내 한마디에 정당한 왕은 가신들에게 의심을 받았고, 내 한마디에 귀족과 영주들은 같은 국민을 향해 칼을 겨누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브린타이나 왕국에 ‘오열의 검성’이란 이렇게 터무니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상징성이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바로 그 상징이 사라진 뒤의 왕국이다. 왕이 누군가를 대체자로 내세워도, 심지어 내가 직접 후계자를 지목하여 내세워도 아무도 그를 새로운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다. 군부는 물론이고 모든 귀족, 영주들까지 혼란과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하겠지! 단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백 년의 세월과, 수백 번의 전장, 그리고 수만 명의 목숨을 통해 ‘오열’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말 한마디만으로 국가를 둘로 나눌 수 있는 그 무결의 상징을 뒤이을 수 있는 목소리는 왕국에, 그리고 그의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블라르가 지닌 가장 커다란 책임이자 숙명이었다. 그가 없는 왕국의 미래에 남겨질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밖에 없었기에.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그의 아들은 그의 무결성을 쫓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새로운 아들은 그의 무결성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바로, 자신의 무결성을 깨트리는 것.




“명분이 빈약한 반란. 잘못된 병력운용. 독자적인 제국과의 밀약까지. 이 모든 것이 ‘오열’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해줄 역사들. 바로 너희가 널리 퍼트리고 파헤쳐야 할 요소들이었다.”


“잠깐, 제국과의 밀약이라니?”

잡고 있던 창대를 끌어당겨, 한층 노인에게 다가서는 디미르.

“당신 설마-”


“그래.”

굳건한 표정이다. 그 어디에도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확고함이, 디미르에겐 최대의 경악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내가 왕좌를 찬탈한 뒤에 군사동맹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제국의 3군단장, 카이우스 드레브냑과 불가침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그 불가침이 깨져버렸으니, 지금쯤 3군단이 국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터. 내가 왜 북쪽으로 물러나 너와 론크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겠느냐? 상황이 급박해진 것이다.”


디미르는 줄곧 궁금했다.

어째서 내전 기간 동안 아실레마가 움직이지 않은 것인지.

가장 확실한 기회의 순간에 어째서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던 것인지.


같은 악마국이라서 브린타이나를 존중해주려는 배려가 아니었다.

단순히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속국’으로서의 신 브린타이나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남자, 오열의 검성이라는 존재의 이름을 빌려서........!



“.......만약, 만약에 우리가 당신의 의도를 파헤치고 막아내지 못했다면 어쩔 셈이었어?”


자신도 그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크리스도 자신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걸었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타국의 변수’, 그가 모든 사실을 꿰뚫고서 움직인 것인지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벤이 오열과 제국의 협정을 무너트리지 않았다면,

차가운 불꽃의 여왕이 오열의 희미한 불꽃마저 감당할 수 없었다면,

즉,

블라르가 ‘검성’으로서 왕국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은-.




“역사를 보존하는 방법은 다양하지. 설령 그것이 지배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굴욕의 나날들이더라도.”




검성은 제국이라는 도박판 위로 왕국이라는 패를 꺼내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도박에서의 승리와 패배가 동시에 들이닥친 그에게, 이제 탁자 위로 넘길 수 있는 자본은 오직 하나.


“이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반란을 주동한 나의 죄를 물어라. 적국과 밀약한 나의 죄를 밝혀라. 전투에서 패배한 나의 무능을 내보여라. 오열이란 존재가 얼마나 허황된 상징이었나를 파헤치고 증명해라. 그리고 그런 나를 몰아낸 정당함으로써, 미래를 다지고 제국에 대항하라.”



적국의 기사마저도 존경을 잊지 않는 존재.

브린타이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높은 존경을 받았던 검성.

그 이름에 깃든 영광의 시간들.


기사로서 평생을 다 바쳐 이뤄낸 한 남자의 모든 것.

수천 년의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스쳐간 수만 명의 기사들이 이루지 못한 그 업적을 발판삼아 국가의 중심을 다잡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자신이 세운 모든 이름을 무너트리고, 그 조작된 악명의 위로 새로운 정의를 세우라 그는 말하고 있다.


단순히 한 남자의 일생이 아니다.

그가 거쳐 간 목소리들, 그를 바라보았던 목소리들, 그가 만든 목소리들, 그를 믿었던 목소리들,

그 모든 이들의 신뢰와 근본을 배반하라는 뜻이다.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영광대신,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이어질 ‘악명’으로 남기를 그는 자처하고 있다.


오직,

미진한 아들과 왕국의 미래를 위하여.



디미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이미 손끝으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영력은 안타까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남쪽에서 맞붙었을 때 느꼈던 ‘평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것이야말로,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불꽃’이었을 테지.


“.......결국, 화살은 나에게 돌아온 거네.”


그리고 디미르는 그제야 이 거대한 연극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한낱 조연으로서 왕과 아버지의 불꽃을 바라만 보려던 그는, 어느새 가장 강렬한 불씨가 되어 그들 아래에서 열기를 꽃피우게 된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미안?

익숙하지 않은, 아니, 익숙하지 못한 아버지의 사과.

그러나 아버지의 사과 그 자체가 디미르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저런 말을 내뱉고 있는지, 지금의 디미르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미안해야 할 건 이쪽이지. 내가 처음부터 도망친 탓에, 당신의 그림자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주저앉았기 때문에, 당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어야 했으니까.”


“.......그것이 미안하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창을 너에게 물려주었을 때를 기억하나?”


“당연하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모든 것이 시작됐던 날.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 날이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느껴서 그 창을 다시 내려놓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때가 처음으로 나의 가슴 속에 조급함이 피어난 때였다.”


“.......조급함?”


디미르는 순간 자신이 붙들고 있는 창대의 무게가 순식간에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반대편의 손이, 그것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의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의 기질 또한 보았지. 그때 나는 깨달았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 아이도 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촉박하다고.”


“.......”


그날, 창을 건네받던 바로 그날,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느꼈던 감정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방치했다. 내가 조급함이 떠밀려 너를 독촉한다고 해도,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창이 아닌 검을 잡는다 했을 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에게 나의 그 무반응은 곧 무관심으로 다가섰을 테지. 네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 늦었지만 사과를 하고 싶다. 그리고 결국 완성되지 못한 너에게 짐을 맡기는 무능한 아비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고 싶다.”


이 남자가,

자신이 보았던 모든 기사와 영혼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남자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것도 진심과 세월을 담은,

흐릿하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 위로.



“그러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비로서’ 부탁을 하마. 이 모든 일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이제 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응, 알고 있어.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노릇 해보겠다고 올라온 거니까.”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빠르게 ‘콴탈루엘의 눈물’을 고쳐 잡는 디미르. 전장의 혼란 속에서 둘의 경합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에게는, 마치 검성의 창을 낚아챈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디미르는,




가볍게,

아주 가볍게,




창을 앞으로 내지른다.




신음이나 비명은 없었다.

오히려 지켜보던 이들의 탄식이 흐린 하늘을 향해 더욱 크게 솟구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흐렸던 하늘은, 결국 모든 열기와 거짓된 피의 온기를 식히기 위해 봄비가 아닌 마지막 겨울의 눈송이를 대지 위로 흩뿌리기 시작한다.

겨울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순결의 한기였지만, 결국 그것은 겨울의 종말을 맞이하는 마지막 목소리.




“.......눈이었군.”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는 자신의 흐린 눈동자 바로 앞으로 하늘하늘 낙하하는 작은 눈송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 작은 결정의 흐름을 따라 가만히 시선을 내리던 그의 시선 아래로, 결국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아들’의 회색빛 창이 모습을 드러낸다.

“디미르, 올겨울은 따듯한 편이었나? 감각이 무뎌져서 말이지.”


“물론.”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하고 느긋한 아들의 대답.


“.......그런가. 그럼....... 올 봄은 화창하겠군.”


미끄러지는 검성의 시선.

그리고 그와 함께 떨어지는 디미르의 시선.


둘은 마지막 순간에도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수십 년간 그들 사이에 불편하게 흘러오던 ‘그 이유’와는 달랐다.



부자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아버지. 전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버지에게 닿았는지, 닿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디미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눈과 함께,

겨울이 끝난다.


작가의말

「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 디나스아리얼 출신, 브린타이나 왕국군 총사령관이자 ‘기사’, 향년 1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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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3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4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6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4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1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4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7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4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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