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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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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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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12.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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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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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17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DUMMY

“회의에 앞서, 개인적인 불찰로 이런 사태를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미안하다.”


어두운 돌벽으로 둘러싸인 바크달룬성 본궁의 회의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트린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날카롭고 차가웠지만, 그 마른 입술이 담은 내용에 경악하지 않는 얼굴은 없었다.

왕도, 왕비도, 그리고 늑대의 딸도, 수십 년간 그를 보좌해온 부관들에게도,

머리를 숙이는 늑대의 모습은 익숙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대, 대장.......”


“아무리 성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엄연한 최전방 전초기지. 이런 ‘전장’에서 아이를 멋대로 풀어놓은 건 분명한 나의 잘못이다. 거기에 신원불명의 포로가 수감되어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것도 심각한 실책, 게다가 지금은 왕의 시찰 중이었다. 만약 표적이 로즈가 아니라 왕이었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을 수도 있는 일. 베르달의 영주이자 지휘관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불찰이었다. 왕을 비롯한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군사재판이라면 달게 받겠다.”


“괜찮습니다. 우선 로즈를 되찾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하죠. 책임은 그 후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로빈이 크라트의 사과에 대해 사무적으로 반응한 것은, 이미 개인적으로 그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로빈과 지나를 찾아와 머리를 숙이며, 회의에서 자신의 실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기를 요청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베르달의 용사들에게 일종의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언제나 철저하고 무결한 존재로만 인식되어왔던 늑대의 ‘사과’는 순식간에 회의장 안을 긴장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되찾는다- 라고는 말했지만, 사실 지금 범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없잖습니까.”


로빈의 검붉은 시선에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늑대의 딸, 올리.


“처음 그를 발견한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분명한 만취상태였다고 합니다. 영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몸의 단련수준이나 상태 또한 군인하고는 거리가 멀었기에 모두 방심한 겁니다.”


“그와 직접 대면한 기사들은 물론이고 크라트 경조차도 영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사가 확실하다는 말씀입니까?”


로빈의 질문은 질책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의 의문에 가까웠다. 감각과 본능에 있어서는 공화국 최강이라 평가받는 베르달의 기사들, 그것도 그 본진이나 다름없는 바크달룬 성에서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서로의 역량을 파악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영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은폐하는가-이다. 즉, 그자는 만취상태에서도 자신의 영력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물론 그가 특정한 목적을 지니고 잠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모두가 그 완벽한 은폐에 허를 찔린 것만은 확실하다.”


딸을 납치당했다는 극단적인 상황과 지휘관으로서의 실책. 크라트의 목소리는 차가웠던 평소 때와는 다르게 다소 상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력을 잘 감춘다고해서 강한 기사라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아니, 놈은 충분히 강했다. 베르달의 병사와 기사를 맨손으로 제압한 것도 모자라 수백 명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을 맺기에 앞서 잘근, 입술을 한번 씹는 크라트.

“로즈의 완력으로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기사의 강함을 재는 척도로써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여자아이의 완력을 내세우는 것은 분명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회의실에 앉아있는 모든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라트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성인 기사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 꼬마 아이의 힘을, 그들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대장님은 범인의 정체가 아실레마의 기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기사가 아니야.”

로빈의 말에 대답한 것은 크라트의 마른 입술이 아니었다.

회의실 입구 왼측면의 구석, 화사한 조명이나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과는 동떨어진 음지에서 내리깔린 목소리는 그 어떤 온기도 거부하는 한기를 품고 있었다.

“놈의 이름은 스이바노 브란트. 아실레마 황제직속특무대 ‘케테르학살단’ 출신의 기사야.”


언제나 얇고 붉은 드레스만 고집해오던 그녀였기에, 남색정복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은 분명 색다른 인상을 풍긴다. 거기에 검은 금속재질의 영력사출식경갑과, 언제라도 주인의 부름에 답할 준비가 된 세 자루의 연철검은 한기가 뒤섞인 중압감으로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계신 겁니까? 하지만 엘라는 놈의 얼굴도 보지 않았잖아요?”


“뚱뚱하고 비대한 몸집과 언제나 위기감이라곤 찾을 수 없는 만취상태. 거기에 영력을 감추는 탁월한 능력까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그놈이야.”


엘라는 혼잣말을 내뱉듯 로빈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물론, 그녀의 의견에 의문을 품고 있는 이는 로빈뿐만이 아니었다.


“스이바노 브란트.......?”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크라트의 미간.

“.......그는 네 전임자가 아닌가.”


“맞아. 내가 가문빨로 2군단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당신에게 깨지기만 했던 그 남자야.”


“.......그럼 우린 제국의 군단장이었던 기사를 포로로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로빈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직접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엘라의 증언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크라트만의 실수로만 볼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적이었던 내가 봐도, 군단장으로서 그의 실적은 본국에서 처형당했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가 보직해임 당한 것도 국경관리실패와 전투에서의 연이은 패배 때문이었지. 지휘관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제국에서, 그것도 군단장이라는 직책이었던 자가 다시 현장으로 복직될 수가 있나?”


“단순한 복직이 아냐.”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이 가득한 엘라의 목소리.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그녀의 먹색 눈동자는 창문 너머 하늘을 향해있었다.

“그는 다시 군단장으로서 마즈다힐에 돌아온 거야.”


“.......!”


크라트와 로빈은 물론이고, 그녀의 말에 집중하던 모든 이들의 표정과 입술에서 경악이 흘러나온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는 이미 실패한 지휘관이다. 그런 자를 군단의 최고지휘관으로 복직시켜야 할 정도로 제국이 인재난에 허덕이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럴 이유가-”


“절박함은, 나태의 사도 레이즈엘마저도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뿜게 만들지. 제국은 그런 절박함을 무기로 그를 전선으로 몰아낸 거고. 이제 그는 그 어떤 무모함도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 테니까.”


엘라의 확신은 회의장 안으로 불편한 침묵을 선사했다. 그녀가 이곳, 베르달에 온 뒤로 가장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를 부정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그리고 깊은 침묵에 끝에서 흘러나온 지나의 목소리는, 모두가 애써 불편함 아래 묻어두고 있던 사실을 끄집어낸다.


“결국, 우리는 적의 지휘관에게 직접 안방을 내어준 것도 모자라 영주의 영애까지 빼앗긴 거네요.”


“........”


크라트와 엘라의 눈빛이 동시에 분노로 타오른다. 그러나 그 분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지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직 로즈의 행방에 대한 어떠한 보고도 들어오지 않았죠. 아이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 협박도 소식이 없습니다. 우린....... 많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해요.”


간접적으로 의견을 요구한 로빈이었지만, 누구나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범인의 행동이 우발적이었는지, 계획적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 그들이 로즈의 ‘목숨’을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해올지, 아니면 그 ‘목숨’조차도 이미 잔혹한 반격의 서막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닌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만약에....... 그들이 나를 요구한다면. 절대로 나를 막지 마. 막을 생각도 하지 마.”


차갑게 내리깔리는 엘라의 목소리. 늑대는 간신히 고함을 삼킨 목소리로 아내를 바라본다.


“이상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협상 따윈 하지 않는다.”


“좆까! 할 거야! 나를 원한다고 한다면 나를 내어줘! 베르달을 원한다고 한다면 베르달을 줘버리라고!”


“이곳 시민들과 병사들이 너를 받아들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결국, 크라트는 바닥까지 무너트릴 기세로 책상을 내려치며 분노를 불태우는 아내의 눈동자를 향해 묵혀두었던 고함을 내뿜는다.

“영주의 아내로서 다시는 그런 말을 내뱉지 마라! 물론 로즈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그건 너와 너를 품고 있는 이곳, 베르달도 마찬가지야! 원망하려거든 로즈를 지키지 못한 나와 그런 무능한 나로부터 로즈를 빼앗아간 그를 원망해! 수십 년간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온 영혼들을 모독하진 마라!”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지나의 중재에도 늑대와 꽃잎의 눈빛은 사그라지질 않는다. 둘이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어렵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차가워져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엘라의 말대로, 만약 그가 정말로 군단장으로서 복귀한 것이라면 의문점이 많게 됩니다.”


“의문점?”


부부를 대신하여 되묻는 로빈. 그에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아실레마 본국이 그를 복직시킨 이유로 한번 실패한 자의 ‘절박함’을 생각하셨죠. 하지만 보세요. 만취한 상태로 적진에 침입해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영주의 딸을 납치한다? 그것도 군단장이라는 사람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


순간, 차갑게 식어가는 크라트와 엘라의 머리.


“작전이라기엔 너무 허술했습니다. 오히려 우연에 더욱 가까운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만약 진짜로 그의 침입과 로즈의 납치가 우연이었다면, 우리는 스이바노 브란트라는 남자의 기질, 그리고 그를 넘어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아실레마제국 제2군단에 대해 본질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확인을 위한 탐색전으로서-”

지나는 천천히 뒤쪽의 벽에 내걸린 전술지도를 향해 태양처럼 빛나는 시선을 가져가며, 단호하게 목소리를 맺는다.






“선제공격을 제안합니다.”





=========================





아무리 감각이 날카로운 야생동물이나 기사일지라도, 분지의 중앙을 향해 미끄러지는 바람을 등진 채 움직이는 소녀의 그림자를 눈치채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


게다가 불꽃과 얼음벽이 휘몰아치는 듯한 몽환적인 눈동자에선 그 어떠한 생명의 기운도 느낄 수가 없다. 얇고 반짝이는 은발을 휘날리며 도약하는 소녀의 그림자는 숲을 벗어난 뒤에도 그 속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면과의 마찰은 최소한, 마치 저고도비행으로 먹잇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활강하던 소녀의 그림자를 붙든 것은 적군의 고함도, 아군의 시체도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악취.

소녀는 통통한 얼굴을 찡그리며 자연스럽게 자신 코를 향해 작은 손가락을 가져간다. 만약 비위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구토를 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봐 악취의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초록빛의 언덕과 오스타이나성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뿐. 이질적인 존재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건 충분히 이질적이다.


소녀가 그 위화감을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마비된 코로부터 손을 떼어낸 그녀가 다시 한 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이내 확신한다.


소녀는 그림자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당하게,

길을 따라 성으로 접근한다.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한 동작도, 사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동작도 없이, 느긋하게 성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다가선다. 만약 ‘그와 그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경악하며 말렸을 터. 하지만 그녀의 위화감과 확신에 찬 발걸음은 성문 바로 앞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의 코에 익숙한, 악취가 아닌 악취가 풍겨온다. 성벽 외곽 곳곳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생명의 잔재가 내뿜는 비릿한 향. 그 위협을 깊게 들이마시며, 소녀는 조심스럽게 성문으로 손을 가져간다.


소녀의 완력은 상당하다.

단련된 기사의 팔을 가볍게 부러트리고, 일격으로 그들의 내장을 파열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거대하고 육중한 성문을 비틀어 열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한다.

그녀가 성문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그것이 반파된 채로 반쯤 입을 벌리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바람과 피비린내가 동시에 통하는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미는 소녀.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오스타이나 지역 전체를 휘감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휘권은 당연히 우리한테 있지! 너흰 지원군자격으로 온 거뿐이잖아!”


“형님은 너희와 함께 오스타이나를 수복하라고 했지, 네 지휘를 받으라고는 하지 않았어. 여긴 아직 브린타이나 영토야. 브린타이나 정규군이 지휘권을 갖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지?”


“말이 바뀐다? 억지 부리지마. 넌 그냥 내 뒤통수를 치고 싶을 뿐이잖아.”


“어휴, 그럴리가요? 고명하신 카나반의 검성님께 누가 감히 이빨을 드러내겠습니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설전. 사실 그들이 주고받는 것은 이미 설전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의 유치한 고집싸움에 가까워져 있었다. 카니아는 이미 질렸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나무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중이었고, 고도는 같이 열을 내주고 있긴 했지만 벤이 렌의 고집을 꺾는 데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다 양보해서 네가 지휘한다고 치자. 작전은 뭔데?”


깊은 호흡으로 화를 정돈한 벤이 마침내 한걸음 물러난다. 그러나 그것을 친절로 받아들일 렌이 아니었다.


“당연히 너네가 선두에서 돌진하고, 우린 후방을 맡는 거지.”


“개소리하네 미친 새끼가!”


벤을 대신하여 욕설을 퍼붓는 고도. 그러나 렌은 비죽 웃으며 소녀의 분노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다.


“뭐 아니꼬우면 서로 독자적으로 움직이던가? 우리가 북문을 두들길게, 너흰 남문을 두들겨. 그럼 되는 거 아냐?”


“절대 안 돼.”


어찌 보면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그러나 벤은 렌과 그의 군대를 시야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변칙적인 결과를 내놓을지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렌의 질척거리는 미소가 다시 한 번 이어지려는 순간,

풀숲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하나가 나타난다.

렌을 보좌하는 기사들은 순간 신경의 날을 세우며 경계심을 내뿜었으나, 이미 그 작은 그림자의 ‘무존재성’이 익숙한 카니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이구, 이건 또 맛있어 보이는-”


흉측한 렌의 시선과 소녀의 사이를 가로막는 벤. 그는 살짝 숨을 헐떡이는 이리스의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물론 소녀에게 보상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벤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소녀를 향해 입술을 움직인다.

그리고 소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벤이 다시 입술을 움직였고,

소녀는 다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게 두 번을 더 하고 나서, 벤은 천천히 일어나 소녀에게 육포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표정엔 당혹스러움이 서려있었다.


“.......뭐야, 왜 그래?”


불안이 번지는 얼굴로 벤을 향해 다가서는 고도.

벤은 잠시 턱을 쓰다듬더니, 고도와 렌을 번갈아 바라본다.


분명,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인간은 이 말을 듣자마자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의 더러운 미소를 보는 것보다 기분을 잡치는 일은 이 세상에 없지만,

벤은 결국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쥐어짜낼 수밖에 없었다.





“.......오스타이나성이 비어있데.”


“.......뭐?”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구기는 고도와, 껄렁대던 몸짓을 멈추는 렌.


“아군도, 적군도, 그리고 시민도, 아무도 없데. 지금 오스타이나성 자체가 아예 비어있는 상태야.”


벤의 먹색 시선이 고도의 어깨를 넘어 같은 빛의 눈동자를 향한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곳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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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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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2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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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7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2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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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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