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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42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6.01 22:43
조회
921
추천
35
글자
20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DUMMY

“폐하, 드라흐마 경이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라흐마 경이?”


회의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오즈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브린타이나의 전황과 베르달군의 재편, 그라우치 장군의 재판, 엘라론 드리브달의 행방, 그리고 서출차별금지법안과 아델 가슈펠라르에 대한 습격사건까지.

요즘 들어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업무의 홍수에 휩쓸려 제대로 된 식사시간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로빈과 의원들이었다. 결국 자신이 먼저 나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회의를 끊고 잠시 숨을 돌리자 제안한 로빈. 이것은 동시에 늦은 점심식사를 위해 마련한 토막시간이기도 했는데, 왕이라는 직책은 오늘도 그에게 점심이라는 값비싼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모양이다.

문제는, 그 시간 강탈의 장본인이 자히르 드라흐마라는 점이었다.


“아니, 그냥 아르보리스로 바로 가면 되지, 뭐 하러 또 들렸데?”


“본래 군 최종임명권은 검성에게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특별히 폐하와 의원들의 의사가 반영된 인사 아닙니까. 신고식을 폐하께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 의사는 별로 반영이 안 된 것 같은데....... 난 진짜 거부권이라도 행사할까 고민했다고.”


전장과 중앙군에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영주의 자리까지 오른 자히르 드라흐마. 그러나 그가 최전방의 사단장이나 중앙군의 요직을 얻지 못한 것을 두고 언론에선 지방귀족출신의 한계라며 수도권 귀족들의 독식체계에 대해 연신 비난의 날을 세웠었다. 심지어 그와 동기이자 비슷한 길을 걸어온 댄 스파인이 결국 최전방 장군직을 내팽개치고 제국으로 귀화하는 사건이 터지자 그 강도는 더욱 거세졌는데, 심지어 그때의 인사에 검성의 의사가 정반대로 반영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 논란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타오르던 비난의 불길은, 당시 검성이었던 아뮤르 한센이 소문을 일축하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 선언함과 동시에 자히르 본인도 인사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표명한 뒤에야 사그라질 수 있었다. 이런 과거가 있었기에 북부사령관 후보명단 중 자히르의 이름이 나오자 의원들은 별다른 마찰 없이 의견을 모으게 된 것이다. 차별금지법안의 취지는 물론이고, 그가 가진 역량과 자격 모두가 부합한다는 결정에 고개를 가로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로빈도 그 결정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입술이 끊임없이 욕설을 머금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아, 폐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눈에 띄는 적갈색의 곱슬머리. 온몸을 감싸고 있는 정복으로도 단단한 그의 몸을 감추기엔 역부족이다. 기사로서의 근엄함이 묻어나오는 몸가짐과 기풍은 이미 사령관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말끔하게 밀어버린 수염과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멋들어진 미중년의 미소는 역시나 로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손을 맞잡으며 자히르의 붉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로빈의 경직된 입술이 바로 그 증거.


“반갑습니다, 드라흐마 경. ‘붉은 모래의 가도’가 아직 봄맞이 정비가 끝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오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셨나요?”


“예에, 뭐어.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르바티앙의 복구는 어떻습니까? 별도의 중앙예산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베르달의 사정도 만만치가 않아서요.”


능숙한 움직임으로 찻잔을 내놓는 로빈과, 그에 전혀 사양이나 거리낌 없이 접대용 탁자에 몸을 놓는 자히르.


“괜찮습니다. 피해가 항만을 비롯한 외성에 집중된 지라 광범위하긴 합니다만, 자체예산으로 어찌어찌 되겠지요. 누구 덕분인지 아르바티앙에 돈은 많거든요. 하하하.”


“아아, 예에...”


역시 저 자만에 가득한 표정은 익숙해질 수가 없다. 로빈은 떨리는 입술로 애써 미소를 지으려다가 결국 그 어색함을 찻잔으로 가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히르는 로빈을 느긋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날짜를 잡으셨다고요?”


“감사합니다. 때가 때인지라 정확한 날짜는 아직이지만,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단출하게 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단출하게-라니요, 엄연한 국왕의 결혼식입니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간만에 들려주는 좋은 소식인데, 이럴 때일수록 대대적으로 치르셔야지요. 아르다르의 시민들이 축제를 맛본지도 꽤 오래 지났습니다.”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마누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러나 로빈은 그 내용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야 지나가 하자는 대로 할 생각입니다. 애초에 이번 결혼 자체도 그녀가 많이 양보했기에 가능한 거였으니까요.”


“흐음, 양보라.”

탁자 위로 몸을 기울이는 자히르. 특유의 느슨한 움직임과 표정이었지만 로빈은 그런 그의 입술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육중한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검성과 왕족이라는 틀에 갇혀 고생하더니, 기껏 그 굴레를 벗겨주기 위해 스승님께서 자리를 내놓으시니 그제야 아뮤르의 이름을 따르겠다고 발버둥 쳤죠. 결국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왕비라는 종착역에 다다른 그녀의 이름은 이제 폐하라는 굴레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양보라니요? 그녀는 폐하를 위해 희생하기로 정한 겁니다. 핏속에 흐르는 이름을 거부하고서 말이지요.”


“아직도 그 말씀이신가요. 당신이 검성이 되고, 그녀가 당신과 결혼했으면 행복했을 거라고?”


로빈은 침착했다. 천천히 차향을 음미하는 그의 표정은 자히르가 저지르고 있는 그 어떠한 무례도 용납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최근 본궁에선 말이 많은 듯합니다만, 결국 혈통이란 건 기사에게는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개념입니다. 10년이나 20년, 어쩌면 6-7년 뒤엔 그녀가 검성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폐하의 곁에선 아닙니다. 본궁에서 그녀는 그저 한 명의 여인으로밖엔 남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아뮤르라는 이름의 피를 각성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사로서의 피를 존중하고, 또 그를 최대한 발현시킬 자신이 있어요. 설사 그녀 본인이 검성이 되지 못하더라도, 저의 피와 그녀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는 훌륭한 검성의 재목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 공화국의 미래를 위한 투자일지, 폐하께선 고민을 해보셔야 합니다.”


“마치 제국 같은 발상이로군요.”


“제국이 강한 것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로빈은 그 순간 자히르에 대해 새로운 감정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새로운 형태의 혐오나 분노가 아니었다. 자히르의 경박한 외견과 모욕을 서슴지 않는 어조 뒤에 가려져 있던 ‘그 나름대로의 진심’을 읽어낸 것이다.

어쩌면, 이 남자가 굳이 자신의 신경을 긁는데 열중하는 것은 이런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로빈의 머리에 스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국익을 위해.......라는 말씀이시군요.”


“뭐, 제 나름대로의 사욕도 가미된 의견입니다만.”


이를 드러내며 유쾌한 웃음을 내뱉는 북부사령관. 피부색과 대비되어 한층 더 빛나는 그의 웃음소리에 로빈은 모든 감정과 사고를 제쳐두고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께는 안타깝지만, 그 녀석이 워낙 고집이 세서 한번 정한 일은 무조건 밀어붙이거든요. 죄송하지만 품고 계신 큰 뜻은 잠시 접어두셔야겠습니다.”


“긴장하시지요, 폐하. 여자의 마음이란 건 진창에서의 전투보다도 변수가 많습니다.”


두 남자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맞잡는다. 오고 간 내용을 마누앙이나 기타 의원들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테지만, 정작 당사자인 로빈의 미소는 다소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르바티앙 영주의 후임은 구하셨습니까? 되도록 선대영주로부터 추천을 받고 싶습니다만.”


“카니아 시즈키치가 어떨까 싶습니다. 시즈키치 영지도 아르바티앙에서 그리 멀지 않고, 침략 당시 사병까지 동원하여 아르바티앙을 구원해주었으니 시민과 시의원들도 납득할 겁니다.”


“카니아 경이라....... 알겠습니다. 총리께 한 번 여쭤볼게요.”


집무실의 문 앞에서 로빈은 다시 한 번 자히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건 일종의 확신이었다. 그러나 자히르는 로빈의 손을 맞잡지 않는다. 천천히 로빈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군인의 경례’를 올린 것이다.


“제 뜻은 제 목소리처럼 가볍지 않습니다. 그녀의 피는 공화국으로선 지키고 키워줘야 하는 소중한 자산. 눈앞의 감정에 흔들려 큰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폐하께서 올바른 결정을 하실 때까지 북부는 제가 잘 맡아 놓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자히르 경, 아까부터 뭔가 크게 착각하고 계시네요.”

로빈은 ‘군인으로서’ 경례에 답하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나가 어째서 흔쾌히 결혼을 승낙했는지, 단순히 그녀가 아뮤르라는 이름을 포기해서라고 생각하시나요?”


“흠?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녀가 왕비라는 신분으로 본궁에 틀어박힌 채 아뮤르의 피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놈의 왕비, 왕비. 사람들은 제3의 길이라는 걸 죽어도 생각하지 않고 제게 그렇게 강요하더군요.”


처음으로 자히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그는 다소 놀란 눈으로 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만족했다는 듯, 반강제로 악수를 해오는 로빈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들뜬 색을 입는다.



“두고 봐요, 아뮤르라는 이름은 아직 공화국에서 사라질 때가 아닙니다.”




===================




살을 터트릴 기세로 불어오던 시린 겨울바람도 전장의 열기에 맞닿는 순간 아지랑이가 되어 하얀 하늘로 솟아오른다. 구름조차 디디길 꺼려하는 평원의 열기 속에서 피어나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마법에 찢겨져나간 팔과 다리를 붙잡고 붉은 신음을 흘리는 병사들의 색을 품으며, 쌓였던 눈은 생명의 색으로 물들어간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병사와 장교들, 그리고 지휘관들은 평원에 흐르고 있는 이 전장의 음색에 분명하게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격렬한 전투다. 많은 숫자와 적은 숫자. 파고든 자와 막으려는 자. 얽히고설킨 보호막들과 눈송이보다도 어지럽게 하늘을 장식하는 마법들의 빛은 격전지의 흔한 광경이다.

어색함의 근원은, 가장 거칠고 높은 전장의 운율이 흘러야 할 중앙이었다.


회색으로 빛나는 에페검의 날이 주인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창의 머리를 쳐낸다. 하지만 주변으로 울려 퍼지는 것은 단순한 철과 철의 마찰음이 아닌,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공명음.

정면으로 부딪치는 영력과 영력.

그 크기와 가지고 있는 색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기에 내지르는 ‘무기의 오열.’ 30년을 전장에서 누빈 기사조차도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일격의 무게를 감히 예측할 수가 없다. 앞다투어 목숨을 지키고 또한 노려야 하는 전장에서 암묵적인 침묵의 고리가 형성된 장소는 바로 이 둘의 주변.

한가득 미소를 입가에 품은 채 아버지의 창을 쳐내는 아들은 마침내 수천 명의 시선을 깨닫고 갑자기 휘파람을 불더니, 붉은빛이 감도는 에페의 검끝을 털어낸다.


“다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싸움 구경하느라 바쁘네.”


“곧 끝날 테니 상관없다.”


“와하하핫! 당신 농담이 늘었구만?”

검성의 발돋움을 견딜 수가 없어 쩌억- 균열을 내뱉는 얼어붙은 대지. 뒤이어 날아드는 창끝은 그 길이와 무게가 무색할 정도의 빠른 빛이 되어 디미르의 목을 향해 날아든다. 만약 디미르가 추가적인 한마디의 조소를 위해 혀를 움직이고 있었다면 분명 창은 아들의 피를 품고 겨울하늘을 향해 치솟았을 터. 그러나 무거운 영력이 담긴 에페검은 또다시 이스누시아 연철끼리의 오열을 내뱉으며 평원의 바람을 적신다.

충격으로 인해 흔들리는 아버지의 균형. 그러나 아들은 그 지뢰를 밟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서로의 창과 서로의 검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섣부른 한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이다. 날이 닿지 못한 목표에는 미처 걷어내지 못한 힘의 잔재가 대신 파고들어 서로 생채기들을 새겨대고 있었지만, 다른 전장처럼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을 붉게 물들기엔 역부족이었다.

무너질 기색이 보이지 않는 공방의 균형 속에서,

부자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위태로운 지루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이, 영감탱이. 이미 내가 나온 시점에서 당신네 계획은 저지된 거라고? 눈이 있으면 뒤를 봐. 나아가질 못하니 후방이 무너지고 있어.”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걸 보니 너야말로 불안한 모양이군. 고작 수천의 상대도 제압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는 꼴이라니, 이런 줄 알았으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겠는데.”


“앞으로도 나설 일 없을 거야. 지금 무덤으로 들어갈 테니까.”


말꼬리조차 남기지 않고 아버지를 향해 도약하는 디미르. 그렇지 않아도 얇은 검신은 설맹증에 가까운 눈의 피로를 등에 업은 채, 가늠할 수 없는 신속함을 무기 삼아 검성의 창날이 닿지 않는 간격을 향해 파고든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지만, 둘 중 한사람의 비명소리만큼은 울려 퍼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물론, 검성은 너무도 가볍게 그런 모든 이들의 기대를 박살 낸다.


“여전히 버릇은 못 고쳤군. 간격을 돌파하는 그 순간에 너는 너무 들떠버린다. 그 신속함으로 동강을 낼 수 있는 다른 핫바지들에겐 상관없지만, 너를 압도하는 적에게 그런 자만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고 수없이 말했을 텐데.”


“.....!”


평소와 같은 비웃음도, 아버지의 잔소리에 반박하는 목소리도 나오질 않는다. 강철도 찌그러트릴 듯 억센 검성의 손아귀 속에서 새어 나올 수 있는 목소리는 미세한 신음과 짜증의 눈빛뿐. 자신의 숨통을 죄는 아버지의 손목을 부러트리기 위해 두 손으로 붙잡아 보지만, 검성의 영력은 그 어떠한 뒤틀림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켜보는 많은 이들의 탄식을 자아내는 순간이었다.


“왜 네가 그녀의 곁에 서있는지, 왜 나의 창을 거부하고 알량한 검을 쥐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나의 손에 그 얇은 목이 붙들려 있는지. 이젠 그 이유들에 대해 생각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너의 선택이다. 네 선택의 결과물이고, 나는 네가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하겠다.”


검성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한순간 시린 빛이 떠오른다. 디미르는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다짐했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빛이 향하는 시간이야말로,

얇게나마 ‘부자’라는 이름으로 둘 사이를 잇고 있던 얇은 실이 끊어지는 순간임을.



“자아, 이제 그만 합시다.”


시선과 시선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곡도의 곡선. 디미르는 그제야 자유로워진 목구멍으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아들에 비해 여유로웠던 블라르는 갑자기 난입한 방해꾼을 향해 뒤틀린 시선을 보내며 창을 다잡는다.

겨울의 복장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하늘하늘한 도복, 길게 묶어 올린 흑발과 말끔한 턱선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브린타이나는커녕 반도 내에서도 좀처럼 찾기 힘든 복장과 분위기였기에 블라르는 단번에 청년의 출신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욘의 기사가 이런 곳엔 어쩐 일이지?”


“아이고, 갈아입는다는 게 급히 나오느라고 깜빡했네. 뭐, 그냥 용병이라고 해두죠.”


“용병이라-. 아무리 근본이 없는 용병일지라도 전장에서 검을 겨눈 이상, 자비를 내어줄 순 없네. 용서하게나.”


“햐, 역시 기사도 그 자체라고 불릴만한 분이로군요. 근본 없는 적에게도 그런 공손한 말투라니.”


평생을 진심을 저울질하기 어려운 얼굴이라 비난을 들어온 재규였으나, 이 말만큼은 거짓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기사로서 두려워하거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검성은 역사상 수도 없이 많았지만,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처럼 국경을 넘어 ‘존경’을 받는 기사는 드물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명성은 중립국이자 섬나라인 욘에도 충분히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검을 맞대고 싶다는 기사보다도 찻잔을 나눠보고 싶다는 기사들이 더욱 많을 지경이었으니.

그리고 귀와 눈으로 접했던 명성들과는 별개로, 재규는 그 실체를 눈앞에 두고 내심 약간의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직 욘이라는 존재가 이 남북전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노출돼서는 곤란하다. 그렇기에 모든 호기심을 죽이고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디미르의 죽음이 이 전투와 더 나아가 이 전쟁에 끼칠 영향력을 생각하니 저절로 발이 움직여버렸다. 자신의 말대로 단순한 ‘용병’이라고 믿어준다면 좋겠지만, 저 검성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은 마주치는 눈동자만으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더불어, 그 눈동자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는 것조차 허락하질 않을 기세.

‘부자싸움’이라는 틀이 깨져버리자 곧바로 움직인 것은 북군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만만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자들이 검성의 뒤로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고, 그들의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휘장은 국왕직속친위대 ‘엑스클라마트’의 표식. 여유로 치장했던 재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많은 자’들의 편이었다.


“검성님, 후방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대로라면.......”


“알겠다. 후퇴의 나팔을 울리도록.”

미련도, 고민도 없는 블라르의 명령. 부관은 고개를 숙이고 병사들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검성은 망설임 없이 아들을 향해 겨누고 있던 창을 거두어들인다.

마치,

더 이상 창끝을 겨눌 가치도 없다는 듯이.

“론크리스에게 전해라.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고 항복한다면 10만이 넘는 동포들의 목소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왕국의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그녀라면 알고 있겠지.”


“그 말 그대로 되돌려 줄게.”


미소를 되찾은 얼굴을 아버지를 향해 들이미는 디미르.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말에 오르는 검성의 뒷모습뿐이었다.



“놈들은 거의 포위되었소! 이대로 그를 보낼 생각이오?!”


엑스클라마트 단원들이 검성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자 질 수 없다는 듯 디미르의 곁으로 다가왔던 지휘관들 중의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애초에 규모가 작았던 북군이 꼬리가 끊긴 상태로 역주행을 하겠다고 당당히 적들 앞에서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지휘관의 목소리는, 기병대를 이용하여 후방의 두께를 더욱 견고히 한다면 그들을 완벽하게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디미르는 그들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무리 병력을 두텁게 해봐야 소용이 없어. 놈들의 후방이 궤멸된 것은 저 영감이 돌파를 멈추고 나를 상대해줬기 때문이고, 결국 저 인간이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는 거니까. 병사들을 물러. 괜히 사상자만 늘어나.”


가볍게 선발대를 격파당하고

중앙돌파까지 허용한 데다가

후퇴마저 방관할 수밖에 없다.


실로 치욕스러운 상황.


지휘관들은 저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애꿎은 땅에 전투화를 내리박지만 그 아무도 디미르의 결정에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책으로만 읽어왔던,

그리고 언제나 가장 든든한 아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열’의 존재감.


그것이 한겨울의 날카로운 한기보다도 먼저 남부군의 피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20 연봉동결
    작성일
    15.06.02 03:28
    No. 1

    거참... 여긴 멋진남자들이 많단말야... 잘보고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6.02 19:02
    No. 2

    멋진남자와 무서운여자가 판치는 세상 :)
    동결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06.02 07:49
    No. 3

    오열의 검성 진짜 속마음이 궁금하네요. 잠깐 나왔던거 같기고 하고. 가물가물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6.02 19:03
    No. 4

    불의검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제보니 검성가족은 죄다 자식이랑 못잡아먹어 안달이네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6.08 08:13
    No. 5

    검성씩이나 되려면 가족의 연쯤은 가뿐히 넘나들수 있는 멘탈이 필요해서 그런걸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6.09 00:45
    No. 6

    에볼루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가장 훌륭한 기사가 곧 가장 훌륭한 아버지라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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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6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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