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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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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6.1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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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20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DUMMY

일정한 간격으로, 귀에 거슬리지 않는 강도를 유지하며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수천, 수만 번 이 소리를 들어온 마누앙으로서는 이 짧은 알림만으로도 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는지까지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들어오시오.”


그랬기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손님을 초대한다. ‘그녀’가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이곳에 없음을 알면서도.


“아, 총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델 의원.”


생긋 웃으며 총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아델. 곧바로 떠오른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빠르게 집무실을 훑고, 비어있는 자리를 깨닫는다.


“폐하는.......?”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아하, 어쩐지 근위대가 경계심이 별로 없더라고요.”


아델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앉아도 되겠죠?’라며 접대용 소파에 몸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마누앙은 아름다운 소녀의 빛에 감춰진 그림자를 놓치지 않는다.

기사도 아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초짜 의원이, 근위병들의 경계심과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얼핏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총리의 깊은 눈동자는 어렵지 않게 그 근원을 파헤치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다친 곳은 괜찮으신지요?”


“예?”

갑작스런 마누앙의 호의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델. 하지만 곧 그의 말이 향하는 방향을 읽을 수 있었고, 활짝 웃으며 하얀 손목을 들어올린다.

“아, 이제 괜찮아요. 애초에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범인은 잡혔습니까?”


“아직이요. 제가 제대로 수사에 도움을 못 드려서....... 가주님도 적극적으로 나서주시고 있지만 영 진척이 없네요.”


“짐작 가는 바는?”


“사실상 수도권 모든 귀족들에게 미움받고 있는 걸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헷-하고 웃어버리고 있지만, 그녀가 겪은 일과 앞으로 겪을 일에 가벼움 따윈 없다는 사실을 마누앙은 알고 있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동질감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총리는 왕으로부터의 확인을 기다리고 있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아델이 앉아있는 소파를 향해 다가온다. 이어진 그의 행동은 지극히 평범한 호의였다.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내고, 그걸 찻잔에 담아 아델의 앞에 내놓았을 뿐.


“앗, 감사합니다.”


겨울하늘보다 눈부신 웃음과 함께 찻잔을 받아드는 아델. 마누앙은 고갯짓으로 그녀의 인사에 답하며 내어준 찻잔의 ‘본의’를 위해 자신 또한 찻잔 하나를 들고서 그녀의 맞은편에 앉는다.


“란다 경이 수사에 적극적이라고 하셨지요?”


“예에, 뭐어. 일단은 저도 가문의 일원이니까요. 의원직에 있는 가원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가주가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말을 마치고 아델은 가볍게 부드러운 입술로 차향을 음미한다. 여전히 느슨한 입가. 차의 표면처럼 평화로운 눈빛. 그 속에서, 마누앙은 확신을 얻는다.


“사건 당시, 현장에서 란다 경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예. 가주님이 아니셨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는데, 정말 우연이었죠.”


“정말로 우연이라 생각하십니까?”


마누앙이 찻잔을 내려놓는 것을 신호로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자리 잡는다. 아델은 입술에 차를 적신 채로 가만히 총리의 먹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무언의 전투. 그러나 경험에 있어서 절대적 약세인 데다가 선제공격을 빼앗긴 아델로서는 길게 지속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의원님께서 폐하와 함께 추진하고 계신 ‘서출차별금지법’의 최대 희생양은 수도권을 비롯한 오래된 대표귀족가문들. 만약 서출과 지방귀족에 대한 의원직할당제가 통과된다면, 여태까지 의회를 독식하다시피 해왔던 4대 가문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위축되겠지요.”


“.......”


아델은 대답대신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이제 그녀와 총리 사이의 시선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귀족파가문인 가슈펠라르와 니바르토가 가장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란다 경은 ‘가원’인 당신이 상당히 껄끄러울 수밖에 없겠지. 선대 가주의 손녀딸이자, 가장 순혈에 가까운 가슈펠라르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문을 공격하려는 셈이니까.”


“공격이라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아니, 이건 명백한 공격입니다. 거기에 의원님의 사적인 의지가 있든 없든 간에.”

공격. 사적인 의지.

이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총리는 잘 알고 있다. 아델은 순간적으로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저 먹색 눈동자. 깊은 주름과 희끗한 눈썹, 수염으로도 가릴 수 없는 굳건함은 아델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마누앙이란 인간의 존재감을 짙게 뿜어대고 있었다.

“란다 경으로선 복잡하겠지요. 어떻게든 이 법안의 입법을 막아내고 싶었겠지만, 이미 법안은 통과되었고 이제 공표만을 눈앞에 두고 있어요. 이제 와서 의원님을 정계에서 몰아내거나, 극단적으로는 목숨을 앗아간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즉, 그로서는 ‘방향’을 바꾸는 것밖엔 남은 방법이 없는 겁니다.”


“방향.....이요?”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찻잔을 채우는 마누앙.

“우선, 실질적인 위협으로 아델 의원님을 압박합니다. 거기에서 의원님의 굴복 여부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단지 어떠한 극적인 연출을 통해 당신의 신임을 얻고, 그 얻은 신임을 통해 ‘가슈펠라르’로서의 자각을 당신에게 심어주려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저에 대한 반강제적인 영향력을 확보한다-.”


“역시 눈치채고 계셨군요.”


마침내 마누앙은 얇게 미소를 띠운다. 이 소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선하고 참한 눈매와 그 어떠한 남자라도 설레게 만드는 미소 뒤로, 소녀는 착실하게 자신의 길을 밟고 있었다.

아마,

수많은 상처를 품은 채로.


“범인이 잡힐 리가 없지요. 애초에 범인을 쫓아낸 장본인이 벌인 자작극일 테니까. 수사에 협조한다는 핑계로 헌병과 근위대의 시야를 이리저리 벗겨내고 있을 겁니다. 아마 머지않아 흐지부지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의혹이 사라질 때쯤, 란다 경은 의원님께의 호의를 인질 삼아 ‘가원’으로서의 역할을 강요해올 것입니다.”


“........예. 저로서는 절대 벗겨낼 수 없는, 무겁고 차가운 굴레니까요.”

쓸쓸하게 웃으며 차를 머금는 아델. 그러나 식어버린 자신의 가슴을 덥혀줄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이 세계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베르달의 차가운 여름에도 피어난 꽃과 나무. 그 정원의 영원한 싱그러움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그러나 자신의 이름은 도무지 그녀를 자유롭게 방치하질 않는다.

“.......총리님은, 어째서 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죠? 말씀하셨듯이, 이번 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게 될 니바르토 가문이잖아요? 오히려 ‘가주’로서의 행동은 란다 경 쪽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요?”


“저는 가주라는 표면적인 지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인 가주의 업무는 사촌동생인 폴론이 맡고 있습니다. 업무시간 동안은 어디까지나 ‘총리’로서 존재하고 조언할 뿐이지요.”


“으와, 착실하시네요.”


“착실한 게 아닙니다. 당연한 직무일 뿐.”

이 남자와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드는 아델이었지만, 그녀는 그저 차향과 함께 총리의 시선을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지금 그는 마누앙 니바르토로서가 아닌, 총리 마누앙으로서 자신과 마주앉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누앙의 눈빛은 아직 평화에 물들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7시간 후, 제가 ‘니바르토’의 이름을 다시 꺼낸 뒤엔 말씀드릴 수 없는, ‘총리로서의’ 조언이 하나 있습니다만, 들어보시겠습니까?”


“조언이요?”


“가슈펠라르라는 굴레를 벗을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아주 명확하고 간단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지요.”


“.......예?”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숙이는 아델. 덕분에 미처 묶지 못한 옆머리가 잔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차향이 자신의 금발을 물들이는 것은 지금의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습격을 당한 이후로 밤마다 고민하던 문제였다.

여태까지 가슈펠라르라는 이름의 가치를 이용하여 이 자리에 올라온 자신이다. 로빈의 지지가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이 만약 가슈펠라르 가문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의원직은커녕 살아있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의도된 연출을 통해 비호라는 이름의 두터운 감시를 받고 있는 지금, 가문의 굴레를 벗어던진다는 것이 가주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저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단순히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만 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가슈펠라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힘도 없어요. 지금처럼 폐하의 지지를 받을 정당성도,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도, 어디까지나 가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들이죠.

하지만 저는 이 법안 하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요. 이제 시작입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좀 더 이곳에서 움직이고,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한 모순이죠. 가문의 힘을 흩트려놓기 위해서 가문의 힘을 빌려야 한다니.”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방법이라고.”

푸념에 가까운 자신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총리의 표정이 바뀌질 않는 것을 확인한 아델은 새로운 시선으로 마누앙을 바라본다.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뒤섞인 아델의 얼굴을 향해, 마누앙은 그의 말처럼 ‘아주 간단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가문에서 파문당하십시오. 그리고 할당제에 이어지는 보궐선거에서 ‘아델 가슈펠라르’가 아닌 ‘그냥’ 아델로서 출마하세요.”


“.......예에?”

아델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기능이 정지하면서도 이 할배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인지 꼬집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냥 가문에서 나오기만 하면 되는 문제면 애초에 그렇게 했죠! 문제는 말씀드렸듯이 가문이 없는 저는 아무런 힘도, 정당성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평민의 신분으로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선-”


“공천이 필요하지요. 예, 저도 압니다.”

짧은 정적. 남아있는 것은 마누앙의 은은한 미소.

“제가 공천을 해드리겠습니다.”


“.......예엣?!”

총리의 폭탄선언에 아델은 숙였던 몸을 크게 젖히며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내지른다. 그리고선 곧바로 집무실의 입구를 향해 붉은 시선을 옮겼는데, 이는 혹시 누가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이 본능적으로 발현된 행동이었다.

“노,농담이시죠, 총리님? 가문에서 파문당하면 저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평민이 되는 거라구요? 총리가 평민을 공천한다니, 그게 총리님께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의원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서출차별금지법’은 그저 시작일 뿐이라고.

아델,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서출귀족은 물론이고 평민과 노동자, 그리고 아인족까지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공화국 아닙니까? 그 진정한 시작으로서, ‘귀족’인 그대가 귀족의 이름을 버리고 ‘평민’으로서 의원직에 복귀하는 것만큼 이상적인 그림이 있을까요? 저는 그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로 총리님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귀족들, 특히 같은 귀족파인 가슈펠라르 가문과 분명 마찰이 있으실 거예요!”


“만약 그 ‘마찰’이야말로 제가 바라는 결과라면, 어떠시겠습니까?”


“.......예.......?”

미소가 사라진 총리의 얼굴은 어느새 가장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자의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에 비해 아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얼굴.

아무리 총리라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가주의 직무에서 한걸음 벗어난 상태라고 해도, 멋대로 평민을 공천하여 힘을 실어주는 행위는 분명 수많은 귀족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그 대상이 가슈펠라르 가문에서 파문당한 소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터. 그러나 마누앙은 자신이 직접 그런 상황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총리님, 당신은 뭘 꾸미고 계신 거죠?”


어투와는 달리, 아델의 물음은 순수한 호기심과 의문에서 비롯된 목소리였다. 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마누앙의 시선은 느긋하기만 할 뿐.





“총리님! 아, 아델도 있었네요.”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로빈의 우렁찬 목소리. 마치 해서는 안 될 밀담이라도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아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지만, 곧바로 일어나 예를 취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물론 그에 있어서 마누앙은 그녀보다 한발 빠른 반응을 한 뒤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폐하?”


총리는 이미 허겁지겁 들어서는 로빈의 표정까지 이미 읽어낸 모양이었다. 아델은 그제야 자신도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는 로빈에게 다가서며 상기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검성께서 또 일을 저지르신 것 같아요.”


검붉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난색을 표하는 왕의 앞에서, 아델과 마누앙은 서로 한번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대화의 우선순위를 암묵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




====================




“밀어붙여라! 눈앞의 적만 신경 써! 아군 마법사들을 믿으면 된다!”


한기를 찢으며 내리치는 기사의 영력 실린 목소리도, 수만의 생명이 터트리는 역동적인 포효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힘없이 죽어버린다. 이미 두 시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전투였기에 병사들의 귀는 이미 듣는 법을 잊어버린 채로 영혼이 울리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만큼은, 이미 지휘관의 외침과는 상관없이 오직 눈앞의 상대만을 꿰뚫는 중이었다.


양쪽 모두 장기전을 예상했다. 때문에 마법사들의 마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순환식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그런 마법사들의 포격마저 이제 그 빈도나 굵기가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이미 승패는 관계없이 모든 병사들은 마음속으로 오직 하나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중이었으나, 동원된 개인화기와 지원화기의 탄약이 바닥을 드러낸 뒤에도 좀처럼 퇴각의 나팔은 울리질 않는다. 지휘관들도 지쳐가는 병사들을 독려할 새로운 말이 생각나질 않아 같은 외침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입이 내뱉은 한마디의 명령으로 인해 두 시간 동안 저 아래의 평원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 전경을 내려다보는 크리스의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런 온기도 품고 있지 않았다.


“1진의 제4파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집계된 것은 아니나, 3파 공격으로 인한 아군 제4,5보병연대 손실률은 약 3할로 예상됩니다. 피해 규모는 적이 더 큽니다만, 적이 기병대를 투입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3파 공격대소속 지원화기중대의 퇴각이 완료되었습니다. 총열과 탄약의 재보급을 우선적으로 실시하겠습니다.”


“이대로 전투가 길어지면 야전병원의 수용량이 버틸 수 없을 것이란 군수과장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저마다 맡은 책무의 보고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참모들. 그러나 그들의 혀는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였으며 끊임없이 정보를 갱신하고 기억해야 하는 머리와 손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모두가 대답을 듣기 위해 크리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같은 내용만을 묻는다.


“검성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예, 전선에서 검성의 모습을 봤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흥.”

자신이 나선다면 교착된 전선쯤은 어렵지 않게 무너트릴 수 있을 터. 하지만 길어지는 전투 와중에도 전혀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 검성의 선택은 크리스에겐 만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그 수에서 앞선다 하더라도 이렇게 피해가 더 큰 전투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 현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며 적의 전력을 갉아먹을 수 있도록 지휘관들에게 방침유지를 하달하라.”


“알겠습니다.” “예, 폐하.”


국가와 국가의 존망을 걸고 정면대결을 하기엔 너무나 비좁은 평원이다. 이렇게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서도 전황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 하지만 크리스에게 있어서 옥스토브라카 평원은 그 어떤 산맥보다도 드높고 단단하게 앞을 막고 있는 벽이나 다름없었다.

저 반대편에서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단 하나의 시선 때문에.


“재규 경에게 전문이 들어왔어. 북브린타이나 서쪽 해안에 욘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상륙했다는군.”


“ ‘우리가’ 고용한 용병들이겠지.”


“아, 실수.”

실언을 인정하며 느긋한 표정으로 크리스의 곁에 다가서는 디미르. 그는 겨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전장을 내려다보며 길게 휘파람을 내뱉는다.

“이걸로 동쪽, 서쪽 모든 남침경로를 틀어막게 됐네. 저 영감탱이가 이곳으로 돌아온 것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걸 짐작했기 때문이겠지? 우리 카나반의 검성께선 이걸 노린 걸까?”


“모르지. 우린 상황에 맞춰 군을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이제 그쪽에 신경 쓸 일도, 상관할 이유도 없어.”


“햐, 매정하네. 그러다 녀석이 덥석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뒷감당은 어쩌려고?”


디미르의 장난스러운 어투를 향해, 크리스는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넌 그가 스스로 무덤을 찾는 종류의 인간이라고 보나?”


“절대 아니지.”


“동감이야. 지금으로선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는 편이 그에게는 더 도움이 될 걸.”

말을 마친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크리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천천히 디미르의 전신을 훑기 시작한다. 디미르는 그런 그녀의 시선이 쑥스러운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지만, 왕의 눈동자가 찾고 있는 것은 그의 얇은 속살이 아니었다.

“.......에페 안 차고 있네.”


“네가 명령했잖아. 난 말 잘 듣는 충실한 근위대장이라고.”


“이길 자신은?”


“글쎄에?”

농담하지 말고- 라며 내뱉으려면 자신의 혀를 거두는 크리스. 디미르의 입가는 여전히 느슨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왕을 마주하고 있었다.

“엑스클라마트의 단장이 되고 나서, 난 저 영감탱이랑 비교되는 게 싫어 어렸을 때부터 잡아왔던 창을 놓았지. 하지만 어쩌면, 저 인간은 줄곧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내가 자기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결국 창을 잡아야 한다는 걸. 남은 건 쌩쌩한 내 기억력과 저 인간의 싸움 실력일 뿐이지.”


“디미르, 나는 이길 자신이 있냐고 물었어.”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의 아들이자, 국왕직속특무근위대 ‘엑스클라마트’의 단장 디미르 트리스탄테는, 왕의 물음에 특유의 얇은 미소를 지어낼 뿐이었다.



“왕이시여, 나의 승리나 나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아. 너도 느끼고 있잖아.”


그는 아래로 삐져나와 있는 창의 날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산맥으로 가려진 북쪽을 향해 숨을 내뱉는다.




“이 전쟁의 전운은 이미 북동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는 걸.”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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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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