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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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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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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3,319

작성
15.06.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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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24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DUMMY

브린타이나 동부는 왕국의 허리를 자르고 있는 바스엘라드 산맥의 연장선개념으로, 작고 불규칙한 능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지형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색을 감안하더라도 동부의 전반적인 개발정도는 대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남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동부의 기능을 ‘전선’의 역할로밖엔 판단하지 않은 브린타이나 중앙정부의 계산 때문이었다.

수천 년간 전란의 시작과 끝을 담당해왔던 동부전선. 낮은 땅값에 이끌려 몇몇 귀족이 부지를 세워보기도 하고 제국과의 교역을 위해 상회가 진출하기도 했지만, 제국군에 의해 그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동부는 푸르면서도 황량한 땅으로 남게 되었다.

국경을 총괄하는 군사도시들을 제외한 ‘평범한’ 도시는 브린타이나 동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 대신 초소가, 주민 대신 병사들이, 경작지나 광산 대신에 철조망과 지뢰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제국을 겨냥한 이런 특징들이, 오히려 ‘안쪽’으로부터의 침입엔 취약하다는 결과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동부전선으로 향하던 보급대였습니다.”


절도 있는 목소리가 반쯤 눈을 감은 채 겨울의 숲바람을 만끽하고 있던 벤을 깨운다. 그가 그 목소리를 향해 머리를 들어 올리자, 전신을 피로 물들인 셰르의 모습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규모는요?”


“아마 도시가 아닌 국경초소로 바로 가는 보급이었나 봅니다. 트럭 10여 대로,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보급구성이 이상했죠?”


부스스 일어나 덥수룩한 먹색 머리카락을 벅벅 긁는 벤. 덕분에 그의 배를 베개 삼아 평화로운 낮잠을 즐기고 있던 이리스도 긴 하품과 함께 특유의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눈동자를 끔뻑여야 했다.


“예, 분명 북부군의 전력은 남부에 집중되어 있을 터. 하지만 보급품의 구성은 전시보다 더욱 전시 같았습니다. 새로 만든 병기들과 수많은 탄약, 거기에 기사들을 위한 연철무기까지. 마치 당장 출격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더군요. 한낱 초소에도 이런 보급인데, 도시나 전초기지에는 어느 정도일지.”


“이상한 건 그것뿐인가요?”


“그 외에 특별히 의문스러운 점은 없었습니다.”


“아니, 제 말은, 그 사실로부터 유추해낼 수 있는 이상한 점이 또 없었냐는 거예요.”


“.......”

셰르는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셔 자신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피비린내를 들이킨다. 그 나름대로 긴장을 했다는 뜻이었다.

생도의 신분으로 검성의 보좌를 맡는다는 일은 표면적으론 엄청난 영광이자 기회다. 그러나 자신이 모셔야 하는 검성이 일반적인 ‘검성’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였던 데다가, 가끔씩 지금과 같이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질문을 틱틱 던져대는 탓에 셰르는 항상 정신적 피로감에 찌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피로감과 긴장에 그가 고통을 받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이다.

오히려, 그는 이 일련의 ‘시련’들을 즐기고 있는 편이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제국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적은 없지만, 현재 북브린타이나와 제국은 협력의 관계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요. ‘흐름의 검성’도 자신이 옹립한 왕의 입을 빌어 같은 악마국으로서의 도리라는 단어를 직접 밝히기도 했고. 하지만 이 보급의 구성은....... 마치 북부군이 여전히 제국을 견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잘 파악하셨네요.”


완전히 일어나 엉덩이에 들러붙은 흙을 털어내는 카나반의 검성. 풀풀 휘날리는 먼지들에 멍하니 앉아있던 이리스가 봉변을 당하고 만다. 소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벤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그의 먹색 눈동자는 산비탈 아래로 이어지는 숙영지를 향하고 있었다.

최대한 가볍게 이동을 해야 했기에 천막은커녕 기본적인 숙영물자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위치를 노출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불을 피우는 일도 금지됐기 때문에, 병사들은 퇴로도 보장받지 못한 겨울의 전장을 맨몸으로 따라나서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는 높은 편이었다. 북부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전투를 시작으로, 소수의 순찰대를 상대한 몇 번의 교전과 보급로 약탈이 연속되는 승리라는 형태로 병사들과 생도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병사와 생도들이 불안에 잠식당할 틈이 없었던 것은, 한 명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녀는요?”


“왕녀....... 아, 리즈 말씀이십니까?”

여전히 셰르에겐 리즈=왕녀 라는 공식이 어색했던 모양.

“뭐, 여전합니다.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하고, 근무도 같이 나가고, 잠도 같이 자고. 물론 여기까지 와서 병사와 장교들 모아놓고 도박판 벌이는 건 좀 말리고 싶습니다만.”


“.......흐음.”


짧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올라온 턱을 쓰다듬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벤. 셰르는 잠시 그런 그의 반응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연다.


“지금 와서 이렇게 말씀드리긴 좀 뭐하지만....... 리즈말입니다. 이렇게 계속 괜찮은 겁니까?”


“뭐가요?”


분명 질문의 의도를 읽었음에도 되묻는 것이겠지. 셰르는 침도 삼키지 않고 곧바로 대답한다.


“아직까진 분위기가 괜찮지만, 퇴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적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꼴이잖습니까. 만약 일이 틀어지면 왕녀의 존재는 위험합니다. 그녀가 포로라도 된다고 생각해보십쇼. 본국에서 어떤 난리가 날지-”


“그렇다고 그 녀석에게 지금 돌아가라고 해봤자 처듣지도 않을 거 알잖아요. 그리고 걱정 마요. 그런 일 생기지 말라고 제가 있는 거니까. 로ㅂ..아니 왕한테도 그렇게 허락받았고.”


하나뿐인 왕녀를 적진 한복판으로 데려간다는 검성도 그렇지만, 그걸 또 허락하는 왕의 저의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맹신에 가까운 신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셰르는 자신이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과 의심이 북쪽에 발을 들여놓고 난 뒤로 서서히 희석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이 너저분하고 허술해 보이는 인간이 검성, 그것도 기사도 아닌, ‘기만용 검성’이라는 사실을 처음 듣고 나서 셰르가 느꼈던 감정은 허탈함도 불안도 아닌 체념이었다.

다른 국가들은커녕 자국에도 제대로 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검성으로 내세운 것은 분명 ‘임시적’으로는 좋은 기만책. 전쟁억제력으로서 검성의 역할을 생각해본다면, 적국이 ‘미지의 인물’을 향해 섣불리 도발해올 가능성은 낮은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 위태한 기만은 전말을 알고 있는 전 근위대장 쥬넨 니바르토가 제국에 귀화하는 것으로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검성의 실태는 물론이고 카나반 내의 주요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사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그의 귀화는 정보부가 손을 쓸 도리도 없는 커다란 변수였고, 결국 그것은 베르달의 초토화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새로운 ‘검성’을 배출하지 못한 공화국의 현실에 셰르는 깊게 실망했다. 베르달을 희생하여 그 악명 높은 ‘붉은 장미의 검성’을 잡아낸 것은 분명 실패 속에서도 빛나는 성과라 부를만하다. 그러나 제국은 200년이 넘도록 ‘흐름’이라는 한 명의 검성에만 의존해야 했던 카나반과는 사정이 다르다. 분명 ‘붉은 장미’ 델핀 드리브달은 그 혈통이나 존재감은 물론이고 제국 내에서도 최강의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성이었다. 그러나 제국에선, 그녀는 ‘영구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특유의 기사육성체제로 인하여 제국은 다른 모든 국가를 합한 수보다도 많은 기사를 보유할 수 있었고, 그만큼 검성후보자 또한 그 수와 질에서 압도적이다. 실제로 내정엔 관심조차 없었던 델핀이 최고위직인 검성이 될 수 있었던 것엔 그녀의 혈통이 가장 주효했다는 제국 내의 비판도 있었다. 그랬던 그녀의 자리가 하필 ‘전사’라는 형태로 공석이 되었으니, 이후 좌검성에 오르는 이는 오로지 압도적인 실력만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국내외 군사전문가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카나반의 검성이 공석이나 다름없는 상황임을 인지했으면서도 대대적인 침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도, 바로 군단장을 비롯한 모든 장군들의 시선이 검성이란 자리에 집중되어있는 탓이리라.


이렇듯 급박하게 돌아가는 제국의 상황에도 카나반은 새로운 검성을 선출하기는커녕 서출차별금지법이나 징병제 등으로 당장 눈앞의 전력을 메우기에만 바빴다. 게다가 이미 브린타이나에도 노출되었을지 모르는 검성을 직접 지휘관으로 파견하다니, 셰르로선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러나 체념으로 시작한 그의 평가는 벤의 밑에서 검을 잡으면 잡을수록 변화해가고 있었다. 분명, 이 기사도 아닌 데다가 허술해 보이기 짝이 없는 남자를 ‘강하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셰르는 느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검성’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변수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여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가장 특이한 유형의 ‘검성’일 것이라고.


“그럼,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검성님?”

셰르가 빠르게 굳어가는 피를 털어내며 묻는다. 하지만 이미 겨울바람은 강화복과 끈덕진 피를 하나로 묶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그는 강화복을 벗어 겨울바람에 맨몸을 노출시켜야 했다.

“순찰대를 전멸시킨 것이나 이번 습격 등을 통해서 놈들도 이쪽의 존재를 확실하게 눈치챘을 겁니다. 경로가 노출되면 그대로 토벌군을 내보낼 텐데, 3천으론 이 지역을 평정하는데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평정? 아뇨, 전 여길 공격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확인’하고 싶었다고. 이제 확인은 했으니, 행동을 해야겠죠.”


“행동이라 하시면.......”


“첫날부터 제가 말씀드린 거 있죠?”


큼지막한 하품을 내지르는 이리스를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벤. 셰르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그가 첫날 말했던 ‘그것’을 떠올린다.


“아아, 브린타이나 제복들 말씀이십니까?”


“네. 제복들이랑 군기(軍旗)들이요.”

그리고 검성의 미소는, 시선이 셰르의 얼굴로 옮겨갔음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린 커다란 연극을 할 겁니다.”




=====================




‘오열의 검성’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진급과 명령을 받은 카스나 벨레이. 그러나 그의 얼굴은 동부에 도착한 이후 줄곧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렌 경! 이게 어찌된 일이오?! 3수비연대의 병력을 전부 차출하다니?!”

천막을 박차고 들어서는 벨레이의 입가가 한층 더 일그러진다.

전술지도를 치우고 그 탁자 위에 모포를 덮어 만들어낸 간이침대. 그리고 그 위에서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렌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맞이한 것이다.

임시주둔지라고는 하나 이곳은 엄연한 군영이다. 게다가 이곳은 지휘천막이 아니던가. 엄숙한 작전회의로 하루를 시작해야 할 이곳의 아침이 사창가처럼 변모하다니. 벨레이는 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아나, 씨발 거 더럽게 시끄럽네.”


흥을 잃은 듯, 느긋한 움직임으로 탁자에서 내려오는 렌.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제복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지만, 그가 제복을 모두 갖춰 입을 때까지도 그에게 짓눌려있었던 여인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그리고 벨레이는 마침내 찢겨져나간 그녀의 제복에서 브린타이나군 부사관을 상징하는 휘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 제정신이오?! 부하를 성폭행하다니?! 상부에 알려진다면 군사재판 없이 즉결처분이오!”


“걱정마셔.”

건조한 표정으로, 바닥을 향해 늘어진 여인의 팔을 툭 건드리는 렌.

“그럴 일 없으니까.”


“무슨......, 아니......?”

벨레이는 차가운 바람에 알몸을 노출시키고 있는 그녀를 덮어주기 위해 야전상의를 벗고 다가갔지만, 곧바로 하얗게 얼굴이 질리고 만다.

“.......주,죽었-”


“빨리 용건이나 말해. 빈스! 빈스 밖에 있냐?”

귀찮다는 듯 담배를 무는 렌의 얼굴과 차갑게 식어있는 하사의 시체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번갈아 바라보는 벨레이.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납득할 수가 없어 야전상의를 든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덤덤한 표정의 부관이 렌의 부름에 답하며 모습을 드러냈고, 렌은 별다른 말도 없이 턱끝으로 탁자 위에 있는 시체를 가리킨다. 이어진 빈스의 행동은 너무도 익숙하고 건조한 것이었다.

“용건이 뭐냐니까?”


빈스가 모포와 함께 시체를 가지고 나간 뒤에도 벨레이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렌은 마침내 짜증이 섞인 어투로 쏘아붙였고, 원망 섞인 벨레이의 시선을 받게 된다.


“.......당신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걸 검성께서 알고 계십니까?”


“아! 씨바알! 용건이 뭐냐고 묻잖아아!”


순간 불빛이 번쩍 터지고, 벨레이는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런 그의 손끝으로 불쾌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온기는 그의 손을 감싸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대로 콧잔등과 뺨을 따라 흘러내렸고, 벨레이는 바닥을 요란하게 나뒹구는 금속 재떨이를 볼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렌이 집어던진 이 재떨이로 인해 절명했을 터.

그는 그 순간 검을 뽑지 않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형식상이라고는 하나, 눈앞의 남자는 분명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제자이자 자신의 휘하에 배속된 기사이다. 벨레이는 깊은 숨과 함께 분노를 삼키고서, 덤덤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다.


“.......3수비연대의 병력 전체를 차출하신 거, 국경수비대에 보고는 하신 겁니까?”


“아니.”


“연대장은 어디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잖아.”


어린 나이에 직접 지휘욕심을 내는 건가.

벨레이는 비릿한 피와 씁쓸함을 동시에 씹으며 다시 입술을 움직인다.


“검성께서는 저를 토벌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본래 국경수비사단의 병력을 조금씩 차출 받기로 되어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멋대로 연대 단위의 병력을 빼오면 제국과의 국경이 비어있게 되지 않습니까.”


“내 알 바 아니지.”


차갑게 웃으며 담뱃재를 털어내는 렌.

그 순간, 벨레이는 깨닫는다.

이 남자는 근본부터 뒤틀려있다. 단순히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거나, 누군가를 거역하는 데에서 보람을 찾는, 그런 통상적인 문제아가 아니다. 사고라는 여과를 거치지 않고서 본능에 따라서만 판단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 검성의 제자이면서도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검성조차도 그의 본위를 바로잡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검성은 자신을 이 남자에게 붙여주었는가. 이렇게 충돌을 빚을 것을 알면서, 어째서 그는 자신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는가.

어쩌면, 처음부터 검성은 자신의 제자를 제어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을 택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벨레이의 머리에 스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가 ‘제어하는 법’을 깨닫길 원했던 거다.


“그럼, 일단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렇게 진지도 아닌 계곡에 덩그러니 주둔지를 구축하고 있으면 아군에게도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연대병력 전부를 통솔하실 수는 없습니다. 저와 부관들이 매개체가 되어 당신의 의지를 따라 군을 움직이겠으니, 내키는 대로 생각해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굽혔으니 아무리 제멋대로인 그일지라도 만족하겠지. 벨레이는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짓누르며 생각했다. 그러나 렌의 얼굴에선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건조한 시선으로, 묵묵히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을 뿐.

그의 검푸른 입술이 움직인 것은, 마지막 연기를 내뱉은 직후였다.


“전체 병력 4517명, 전투마법사 322명, 1대대장 중령 랑드 케벨, 2대대장 중령 보라느 오스틴, 3대대장 중령 에델톤 사이가, 예비대대장 소령 투모르. 지원화기중대장 대위 가이마르 텐페, 기병대장 대위 틴톤 팔가르.

1대대장은 3대대장과 사관학교 동기출신으로, 가문차원에서 사이가 좋지 않으니 각각의 대대를 양익에 배치하면 경쟁심을 부추겨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2대대장은 기병대장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불륜관계다. 2대대를 중앙에 배치시킨 뒤 기병대의 고립을 슬쩍 알려주면 꽤나 분발하겠지. 본부중대 대부분은 전투경험이 없으니 실질적인 전력에서 배제, 지원화기중대의 탄약보급은 편제의 7할 수준이므로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3수비연대로 향하는 보급대를 기다려 충분한 재보급 후에 남쪽으로 움직일 거다.”

자동소총처럼 흘러나오는 렌의 목소리. 벨레이가 놀랄 틈도 주지 않으며, 그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혼자서 연대병력 전부를 통솔할 수 없다고? 좆까는 소리 하지 마. 난 10만 명을 줘도 내 맘대로 할 자신 있어. 어쭙잖게 훈수하지 말고, 지금 접근 중인 병력에 대해서나 제대로 알아와.”


“......접근 중인.......?”


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벨레이가 되물으려는 순간, 천막에 새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연대장님! 남쪽에서 아군 패잔병이 통과를 요청해왔습니다!”


“패잔병? 바스단 계곡에서 궤멸당했다던 아군 남침부대 말이냐?”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처음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렌의 태도는 여전히 느슨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를 대신하여 부관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것은 벨레이였다.


“옛, 적의 별동대는 북서쪽을 향해 진군했으나, 마법사병력이 전멸한 탓에 통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식별구호로는 아군이 분명합니다. 간신히 놈들의 추격을 벗겨내고 국경도시를 향해 가던 중이었다고.......”


“남은 아군의 수는?”


“대략 2천 정도입니다만, 대다수가 부상자입니다.”


벨레이는 턱을 짚으며 신음을 흘린다.

아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적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된 건 천운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 진로가 북서쪽이라 함은, 곧바로 길을 따라 수도인 디나스아리얼로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렌 경, 아니, 연대장님. 재보급을 기다릴 게 아니라 서둘러 검성님께 통신을 보내고 북서쪽으로 향한 적을 추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벨레이는 동의를 구하기 위해 렌을 돌아보았으나, 느긋한 그의 시선은 그가 아닌 전령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지금 오는 놈들, 정말로 아군이 맞냐?”


그리고 역시 그 뒤틀린 방향성은 벨레이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당황한 것은 전령도 마찬가지.


“예, 군기도 해당 부대의 것이 맞고, 지휘관이나 마법사가 없기 때문에 신호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기수를 통한 식별부호는 분명 아군이 맞습니다.”


결정권이 있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전령의 태도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질문을 해온 렌에 대해 일종의 굴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비록 남부에서의 전투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이 3수비연대 모두가 베테랑으로 이루어진 뼈있는 부대다. 아군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는 병아리들이 아닌 것이다.

렌은 그의 대답을 듣고서 피식 웃더니, 반쯤 탄 담배를 그대로 바닥에 내던져 버린다.


“좋아, 통과시켜라. 어디 패잔병들 꼬라지나 구경해보도록 하지.”




==================





“여긴 국경과는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만, 어째서 수비연대병력이 이런 곳까지 나와 있는 걸까요?”


“나야 모르죠. 어쨌든 눈깔고 지나가기나 합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삭이는 셰르와 벤. 피를 덕지덕지 바른 얼굴에 발은 질질 끌고 있었지만, 4천 명이 넘는 적군의 진지를 통과하는 일은 이런 진지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역시 떨릴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 맞이한 위기였다. 미리 브린타이나 왕국군의 복장으로 갈아입지 않았다면 그대로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연대급 병력과 마주하다니, 벤의 계산과 크게 어긋난 일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온건한 군기와 미리 적의 포로장교로부터 캐낸 수기신호 덕분에 일단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국경을 담당하던 병력을 그대로 차출한 거 같은데, 그럼 지금 동부국경의 일부는 완전히 비어있다는 뜻일까요?”


벤의 바로 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유진의 것. 벤은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브린타이나 군을 살펴본다.


“여기저기서 차출한 병력은 아닌 것 같으니, 아마 유진의 말이 맞을 겁니다. 근데 어째서 국경을 비우면서까지 이렇게.......”


벤의 말은 이어지지 못한다. 천천히 나아가던 대열이 정지한 것이다. 순간 셰르와 유진은 숨을 죽였으나, 그들이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물과 전투식량을 나눠주겠다! 우린 곧바로 북서쪽을 향해 출정할 것이니, 오늘 하루는 이 숙영지에서 묵었다 움직일 수 있도록!”


“고맙기도 해라.”


벤의 중얼거림에 뒤에서 킥-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나무라는 것을 봐서는 필시 리즈였으리라. 벤은 그 웃음소리를 신호로 어느 정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위장이 노출될 일은 없다. 모든 병기와 물자는 후속으로 분류한 부대가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밤중에 산에서 내려오면 된다. 이름 있는 지휘관과 마법사는 모두 전멸했다는 설정이므로 자세한 책임을 물어올 일도 없다. 분명 이 수비연대의 존재는 예상 밖의 일이었으나, 지금으로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유일하고 확실한 해결책. 이곳에서 이 이상의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벤은 확신하고 있었다.



벤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 구호품을 나눠주는 브린타이나군과,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감사하다며 그것을 받아드는 위장군의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처음 보급을 나눠주겠다고 소리친 장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영력이 실린 목소리를 내지르며 ‘패잔병’들을 인도하고 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벤으로선 인상적인 계곡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린다.

사실 그곳엔 브린타이나군의 모습이 없었다. 경계할 필요도, 확인할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벤은 기어코 그림자 속에 파묻혀있던 하나의 얼굴을 찾아낸다.


처음엔 어째서 자신의 시선이 집중되었는지,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자의 어둠에 눈동자가 익숙해지고 나서, 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분명히 지금 자신을 피를 덕지덕지 바른 하얀 제복을 입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멀리 있는 ‘자신’은 깔끔한 모습으로, 그리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쪽을 바라보았고,

‘그’는 저쪽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그 먹색의 표면에 비친 것은,


언제나 꿈속에서 자신에게 만용을 부렸다 욕하던, 바로 그 어색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셰르, 유진, 리즈.”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벤은 낮은 목소리로 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전투준비.”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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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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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9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8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9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72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7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77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22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64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75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5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93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9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9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6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66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9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62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8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1,007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24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23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24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10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55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30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82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6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9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74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45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60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76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26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1,00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7 30 21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7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61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21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9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7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11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9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12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1,001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801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8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56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7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6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9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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