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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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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7.1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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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글자
18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DUMMY

“연대장님! 어디 가십니까?”

용케 어둠이 내리깔린 군영 사이에서 지휘관의 얼굴을 찾아낸 벨레이였지만, 지휘관의 손에 붙들린 존재를 알아챈 그의 표정은 곧바로 싸늘하게 일그러진다.

“.......? 연대장님, 그는?”


“아, 그래. 너. 음....... 이름이 뭐랬지?”


“중령 카스나 벨레이입니다. 검성께서 귀공과 함께 침입한 적을 제압하라 명하-”


“아아아, 그래, 그래. 알았어.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렌의 되물음에, 벨레이는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고 렌의 무심한 얼굴을 훑어본다. 사로잡은 적에게 아무런 호위나 방책도 없이 군영을 노출시키는 그의 무신경을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각오했던 바이지만, 검성의 제자가 지닌 무뢰한기질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넘어서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위장 후 침투하려는 적 부대를 훌륭하게 간파하여 물리친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드러난 지휘계통의 조잡함이나, 적에게 더욱 커다란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추격기회를 간단하게 버려버린 렌의 선택은 벨레이로선 단순히 고개를 숙이고 납득하기가 어려운 사항이었다.

때문에 그는, 비록 포로이지만 적의 지휘관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서슴없이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검성께서는 예비대 중에서 연대하나를 차출하여 적을 섬멸하라 명하셨습니다. 동부국경에선 대대급병력만을 뽑으라 하셨는데, 정작 예비대엔 손을 빌리지 않고 이렇게 수비연대만을 통째로 차출하시면 명령불복종은 물론이고 국경에서도 말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내뱉고 있는 말에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한 렌의 표정. 벨레이는 대답을 하는 입술과 아랫배에 더욱 힘을 주어야 했다.


“적의 위치와 이번 교전에 대해 아직 주변 영주와 수비군에게 통보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통보하시어 잔당토벌에 협력을 구하고, 수비연대는 국경으로 되돌려 보내시지요.”


“싫다면?”


“귀찮아지실 겁니다.”

전술적 견해로 되받아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호불호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런 남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불’의 영역을 찌를 수밖에 없다.

“퇴각하는 적의 뒤로 발 빠른 척후대를 붙여놓았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적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중턱에 진을 꾸린 채 버티고 있습니다. 전투 직후 재정비를 위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들을 섬멸시킬 수 있는 기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산 전체를 포위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 병력으로는 무리가 있습니다. 지방영주들은 물론이고 예비대에게서 협조를 받아야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적들이 다시 계곡사이로 모습을 감추면, 그들이 언제 어디서 우리의 보급로를 건드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일이 그리되면 검성께선 경에게 책임을 물으시겠지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불쑥 어둠을 뚫고 가까이 다가오는 렌의 먹색 눈동자. 그가 포로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반대편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더욱 괴기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에게 가장 고결하고 가장 위엄 있는 기사일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겐 한없이 증오스럽고 얕은 존재일 수도 있는 거야. 그 인간한테 아들놈 하나가 있다고 했지? 그 인간한테 물어봐. 아마 똑같이 대답할 걸? 책임? 그 영감탱이가 나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씨발 누가 무섭데?”

얼굴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벨레이는 나름 크게 경악하는 중이었다.

이 왕국에서, 아니 전 반도를 통틀어서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를 향해 이런 망발을 지껄일 수 있는 이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기사도의 표본이자 모든 기사들의 우상. 적에게마저도 존경을 이끌어 내는 전장의 신사에게, 그것도 제자라는 자가 본인의 입으로 영감탱이라니?

그러나 흔들리는 벨레이의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렌의 입술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뭐? 척후대를 붙여 보내? 내가 씨발 전부다 퇴각하랬지? 누가 멋대로 애들 풀어 놓으랬어? 니가 하면 전략적 행동이고, 내가 하면 명령불복종이냐?”


“그, 그게 무슨.......! 퇴각하는 적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기본 아닙니까?! 명령과는 관계가 없는-”


“어디 보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군법으로 치면, 전투현장에서의 명령불복종은 즉결 처형이지?”

전등의 불빛이 미세하게 스며드는 미소. 그러나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렌의 목소리에서 농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벨레이는 전신에 돋기 시작하는 소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굳어버린 벨레이의 입과 시선. 그리고 그런 그의 침묵이 만족스러웠는지, 렌은 그의 정강이를 군화로 툭툭 건드리며 얇게 웃는다.

“근데 나는 너어~무도 자애로우니까, 근신으로 봐줄 게~. 일주일 동안 내 눈에 띄지 마라? 응?”


“하지만-”


“말라고 했다?”


렌의 눈동자에 떠오른 건 더 이상 부하를 향한 자애나 위엄이 아니었다. 지극히 순수한, 그러기에 더없이 위험한 야수의 시선.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연대장님께서는 그 포로를 어쩌실 셈이십니까? 자백은 받아내셨습니까?”


“자백?”


“예. 무슨 목적으로 아군으로 위장하여 동부로 향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심문하신 게 아닙니까?”


“아아, 그래, 자백. 받았어, 받았어. 근데 이제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다.”


“.......알겠습니다.”


허술하다.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는 자를 언제까지 지휘관으로 모셔야 하는가. 군인으로서 평생을 왕국에 봉사해왔고, ‘카스나’라는 이름에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는 벨레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는 너무도 치욕스럽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어진 렌의 질문은 완전히 그의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건 그렇고, 놈들이 숨어있다는 산이 어디라고?”




======================




무겁게 감각을 짓눌러오는 겨울밤의 숨소리. 어둠과 함께 사방을 죄여오는 한기의 바람 속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의 아찔함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벤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다.


“.......이렇게 멀리까지 오지 않아도, 그냥 죽여 버리고 던져버리면 끝 아니야?”


“죽여? 너를?”

그리고 그에 돌아보는 렌의 얼굴은, 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말했잖아. 너와 내가 같은 존재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고. 간만에 진짜 재밌게 일이 흘러가는데, 내가 미쳤다고 너를 죽이냐?”


“그걸 증명해낸다고 해서 너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의미? 나한테 의미를 묻는 거야?”

이미 군영을 빠져나온 지 한참이나 지난 후였기 때문에, 흐릿한 달빛과 렌이 들고 있는 군용전등을 제외한 그 어떠한 빛도 주변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즐거워죽겠다는 듯한 렌의 얼굴을 비추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난 말이야,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 내 존재를 자각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를 얽매고 있던 하나의 가능성이 깨질 것 같다는 확신.”


“무슨 가능성?”


렌은 대답에 앞서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주변은 앙상한 숲의 그림자로 얼룩져있었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간섭도, 시간도 없는, 같은 ‘얼굴’을 공유하는 두 남자만의 공간.


“내가 아무리 느긋하게 세상을 살아간다지만,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그것도 적국 출신의 지휘관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간을 투자할 만큼 느슨하진 않아.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 둘은 얼굴만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거.”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떼를 써도 소용없어. 이미 너도 느끼고 있잖아.”

자신의 턱을 휘어잡는 렌의 손길에 담겨있는 힘은, 벤이 느껴왔던 그 어떤 중압감보다도 더욱 거세게 의지를 짓누르는 흉기였다.

“우린 ‘자의’로 존재해본 적이 없어. 만약 ‘그들’이 우리를 오두막에서 살게 내버려 두었다면, 우린 우리 본연의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았어. 그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들이밀었고, 관계와 사회를 강요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공백의 틀을 재창조해버렸다구.

그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었잖아, 그렇지? 너는 너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되었고, 모든 판단과 가치를 가늠할 때엔 그들을 끼워 넣을 수밖에 없게 되었잖아? 사실 네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네가 가려는 방향은 그게 아닌데, 너는 강요된 길을 걷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지? 아무런 외압도, 아무런 규율의 제약도 없이, 자유로운 늑대의 영혼처럼 방관만 해야 했던 우리의 운명은, 어느새 관계라는 굴레에 붙잡히고 말았어.


우린 애초에 그런 존재가 아닌데 말이야.”




벤은 감히 그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렌의 비죽한 미소가 내뱉은 마지막 말은, 가장 오랫동안 벤의 가슴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던 덩어리를 끄집어내는 갈고리가 되어 이성의 급소를 파헤치고 들어온다.

그는 너무도 시원하게 가슴이 노출된 것만 같아 구토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시간은, 인위적인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은, 존재해서는 안 될 방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신경을 가로챈 모든 존재들은, 본래 상관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존재를 깨달은 그 순간부터 필사적으로 봉인시켜 두어야만 했던 의심이었다. 만약 그 의심을 받아들인다면, 그 뒤의 모든 시간은 지나간 시간을 갉아먹는 참회의 여정이 될 것이었기에.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구원이 될 수 있어. 왠지 알아?”

벤의 턱을 놓으며 너저분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렌. 벤은 어째선지 그 차가운 손길에 다정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자신을 정의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밖에 없어. 하지만 너와 나는, 이미 자의로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한 더러운 껍질이지. 우린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의미도, 들여다볼 용기도 없는 거야. 결국 거울을 세워놓고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들여다보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꿈속에서 나를 욕하는 ‘너’를, 그 거울 속 존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였겠지. 부정해봤자 소용없어. 알 수 있거든. 왜냐면-”

너무도 친숙한 미소. 그러기에 너무도 거부감이 드는 미소.

“너와 나는 같으니까.”




그 순간, 벤은 렌과 자신의 눈동자 사이를 가로지르는 묘한 바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위화감을 벤은 무섭게 가까워진 렌의 존재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렌의 시선 또한 바람의 출처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흐음, 이건.......”

싸늘한 바람의 기운을 렌이 그리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창이 대신 증명해주고 있다. 분명 긴장을 놓아서도, 놓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러나 벤은 어째서인지, 바람에 섞여 흘러들어오는 익숙함에 온몸의 신경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불편하다. 하지만 익숙한 불편함이다.

이 기운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기 위해 벤이 눈동자를 굴리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죄여오는 렌의 손길을 느낀다.

“재밌구만.”


분명 푸른 잎사귀라곤 침엽수의 미세한 흔적만이 유일한 한겨울의 산어귀. 그러나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수많은 잎사귀들이 서로 마찰하는 숲의 목소리다. 시간과 장소에 맞지 않는 그 목소리를 숨조차 잊은 채 집중하는 벤과 렌.

머지않아 바람은 역한 비린내와 약한 진동까지 함께 실어와 두 남자의 오감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묽은 달빛이 구름을 밀어내며 쏟아지기 시작했고, 침묵에 잠겨 있던 숲을 간질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처 마르지 못한 붉은 기운으로 온몸을 적신 채,

빛을 잃은 눈동자 대신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둠을 밝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무런 생명의 흔적도 없이 다가오는 반투명의 그림자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그들을 향해, 렌은 참고 있었던 폭소를 터트리며 이마를 짚는다.

“이건 예상도 못했어! 카나반에도 이런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진짜 재밌네! 아하하하-!”


“.......”


그에 비해 벤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바람 속에 섞여 있었던 익숙함의 정체는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 자체가 그에게 깊은 한숨을 선사하고 만 것이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열, 목적지도 불분명한 혼란의 행군의 주인공은,


바로 망자의 군대.


그들의 생명에 끝을 고한 상처들이 선명하게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난다. 온건하게 붙어있는 살갗과 녹슬지 않은 장비들. 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이 직전 전투에서 사라진 목소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본래 전투 후에 남겨진 시신과 흔적들을 정리하는 건 브린타이나군의 몫이었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한 카나반군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미처 전장을 정비할 틈도 없이 렌의 명령에 의해 계곡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대로 산짐승과 시간에 의해 사라졌어야 할 그들을 곧바로 다시 일으켜 세운, 실로 처참한 처사. 그리고 그 잔인한 부름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 모두를 지닌 사람을, 벤이 모를 리가 없다.


“.......벤?”


믿을 수 없다는 어투로 어둠을 가로지르는 익숙한 목소리. 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망자들의 푸른빛 사이에서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도.”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 사람은.......”


그제야 렌의 존재를 깨달은 고도의 얼굴이 경악으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미리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실감한 것이다.

그와 같은 얼굴.

하지만

그와 다른 존재.



“거봐, 말했잖아. 똑같다니까?”


“검...아니 벤 님! 괜찮으세요?!”


그리고 엘라와 유진이 차례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벤의 시선은, 오직 한 마법사만을 향하고 있었다.


“.......고도, 이게 뭔 짓이야?”


그의 둔탁한 어조와, 메마른 단어 선택. 그 말 속에 스며있는 분노를 고도는 알 수 있었지만, 고개를 떨어트릴 생각은 없었다.


“야, 너! 무슨 생각이야?”


그녀는 벤의 싸늘한 분노를 삼키고, 그것을 대신 렌을 향해 토해낸다. 그러나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분노와, 죽어있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렌의 미소는 마를 기세가 없었다.


“정말 재밌다, 너희들! 어쨌든 직접 찾아갈 수고는 덜었어, 고마워!”


“.......찾아와?”


씰룩이는 엘라의 눈썹. 그녀의 경갑은 어느새 하얀 연기를 내뿜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살을 에는 ‘꽃잎’의 적의에도 불구하고, 렌은 커다란 동작과 함께 정중한 예를 표하여 목소리를 터트린다.


“내 이름은 렌. 브린타이나 왕국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의 제자이자 양아들. 너희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어서 찾아 왔다.”


“.......제자.......?” “양아들이라고?”


경악하는 유진과 엘라. 그리고 그런 그들의 표정을 덮으며, 다시금 렌은 유쾌한 목소리로 벤의 목덜미를 쥐고 흔든다.


“그렇게 경계할 필욘 없어.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내 제안 하나만 들어주면 동부로 향하는 너희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 아, 그리고 필요하다면 보급도 해줄 것이고, 일을 마치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보장해줄게! 이래 봬도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 지금 산에서 버티고 있어봤자 너네 모두 죽을 목숨이란 건 알고 있잖아? 그깟 망자 몇백 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갑작스러운, ‘그와 같은 얼굴을 한 남자’의 등장.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왕국 검성의 제자이자 양아들이라 밝힌 그와 그가 이끌어낸 상황에 대해 모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와중에 먼저 핵심을 짚어낸 것은 엘라의 목소리였다.


“원하는 게 뭔데?”


사실 엘라는 그 제안 자체에 흥미가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스스럼없이, 그것도 단신으로 모습을 드러낸 목적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렌의 행동은 일종의 도발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얇은 미소와 함께 돌아온 렌의 대답은,

그런 담담한 엘라의 미간조차 구겨버리고 만다.



“간단해.”


히죽 웃으며 벤의 목덜미를 휘감는 렌의 우직한 팔.

벤에게 있어 그것은, 도무지 친밀감의 표시라고는 느낄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그리고 처음 마주쳤던 눈동자 속에 남아있던 것이 의심과 적의였다면,

다시금 마주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벤이 읽어낸 것은, 흡사 형제를 바라보는 온기와도 같았다.







“너희 중의 한 명이, 직접 이 새끼를 죽이면 돼.”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참을 참가 못해서 아쉽네요 ㅇㅅㅇ 여태껏 빼먹지 않고 즐겁게 참여했는데 흐규...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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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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