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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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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11.2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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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18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DUMMY

“뭐야, 너무 반가워서 말이 안 나와?”


대동한 부관들이 말끔한 흰색 제복으로 군기를 세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청년의 차림새는 여전히 그의 미소만큼이나 허술하고 경박했다. 여기저기 헤진 먹색 셔츠와 반바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은 도저히 전장의 군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여유로움. 오직 그가 어깨에 올려놓고 있는 단창만이 그가 일반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


재차 이어진 그의 인사에도 벤은 입을 열지 않는다. 특유의 무표정한 시선으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벤.”


그런 그의 이성을 파고드는 자그마한 목소리. 벤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인 바닷빛 눈동자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그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는다. 벤은 그 침묵의 의미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끝에 모이고 있었던 마력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뜻밖인데.”


거리낌 없이 포옹을 해오려는 렌의 가슴을 밀쳐내며 벤은 간신히 적의를 지워낸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러나 메마른 표정만으로는 렌의 벌어진 입가를 지워내기엔 역부족인 모양.


“뭐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아니, 처형당하지 않았다는 거.”


“크으, 역시~.”


렌은 킥킥 웃으며 손바닥으로 벤의 볼을 툭툭 두드린다. 이번만큼은 불쾌함이 얼굴로 스며나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던 벤이었지만, 그의 냉정은 훌륭하게 감정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물론 뜻밖이라는 벤의 말에 적의만이 담겨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렌.

자신과 같은 얼굴을 갖고 있으며, 브린타이나 선대 검성 ‘반역자’ 블라르 트리스탄테의 양아들. 신분의 특수성은 물론이고 내전 당시의 행적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판단의 여지가 없는 전범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블라르의 찬탈에 가담했던 일부 영주들과 군벌들을 제외한 나머지에겐 지나치게 관대하다싶을 정도의 처분이 내려졌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벤은 렌이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뭐어, 나도 꽤 놀랐다고. 꼼짝없이 머리가 떨어질 거 같아서 도망갈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형님’께서 선처를 호소하신 모양이야? 귀찮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니 나야 고맙지.”


렌이 말한 ‘형님’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가 렌을 구제해줬는지, 그리고 어째서 크리스가 그를 용인해줬는지 벤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은,


“너는 왜 남은 거야?”


“으응?”


여전히 게걸스러운 미소. 벤은 그 미소를 향해 천천히 자신의 질문을 풀어내준다.


“네가 오열의 검성에게 붙어있었던 건 그 이름의 후광으로 너의 뒤틀린 쾌락을 별다른 제지 없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잖아? 그 이름은 이제 사라졌고, 네게 남은 것은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딱지뿐이야. 방종이 사라진 지금, 네가 이 나라에, 그 신분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는 거 아냐? 왜 남아있는 거지?”


“글쎄? 왜일까?”

창대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내리치며 비죽 웃어 보이는 렌.

“혹시 모르지, 알고 보니 나한테 충성스러운 왕국기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도.”


“지랄.”


단호한 벤의 평가에 렌은 더욱 미소의 색을 짙게 띄우며 수풀을 향해 뒤돌아선다.


“눈에 띌지도 모르니까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저 아래쪽 바위에 앞이 트인 곳이 있더라고.”


너무도 쉽게 등을 내어주는 렌의 모습을 노려보면서도, 벤은 그의 몸이 수풀 속 그림자에 묻힐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의도에 대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렌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주는 불편함. 그 불편함의 근원인 본능적인 거부감. 물론 그 거부감은 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뭐해? 가자.”


벤보다도 먼저 수풀로 걸어 들어가는 고도의 눈가에도 흐릿하게 불편함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거리낌 없이 렌의 뒤를 따른 것은, 다름 아닌 벤을 독려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으로 렌이 지휘관이라는 계급을 달고 군을 이끌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와의 협력을 통해 오스타이나를 수복해야 하는 것이 벤의 임무. 고도는 그가 여기서 렌이라는 존재 때문에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통합군이 정식 재편된 이후, 그리고 벤이 ‘변수’의 이름을 받고 치르는 첫 번째 군사작전이다. 여기서 성과를 내야 카나반 본국의 긍정적 반응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눈에 불을 켜고 벤과 로빈을 물어뜯으려는 세력에 일격을 먹일 수 있다.


물론 벤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쉬고, 거대한 나무와 우거진 수풀 속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한 번 오스타이나의 정경을 내려다본다.




“와, 진짜 똑같이 생겼네.......”




그리고 그의 걸음을 밀어준 것은, 천진난만한 카니아의 한마디 감상이었다.






렌의 말대로, 그가 카나반의 지휘관들을 초대한 곳은 기둥이 굵은 나무들과 우거진 풀들로 인해 외부의 시야로부터 자유로운 산중턱이었다. 동시에 계곡의 진입로에서 이어지는 산맥과 오스타이나성 주변의 지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말 그대로 전술협의를 보기에는 최적의 장소. 렌이 마른 그루터기 하나를 의자 삼아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와인향 가득한 철제수통을 내밀었지만, 벤의 시선은 렌의 호의가 아닌 바깥의 풍경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적의 규모는?”


“몰라.”


“성주인 할라시드 로쿠베는 어떻게 됐어? 왜 통신이 없지? 전사한 거야, 아니면 패잔병을 수습해서 산속에 숨은 거야?”


“몰라.”

결국 렌은 벤의 시선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먹색 빛에 담겨있는 것은 순수한 짜증뿐이었다.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벤의 짜증을 향해 변명을 늘어놓는 렌.

“통신이 안 되니 어쩔 수가 없어. 적의 규모는커녕 쳐들어온 놈들이 3군단소속인지, 2군단소속인지도 몰라. 게다가 성내에 틀어박혀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으니, 일단 맨땅에 들이박아야지 뭐.”


벤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절벽 아래를 유심히 살펴본다.

렌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본래 거점이 되는 성을 점령한 후에는 이어지는 진출, 혹은 반격에 대비한 주변정리는 물론이고 활발한 척후와 초소배치가 이어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오스타이나성의 주변에는 공성의 흔적만이 남아있었을 뿐, 그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적을 알 수 없다면, 아군을 먼저 알아야 한다.

벤은 렌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얼마나 데리고 왔어?”


“응?”


“병사 말이야. 얼마나 데리고 왔냐고? 정규군이야? 훈련 상태는?”


“아니, 뭐 그런 게 중요해? 어차피 주력은 너네잖아? 저긴 얼마 안 있으면 너네 구역이 될 장소고. 우린 그냥 구색만 맞추려고 온 건데?”


“하아, 멍청아.”


한숨과 함께 벤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욕설에, 렌의 그림자를 지키고 있던 하얀 제복 기사들의 얼굴에서 적의가 피어난다. 고도는 그들의 반응에 움찔하면서도 벤의 뒤통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어째서 얘는 이 남자 앞에만 서면 이렇게 감정적으로 되는 걸까.’


매사에 느긋하고, 무심하며, 여유롭다.

하지만 벤은 이 렌이라는, 자신과 얼굴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에겐 이상하리만큼 과격하게 반응한다. 처음엔 적으로서 그를 생포하고 상처 입힌 것에 대한 순수한 적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연히 다시 얼굴을 마주한 지금, 고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브린타이나 기사들의 적의는 카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멍청이’라는 욕에 대한 해명을 기다리는 렌에게, 벤은 푸석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움직인다.


“우린 단순히 브린타이나의 수복을 위해 군을 움직인 게 아니야. 국경이 무너진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빼앗긴 걸 되찾고 지키는 게 아닌, 속공으로 반격하는 거라고.”


“.......반격?”


흥미로 물들어가는 렌의 눈동자.


“소모전 형태가 지속되면 불리한 건 브린타이나야. 제국 3군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천천히 너희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이겠지. 여기서 우리가 움직여줘야 해. 오스타이나를 넘어, 그대로 동부국경을 돌파해서 전선을 따라 북진할 거야. 균형을 깨트리는 거지. 그거에 반응하여 3군단장이 총력전의 형태를 갖추려고 하기 전에 브린타이나군과 연합해서 헐거워진 틈을 찌른다.”


“흐응, 그 말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면서도 그가 말끝을 흐린 이유는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직접 듣고 싶기 때문이겠지. 벤은 그런 렌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결국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한다.



“난 제국 3군단의 궤멸을 노리고 있어.”



“핫.”

기나긴 전란의 역사 속에서 제국의 군단편제를 맞이하여 ‘전투’의 승리를 거둔 경우는 몇몇 있었지만 군단 자체를 궤멸시켜 와해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아실레마의 ‘군단’편제가 치밀하고 견고하게 구성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한 국가의 주력군과 필적하는 그 전투력이야말로 군단을 상징하는 힘. 그리고 ‘힘’이, 제국을 무너트릴 수 없는 근원이었기에.

“근데 전선을 따라 북진한다니, 그걸 제국군이 가만히 놔둘까? 지형도 지형이지만, 보급로는 물론이고 적의 전진기지의 척후와 교전을 병행하면서 이동해야 할 텐데?”


“그건 상관없어.”

다시금 바깥으로 시선을 흘리며, 너무도 가볍게 답을 내어놓는 벤.

“저번에 도망쳐 내려오면서 대강 구상해뒀거든.”


“.......뭐?”


벤의 말에 놀란 것은 렌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고도도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본다.


브린타이나와 아실레마의 국경을 요리조리 휘저으며 밤새도록 내달렸던 그때, 고도 자신은 물론이고 병사들과 기사들도 자신의 후들거리는 다리와 공포 외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속도와 생존만이 그들이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벤은, 그 와중에도 국경의 지형과 병력배치상태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이곳에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삼키고 있었던 것인가. 당장 죽음이 그림자를 밟고 있는 상황에도, 그의 먹색 눈동자는 먼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니까 빨리 묻는 말에나 답해. 너희들의 전력을 빨리 파악해야 이것저것 조정을 할 수 있을 거 아냐.”


짜증이 가득한 벤의 목소리에, 렌은 수통의 뚜껑을 잠그고 천천히 허리를 편다. 벤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피어있었다.


“얘네들, 어디에서 온 거 같아?”


렌의 턱이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의 뒤에서 꿈쩍 않고 있는 기사들.


“.......뭐?”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구겨진 벤의 미간 사이로, 렌은 길게 웃음을 뿜으며 턱을 쓰다듬는다.


“솔직히 이것들 이름은 몰라. 관심도 없어. 근데 하나 확실한 건, 얘네들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공통점?”


벤의 되물음이 너무도 즐겁다는 듯 렌은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허리를 굽힌다.


“바로 반역죄로 처형당한 영주들을 모시던 부관들이라는 거야.”


“.......!”


벤과 고도는, 마침내 묘하게 지속되던 그들의 적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상관에 대한 모독으로 분노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데려온 총병력은 일만이천. 자아~ 카나반의 검성님-”

짙은 미소.

그보다 더욱 짙은 눈동자.

다가오는 렌의 먹색 속에서, 벤은 그 어떤 것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언제 뒤통수를 쌔릴지 모르는 이것들을 데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으실려나아?”





======================





“들어와.”

노크가 끝나기도 전에 서재를 울리는 크라트의 목소리. 탕나무 문이 적막을 깨트리며 울부짖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검붉은 빛에 늑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왕.”


“안녕하세요, 대장님.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차? 아니면 술로 하겠나?”


“아, 차로 부탁드립니다.”

온갖 지도와 보고서로 어지러운 크라트의 책상. 로빈은 그 너머에 의자를 끌고 자리를 잡는다. 잠시 후 크라트는 베르달 특유의 냉차를 내어놓았고, 그 쓴 한 모금에 로빈의 표정은 격하게 일그러진다.

“으, 이건 여전하네요.”


“다 마셔라. 한잔으로도 혈색이 돌아오니까.”

늑대의 권유에 로빈은 두세 모금을 더 적셔보지만, 결국 모두 비우지는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아야 했다.

“어제도 잠깐 말했지만, 자잘한 도발을 제외하곤 움직임이 없다. 저번 전투 때 좋은 기사들을 많이 잃어서 위태로웠는데, 왕비와 왕비가 데려온 녀석들이 나름 잘해주고 있다. 지원에 감사한다.”


“아니, 뭘요. 통합군을 데려오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어지지 못하는 목소리. 로빈은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렸고, 어떻게 이 말을 시작해야 할지 다시금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역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서서히 어색함으로 변질되어갔지만, 로빈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질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크라트의 선공에 로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왕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온 거 아닌가?”


“옛? 아, 그게-”


“아내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다.”


“아.......”

로빈은 늑대가 엘라를 ‘아내’라고 지칭한 사실보다도, 그의 대답에 사고를 빼앗기고 만다. ‘그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크라트의 태도가 오히려 불안하게 다가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결국, 로빈은 이 말로 목소리를 시작해야 했다.



“뭐가 말인가?”


“그 이야기는 작년 베르달에 있을 때 제가 먼저 엘라론에게 꺼낸 겁니다. 이것저것 방법을 알아보다가, 왕실주치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서.......”


“내 아내가 진지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나 보군?”


“네....... 하지만 맹세코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불임에 대해 몇 가지 묻고자 했던 건데-”


“상관없다.”


“.......예?”


“상관없다고.”



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문과 빛을 등진 늑대의 얼굴을 바라본다. 거친 머릿결과 짧은 수염. 그리고 한기를 불러일으키는 푸른 눈빛. 하지만 그곳에 로빈이 기억하는 분노는 떠올라있지 않았다.


“.......전 아내, 그러니까 올리의 어미가 살아있었을 때, 비록 반쯤은 필요에 의해 맺어진 연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난 내가 이 땅에서 짊어지고 있는 의무와, 니바르토라는 이름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녀와 거리를 두었지. 유치한 고집이었어.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됐다. 그때는 나의 가슴보다는 남들의 눈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지. 지금처럼 베르달에서의 입지가 굳지는 못한 시기였으니까.”

짧은 한숨과 함께, 늑대는 술처럼 차를 들이킨다.

“올리를 가진 것도 베르달의 영주로서 ‘마땅히 그래야 했기’ 때문이었지, 나나 그녀의 의사는 담겨있지 않았었다. 우리의 뜻이 담기지 않은 생산적인 결정이었어. 그럼에도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녀 또한 나의 거리감을 이해해주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알다시피, 그녀는 올리를 낳고 세상을 떠났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올리와 나를 걱정해주던 그녀에게, 결국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음을. 그리고 줄곧 후회해왔다. 그녀를 사랑한 만큼,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던 것을.”

늑대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다. 그의 목소리도, 언제나 그렇듯 눈동자만큼이나 푸르고 메말라 있다. 그러나 로빈은, 그의 입가에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온기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엘라론을 사랑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작은 정치적인 수단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를 아껴주고 싶고, 그녀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

물론 그 결실로서 그녀와 아이를 갖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녀의 피는 너무 진해. 잘은 모르겠지만 로즈의 존재도 기적에 가까웠을 거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강요할 생각이 없다. 아이만이, 내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결실은 아니니까.”


“.......대장님........”


“그러니까 왕, 나나 그녀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네 아비와 왕비의 어미, 그리고 루디와 리반나를 생각하며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유야 어떻든 나는 네 아비의 목을 베었다. 그 속죄를, 새로운 생명으로써 한다고 생각해주면 고맙겠군.”


“.......감사합니다.”


이것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로빈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크라트의 일침에도, 그는 한참이나 늑대를 향한 감사를 이어간다.


지나와의 결혼은, 자신과 그녀를 휩싸고 있던 모든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었다. 피와 눈물, 온갖 비난과 의심을 물리치고 얻어낸 결실이었다. 그러나 완벽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불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불안을 지워줄 호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너무도 거대하고, 은혜로운 빛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의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존재라곤 없을 것만 같았다.




“대장!!”



한 베르달 병사가, 문을 박차며 들어올 때까지는.



“뭐냐.”


“지, 지하감옥에 수감돼있던 죄수가 탈옥해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죄수?”

크라트의 눈썹이 뒤틀린 이유는 간단했다. 감옥에 포로가 있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으니까.

“그럼 잡아라. 삼만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데 죄수 하나가 탈옥했다고 호들갑인가?”


“그, 그게.......”


늑대가 보고에 있어 망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베르달용사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뜸을 들였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


“빨리 말해라. 뭐가 문제인가?”


재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늑대.

병사는 그 뒤에도 한참이나 머뭇거린 후에야,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움직인다.





“.......죄수가 로즈 아가씨를 인질로.......”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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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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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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