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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1,381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7.0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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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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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
20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DUMMY

뒤를 따르는 그 어떠한 군세도 없이 홀로 나타난 여인. 그러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마치 수백만의 군대를 거느린 장군처럼 여유롭고 당당했다. 카나반군을 압살하던 왕국의 병사들은 그런 묘한 존재감에 이끌려 시선을 주면서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

그러나 오직 하나,

그녀의 등장에 경악하는 눈동자가 있었다.


“마법사들은 보호막전개를 풀고 모든 마력을 화력에 집중해라! 기사들은 병력을 나눠서 요격한다! 저 여자를 절대로 접근시키지 마!”


빈스의 다급한 외침에도 병사들은 완벽히 의문을 지우지는 못한 얼굴들이었지만, 곧바로 그의 명령에 따라 능숙하게 군을 나누기 시작한다. 계곡의 바깥으로 퇴각하는 카나반군을 쫓는 1진과, 능선을 내려오는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떨어져 나온 2진.

문제는, 그 나뉜 군세의 비율이 빈스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는 점이었다.


“아니! 대대급 병력을 돌리란 말이다! 1대대, 아니 2대대가 더 가까운가?! 지휘관은 어디에 있나?!”


야전에서의 경험은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두꺼운 빈스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관이라는 직책과 전투임무에서의 경험. 그가 가진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어깨너머로 봐온 것이 전부인 터라, 당장 ‘누군가’를 대신하여 연대급의 병력을 마음대로 주무르기엔 너무도 얇았다.


그리고 엘라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200여 명의 중대병력을 내려다보며 더욱 진한 미소를 내보인다.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여태까지 처절하게 혹사당해왔던 말은 마침내 그녀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먼지를 일으키며 돌격해오는 자들은, 마법사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중기병대. 보병으로서 저 사이를 돌파하겠다는 생각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평원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협소한 지형이긴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기병이라는 높이와 무게감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런 통념은 ‘상식’이 통하는 존재에게나 허용되는 부분.

그녀에게 있어서 군마의 튼실한 네 다리는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엘라는 검집의 단추를 눌러 세 개의 검 중 가장 기다란 장검을 뽑아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란 도약. 그러나 그 도약의 방향은 측면이 아닌, 다가오는 군세의 정중앙이었다.

당황한 쪽은 브린타이나군이었다. 선두에서 기병들을 이끌고 돌격하던 왕국기사는, 갑자기 나타난 여인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그 명령이 그녀의 뒤로 숨겨둔 군세가 나타나는 것을 대비한 방책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언덕 너머로 새롭게 나타나는 군대는 없었으며, 눈앞에 남아있는 건 수백 명의 기병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여인의 무모함뿐이었다.

고작 기사 하나를 잡으려고 수백 명의 기병을 동원한다?

라고 그가 하달받은 명령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순간,

그 의구심은 어느새 가까워진 여인의 두 번째 도약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 나고 만다.


그녀의 도약은 마치 거대한 맹금류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나는 듯 언덕을 뛰어내려오는 그녀의 그림자는 왕국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적의를 품고 돌격해오는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그 높이에서 떨어지는 그녀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로 그녀의 도약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 감탄도 잠시, 선두의 기사는 그녀의 착지 지점과 시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황급히 창을 들어 그녀의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서서히 추락하는 여인의 미소를 지울 수는 없었다.


철과 철이 마주하는 깨끗한 소리 따윈 없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이성을 단번에 날려버린 것은, 거대한 폭탄이 터진 듯한 충격파였다.

굉음이 언덕은 물론이고 계곡 사이를 강하게 때리며 산맥 전체를 뒤흔들었고, 잔뜩 말라붙은 겨울의 대지는 온갖 파편과 먼지를 하늘 높이 뿌려댄다.


“꺄아하하하하하-! 숙녀가 떨어지면 받아줘야지?”


그리고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들려오는 여인의 쾌활한 웃음소리. 그러나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병사들은 도무지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잘려나간 대지의 균열 속에서 흙과 반쯤 융화되어있는 처참한 시체들.

단 한 번의 검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상처와 후폭풍이었다.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 일격으로 얼마나 피해를 본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잡아라!”


사고를 앗아가는 참경 속에서도 군인의 의무를 되찾은 자는 있기 마련. 누군가의 외침으로 마침내 병사들의 시선이 하나의 미소를 향해 몰려든다. 그러나 주목받은 장본인은, 그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한 듯.



“기꺼이 잡혀 줄게~”






“리즈, 혹시 저거.......”


“응, 맞아.”


리즈의 끄덕임으로부터 확신을 얻은 유진의 얼굴에 얇은 미소가 번진다. 당장 눈앞의 상황은 여전히 절망스럽다. 중대급 병력이 빠져나갔을 뿐 자신들을 압박하고 있는 브린타이나군의 기세는 여전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저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녀의 존재가 이런 국지전에서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카나반군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한줄기 거대한 빛을 볼 수 있었다.


“한눈파는 것이냐?!”


친절하게도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른 벨레이 덕분에 리즈는 다시 전장으로 집중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의 검에 깃든 무게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여인이 언덕에서 등장함에 따라 카나반군의 분위기는 반전될 수 있었고, 그건 리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인의 피를 머금은 단검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벨레이의 검을 쳐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터라 그의 자세를 무너트릴 정도의 강력한 영력을 실을 수는 없었지만, 유진의 엄호를 받기 위한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자신의 손목을 노리며 들어오는 유진의 검을 피해내는 벨레이. 그러나 그의 얼굴은 만족감보다는 뒤틀림으로 얼룩진다. 지금 저 언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등장 뒤로 카나반군의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큼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세만으로 기울어진 전력 차를 뒤집을 순 없다. 별다른 변수가 없이 이대로 밀어붙인다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



“물러나라! 계곡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벨레이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뭣-?”


그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본 사이 이미 그와 상대하던 두 명의 카나반 여기사들은 후미의 대열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만다. 그는 곧바로 추격을 명령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명령에 충실하려는 병사들은 이미 전투와 추격을 멈추고 대열을 이루는 중이었다.


“무슨 짓이오?! 무너진 적들을 눈앞에 두고 퇴각이라니?!”


결국 벨레이는 씩씩거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병사들을 헤집기 시작한다. 예상대로, 그 근원은 빈스의 입이었다.


“지금 언덕에 나타난 자는 ‘광기의 꽃잎’ 엘라론 드리브달입니다. 퇴각은 그 사실을 듣고 연대장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겁니다. 그녀를 잡지 못할 전력은 아니지만, 최대한 병력을 보존하고 싶으시다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리고 목표는 이루었으니 굳이 추격전을 펼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목표? 목표라니?”


전투로 달아오른 기사를 차분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진중한 얼굴로 되묻는 벨레이를 향해, 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린다.




“적의 지휘관을 잡았습니다.”





===================





언제나 엄숙한 분위기와 무거운 표정을 공유하는 회의실이지만 오늘은 그 강도와 깊이가 한층 더 불편했다. 그런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항상 밝은 표정과 익살맞은 인사로 회의를 시작하던 로빈조차도 오늘만큼은 눈치를 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뿐. 그리고 모든 의원의 자리가 채워진 것을 확인한 마누앙의 낮은 목소리로 마침내 침묵은 깨질 수 있었다.


“우선 예정에 없던 오후 회의를 소집한 점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안건의 시급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사항이었습니다. 모든 의원님, 혹은 대리인이 참석한 것을 확인하였으니, 이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근위병.”

총리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의 입구를 봉쇄하는 지나와 오즈카. 의원의 신분으로 자리에 앉아있기는 했지만 이런 분위기가 영 익숙하지 않은 아델로서는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지요. 브린타이나 내전을 위해 파병했던 공화국의 원정군이, 검성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독립군으로서 북브린타이나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뭣?!” “검성이?”


술렁이기 시작하는 회의실. 그러나 마누앙의 시선과 목소리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검성은 토우칸 대군에게 5천의 병력을 나누어주어 바르사이파 계곡의 북부거점을 점령하게 하였고, 본인은 바스단 계곡을 통해 북진, 그곳에서 남하대기 중이던 적 1개 연대를 격파한 뒤에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통신이 두절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독자적으로 움직였다’라는 사실은 이미 벌어진 일이며, 긴급회의를 갖는 것으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간파해낸 란다 가슈펠라르의 핵심을 짚는 질문이었다.


“보고 그대로입니다. 토우칸 대군이 거점을 점령한 채로 적을 견제하는 사이, 검성 본인과 3천의 군대는 동부국경으로 갈 것이란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만, 그 전문을 마지막으로 이후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논의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사안입니다.”


잠시 먹색 시선을 돌려 로빈을 바라보는 마누앙.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행동이 무언가의 동의를 얻기 위함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왕은 결국 지친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고, 그 반응을 신호로 마누앙은 다시금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검성과 그의 군대가 토벌당했을 가능성에 대한 겁니다. 최악의 경우, 즉, 검성이 전사했거나 포로로 잡힌 상황이라면, 지금 당장 공화국의 대외정책에 커다란 반향이 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지금의 검성은 일종의 연막작전입니다. 선대 검성이신 아뮤르 한센님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신 이후로 선출식까지 치루며 그 후임을 찾았지만 마땅한 대상이 없었지요. 그렇다고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었기에, 지금의 검성은 폐하의 추천으로 여러분의 동의를 얻어 임시로 세워놓은 인물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여러분과, 외국에선 욘의 대통령과 론크리스 국왕정도 뿐입니다. 제국에 귀화한 쥬넨 니바르토도 의심해볼 수 있지만, ‘붉은 장미’의 침공 이후 아직까지 제국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아직 국내 사정에는 깊이 파고들지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마치 남의 이름을 읊는 듯 아들의 이름을 머금은 건조한 그의 어투에 움찔거린 이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소 불편한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리의 입술은 멈추지 않는다.

“그가 전사했다면 새로운 위장용 인물을 내세우는 것으로 간단히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만, 우린 그가 포로로 잡혔을 경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그가 고문을 못 이겨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그로써 공화국의 내부 상황이 적국에 알려진다면, 이는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지원군 따위를 보내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남브린타이나군이 패하기라도 하면 우리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다가 검성의 실종이라니? 폐하와 왕당파는 이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여인으로, 총리직에 전임하기로 한 마누앙을 대신하여 니바르토 가문의 의원직을 맡고 있는 그의 사촌동생, 폴론 니바르토였다.


“지금 회의는 대책을 강구하자는 뜻에서 소집한 것이지 책임을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마누앙의 눈빛으로 인해 간단히 제압당하고 만다. 그는 다시 회의장이 침묵에 휩싸인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연다.

“따라서 지금, 임시라도 차기 검성직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훌륭한 연막책으로 쓸 수 있으면서도, 상황이 어찌 진행될지 모르므로 유사시 검성과 다름없는 존재감을 발휘해야 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선출식으로도 뽑지 못했는데, 어디서 그런 인물을 찾는단 말입니까?”


논제의 핵심은 역시나 란다의 몫. 그러나 그의 질문에 답한 것은 마누앙이 아니었다.


“선출식으로도 검성에 가까운 인물을 뽑지 못한 것은, 그 후보생들의 출신이 모두 귀족가문에만 편향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덕분에 란다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진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이미 많은 의원들은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선출식을 건의합니다. 다만 이번엔 그 대상을 중심귀족가문뿐만이 아닌, 기존의 군벌가문, 지방귀족, 그리고 평민출신의 기사, 나아가서 아인족에게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정신이오? 공화국의 검성을 평민이나 아인족으로 세우자고?”


첫 불만은 같은 귀족파 의원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협적인 어투와 불만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총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임시직이자 연막책입니다. 누가 선출이 되어도 그리 큰 의미는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지금 검성께서도 귀족은커녕 기사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크흠.......”


아델의 의도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만약 그녀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면, 그녀가 추진 중인 법률이 더욱 탄력이 받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에 ‘연막’이나 ‘임시’라는 방패의 비호를 받으며 나아가겠다는 아델의 의지를 막을 수 있는 논리나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귀족파는 물론이고 왕당파 의원들까지도 불편한 표정만을 공유하고 있었다.

애매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정리한 것은 총리의 목소리였다.


“물론 아델 의원의 의견도 하나의 방책일 뿐입니다. 만약 다른 의견이 있다면 지금 논의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대규모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선출식을 하겠다는 말은, 결국 외부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한테 검성이 없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아델은 질문을 따라 란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 의혹으로도 그녀의 확신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이것이 검성 선출식임을 알고 있는 것은 이 회의실에 있는 여러분만이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폐하의 결혼이 정식으로 교회에 인가절차를 밟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이 선출식을 폐하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의 일환으로 위장할 생각입니다. 이른바 ‘기사전’이라는 형태로요.”


“너무 허술하군요. 축제 따위로 검성을 선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뽑힌 검성을 장군이나 병사들이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위엄과 존경은 과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다른 대안을 줘보세요.”


“.......”


날카롭게 마주치는 시선뿐, 회의실은 다시 한 번 침묵으로 물든다. 란다의 얼굴에서 굴욕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델만이 그 느긋하면서도 날카로운 표정 속에서 묘한 방향성을 짚어낼 수 있었다.


“총리님, 두 번째 사안을 말씀해주세요.”


로빈이 중재와 함께 화제를 돌리기 위하여 의원들의 시선을 마누앙에게 집중시킨다.


“두 번째 사안도 비슷합니다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첫 번째 사안이 국가의 위협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는 국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지요.”


“국가의 위신이라면?”


어느 왕당파 의원의 되물음에, 마누앙은 짧은 한숨과 함께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그에 로빈이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런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의원들은 마누앙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검성이 선출한 3천의 병사 중에, 왕녀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암흑과 무감각. 전신을 휘어잡는 그 공허함 속에서 벤은 눈을 떴다. 아니, 떴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그 어떠한 존재도 없었으니,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자신을 반기는 익숙한 목소리뿐이었다.


[너는 만용을 부렸다.]


“.......오랜만이네.”


[너는 만용을 부렸다.]


“알고 있어.”


[아니, 너는 모르고 있다.]


겉으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음에도, 벤은 순간 살짝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다소 높아진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 그래. 아무것도 몰라. 근데 그거 알아? 난 여태까지 너를 나라고 생각했어. 근데 말이야, 저 밖에서 너를 만난 것 같아.”

그리고 어둠을 비집고 등장하는 하나의 얼굴.

벤은 그 얼굴이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에 이견을 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얼굴에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그는 마침내 알 수 있었다.

“그 녀석도 나보고 그러더라. 꿈에서 자길 괴롭히던 새끼라고. 그러니까 처음으로 이렇게 물어볼게.”


짧게 숨을 들이키는 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도 듣지 않는 공간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너, 뭐야?”






“그건 내가 먼저 물었잖아.”


바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벤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다. 동시에 전신을 압박해오는 고통에, 그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트렸지만 목소리는 그런 그의 침묵을 허용하지 않을 모양.


“그만 쳐자.”

짙은 군홧발이 옆구리를 파고든다. 벤은 그제야 전신을 휘감고 있던 고통의 근원이 그 옆구리였음을 떠올릴 수 있었고, 의도적으로 ‘덜’ 치료한 그의 부러진 갈비뼈는 또다시 비명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벤을 옭아맨다.

“너, 방금 ‘그 꿈’ 꿨지? 너도 나 봤지?”

푸석하던 머리는 이미 땀과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벤은 그 축축한 머리 채로 그에게 붙잡혀 강제로 고개를 들어야 했고, 마침내 그는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희미한 전등만이 유일한 빛으로 남아있는 천막이었다. 밖은 이미 겨울밤에 접어들었는지, 입구 아래로 스며드는 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꽤나 널찍한 분대용 천막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사슬에 묶인 자신의 사지와 간이식 침대 하나뿐. 물론, 그 침대의 주인은 벤이 아니었다.

“아아, 초면부터 실례가 많았어. 통성명부터 할까? 너, 이름이 뭐야?”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 분명 자신의 울림과 같지만, 그 울림이 품고 있는 색과 무게가 천지 차이임을 벤은 직감할 수 있었다.


“.......벤.”


“벤? 성은?”


“그냥 벤.”


“아아, 그래에? 이거 우연인가, 나도 ‘그냥’ 렌이거든.”

렌은 히죽 웃으며 벤과 악수를 나누었지만, 사슬로 구속된 벤으로서는 반강제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 그럼 묻고 싶은 게 많아. 기다리느라 지루했어. 뭐 덕분에 한 년 미리 보냈지만.”


벤의 턱을 붙잡아 간이침대로 시선을 향하게 만드는 렌.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진 벤의 시선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어느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그림자의 주인이 그 어떠한 온기나 숨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그런 벤의 시선에, 자신과 똑같은 눈동자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자신은 지어본 적이 없는,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렌의 얼굴이 보인다.


그 미소는 너무나 순수해서,

벤의 이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신에 소름을 돋우고 있었고,

그의 이성은 지금 옆구리에서 스며 나오는 고통보다도 더한 충격을 예감하고 마른 침을 삼킨다.


꿈틀거리는 벤의 목젖에 만족한 듯, 렌은 벤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미소의 강도를 더해간다.




“이거, 긴 밤이 되겠어.”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참공지가 뜨긴 떴는데... 작년부터 연참은 빼먹지 않고 완주해왔지만 이번엔 모르겠네요.. 하필 실습 막바지인지라 ㅠㅠ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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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9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62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8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1,007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24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23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24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10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55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30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82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6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9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74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45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60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76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26 26 22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1,00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7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6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61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21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9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7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11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9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12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1,001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801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8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56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7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6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9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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