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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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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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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2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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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글자
24쪽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DUMMY

다가올 축제를 맞이하여 온 도시가 들썩인다. 여태까지의 왕실행사가 대부분 폐쇄적으로 치러졌던 것과는 달리, 시민들에게 개방이라는 파격적인 형태로 찾아온 왕의 결혼식이었기에 기자들은 물론이고 모든 시민들의 시선이 아스트로바톰 왕립마법대학 캉페온 광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혼식준비과정부터 특별히 접근에 제재를 가하지 않아 최근 광장 주변은 언제나 관계자와 일반인이 뒤얽혀 소란으로 가득했다. 디쿠젠 총장은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았기에 흔쾌히 장소를 협조해준 것이었지만, 이쯤 되면 기물파손을 걱정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대학은 낯선 이들의 방문에 노출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조그마한 동아리방이었다.


“.......”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게 정말로 ‘평화’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거운 침묵’인지 구별해낼 수는 없었다. 언제나 같은 얼굴들이 같은 표정으로 저마다의 ‘일상’을 품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읽지도 않을 전공서적을 앞에 펼쳐두고 멍하니 창밖의 태양을 만끽하고 있는 벤, 그의 맞은편에서 의자 두 개를 이어붙이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덴쿠레, 그런 덴쿠의 만행 덕분에 벤의 바로 옆자리에 낑겨 앉아 논문을 끄적이고 있는 고도, 마지막으로 책상에 둘러앉은 모두를 위해 끊임없이 과자와 차를 내어놓는 유라까지.

물론 그 방에 있는 얼굴은 ‘정식부원’들 뿐만이 아니었다.

소파의 한자리를 차지한 채 쌓아놓은 책 속에 빠져있는 악마 하나와, 꾸벅꾸벅 졸다 못해 결국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들이박고 잠에 취해있는 인형, 그리고 굳이 그런 둘의 사이로 비집고 앉아 흥미롭게 그들을 관찰 중인 망자.

이미 그 존재감에서부터 일상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이었지만, 그 일상적인 침묵이 깨질 때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보르케는 어떻게 됐어?”


벤의 목소리는 특정인이 아닌 허공을 향해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대답을 내놓으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대답은 평화롭게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덴쿠레에게서 튀어나온다.


“다행히 종교재판까지는 가지 않을 거 같아. 자의가 아니었다고 너도 총장님도 직접 증언해주셨으니까. 물론 모든 일의 원흉인 우리 악마님께서는 귀찮다고 나오시지도 않으셨지만.”


몇몇 시선들만으론 데로의 집중을 흩트려놓을 수가 없었다. 비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책장만을 넘길 뿐. 잠시 악마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던 벤은 다시금 화제의 방향을 틀었다.


“그라우치 장군도 대부분 무혐의로 결론이 날 것 같으니, 오로메 경도 한시름 놓겠네.”


“엄마? 엄마야 처음부터 별로 걱정은 없었어. 문제는 보르케의 입장이지. 졸지에 아버지가 한 일에 연루돼서 휘둘리다가 악마에 빙의된 놈이 돼버렸잖아. 아직 학기도 남아있는데 학교에 다닐 수나 있을라나.”


한가로운 덴쿠레의 목소리. 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벤의 신경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느샌가 고도의 펜이 멈춰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탓에 그녀의 시선이 어딜 향해 샜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선지 벤은 그녀가 악마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직...칙...”

익숙한 잡음이 모두의 귀를 간질인다. 이것이 교내 방송의 전조임을 알고 있었기에, 책상에 둘러앉은 대학생들은 순간적으로 이어질 조교의 목소리로 집중을 옮겨야 했다.

“아, 아. 잠시 안내 말씀드립니다. 이론마법학과 제르나비 고도, 이론마법학과 제르나비 고도는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총장실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학기도 시작하지 않은 지금, 총장으로부터의 호출은 그리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책과 논문을 덮는 고도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동아리방문의 문고리를 잡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만을 남기고 문을 닫는다.


“갔다 올게.”


비장함이 흘러나오는 뒷모습만을 남기고 사라진 고도. 방송이라는 소란에 눈을 뜬 이리스가 끔뻑끔뻑 눈을 비비며 벤에게 다가왔고, 벤은 그런 소녀를 의자 위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너네 무슨 일 있었냐?”


여전히 연결시킨 의자에 누운 채 벤이 소녀의 은빛 머리칼을 마구 헝클이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덴쿠레의 질문이었다.


“별로.”


“근데 분위기가 왜 그래?”


“뭔 분위기?”


“그야-.......”


흐리멍텅한 벤의 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덴쿠레는 결국 말을 잃는다. 이 ‘검성’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할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대신 유라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얇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봄이구만.”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스한 온기를 머금으며, 덴쿠레는 다시금 한적한 낮잠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아, 마침 교내에 있었군. 앉게.”


총장의 서재로 들어서는 고도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디쿠젠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는 그의 미소에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의자 위로 엉덩이를 내려놓는 그 순간까지도 날 선 경계심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언제 불러주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전포고하는 기분으로 입을 여는 고도. 그러나 디쿠젠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미소는 오히려 그 농도가 짙어진다.


“하핫, 미안하네. 이래저래 바쁜 일이 겹쳐서 말이지.”


“빨리 본론부터 얘기하시죠.”

학회장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고도는 재빨리 선공을 날린다.

“데로를 원정에 참가시킨 건 물론이고 저도 직접 다녀왔어요.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만 그거에 대해선 따로 말씀드리진 않을 거예요.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아무래도 좋으니까요.”


“흠흠.”


총알같이 쏘아대는 고도의 목소리에도 인자한 얼굴로 고개만을 끄덕이는 디쿠젠.


“연구직 추천서. 약속하신 거 기억은 하시죠?”


“추천서? 아아, 물론이지. 그렇지 않아도 그거 때문에 부른 거네.”


디쿠젠이 책상 아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든다. 그가 자신을 향해 종이를 밀어주기도 전에 고도는 그 종이를 낚아채어 제일 첫 문단을 읽어보았고, ‘추천서’라는 단어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거기 맨 아래 내 서명만 넣으면 되네.”


“그럼 빨리해주시죠.”


“일단 자네 서명부터 받아야지.”


노골적으로 느긋한 학회장의 목소리에 결국 고도는 잔뜩 미간을 구기고 멋대로 펜 하나를 뽑아 서명란으로 펜촉을 가져다 대었다.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그 아래 총장의 이름이 새겨지면 이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원래대로 돌아간다.......?


고도는 순간 오싹함이 등골이 따라 흘러내림을 느끼며 황급하게 펜을 놓았다. 그녀는 바닷빛 눈동자를 불태우며 그대로 학회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미소가 고도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이 인간이,

곱게 넘어갈 리가 없다고.


“.......잠시 내용 좀 읽어볼게요.”

디쿠젠의 허락 따윈 필요 없었다. 고도는 곧바로 자신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추천서라는 단어를 넘어 본격적인 내용을 머리에 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한 단어에 이르는 순간,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디쿠젠의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뭐가 말인가?”


멈추지 않는 총장의 미소.

결국 소녀는 폭발한다.


“이거 전투마법사 추천서잖아요!”


그녀가 거세게 책상을 내려친 탓에 추천서는 디쿠젠의 앞까지 밀려나고 만다. 그는 느긋한 손짓으로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들어서려던 비서를 돌려보냈고, 추천서를 들어 보이며 짙은 웃음을 흘렸다.


“추천서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뿐이네만.”


“뭔 소릴 하는 거예요?! 약속한 건 연구직 추천서였잖아요!”


“난 연구직에 있어 내 추천서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줬을 뿐이지, 자네에게 연구직 추천서를 약속한 적은 없네.”


능글맞은 총장의 미소에 고도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천장을 향해 분을 내뿜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품고 있었다.


“개소리하지 마세요! 내가 전투마법사 따윌 하려고 그 고생을 하면서 진창에 뒹군 줄 알아요?!”


“전투마법사 ‘따위’라........, 흐음.”

일생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분노를 내뿜고 있는 고도였지만, 그런 그녀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총장의 표정엔 잠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선임전투마법사로서 직접 그들이 되어,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죽음과 희생을 함께 해봤으면서도 ‘따위’라는 말로 폄하하는 건가?”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요?”


“물론 상관이 있지. 그러라고 자네를 보낸 거였으니까.”


“.......네?”


그러기 위해 자신을 보냈다?

무엇을? 그리고 왜?


“제르나비 고도. 자네는 왜 연구직을 노리는 거지?”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중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학회장의 눈빛에도 고도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요.”


“왜 교수가 되길 바라는 거지?”


여기서 갑자기 근원을 파고들려는 것인가.

흥분으로 가득하긴 했지만, 고도의 이성은 여전히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이성으로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비밀 하나를 털어놓기에 이른다.



“대학 어디선가 교보재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제 유일한 친구를 찾기 위해서요.”



“고작 그 이유인가?”


“.......고작?”


고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론 자신이 겪었던 불우했던 유년기와 그로 인한 모든 시간을 공유해주는 것까진 이 노인에게 바라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이 집착을 ‘고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대학의 총장이자, 스승의 스승이 아니던가.

모든 학생들의 비극과 시간을 품어줘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화가 나나? 재미있군. 가족과 국가를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바치는 일을 ‘따위’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지만, 자신의 길을 고작이라는 단어로 깎는 것엔 민감하게 반응하나?”


“하고 싶은 말씀이 뭔데요?”


“하고 싶은 말이라! 드디어 듣고 싶은 말이 아닌, 남이 하고 싶은 말을 묻는군. 그렇다면 간단하게 말해주겠네.”


미소가 사라진 자리엔, 싸늘함만이 가득하다.





“내가 총장으로 있는 한, 자네가 교수가 될 일은 없을 걸세.”


“.......”


고도는 입술을 깨문다. 무언가 따지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차마 학회장의 무표정을 향해 쏟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하게 그녀의 가슴 속을 후벼 파고있었다.


“자네는 그 뛰어난 머리만을 믿고 막연함에 안주해서 이곳에 이르렀지. 친구를 찾기 위해 교수가 되고 싶다고? 아, 그래. 물론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인형에 대한 접근권을 얻기 위해선 왕립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었겠지. 때마침 적성검사에서 마력에 대한 내성도 파악되었으니, 마법대학으로 가자, 이렇게 생각했을 테고.

그런데 말이야, 자넨 마법사로서 마법대학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마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 오직 교수가 되는 법, 그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지. 자네가 독선적이라고 욕을 먹고 동기들과 다른 교수들의 눈 밖에 난 것은 자네가 그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서가 아니었네. 애초에 그들과 자네는 같은 배에만 타고 있었을 뿐, 전혀 다른 목적지를 품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겐 목숨을 건 5년의 기간이, 자네에겐 그것 ‘따위’잖나?”


“.......”


“자네의 특색 없는 내성. 그것이 선천적인지, 아니면 노력의 부족인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네. 그런 안일한 생각과 막연한 방향성만을 가진 사람에게 남을 가르칠 권리를 내어줄 만큼 나와 이 학교는 무르지 않아. 학년수석?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어차피 ‘마법사’가 될 생각도 없는 사람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연구직이지? 가장 편한 성과, 가장 도드라지는 업적만을 연구할 건가? 천만에. 내가 단언컨대, 자네는 유능하지만 그쪽으로 펼칠 재능은 전혀 없어.”


“.......그럼 왜 저를 붙잡아두신 거죠.......?”


가만히 말과 입술을 씹고 있던 고도가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낸다. 상처를 도려내는 심정으로 꺼낸 질문이었지만, 오히려 디쿠젠의 표정은 더욱 밝게 변모하고 있었다.


“내가 왜 자네를 반강제로 파견을 보냈다고 생각하나? 내가 왜 악마와 망자를 동원하여 자네를 전장으로 보냈다고 생각하나? 왜 내가 자네가 악마로부터 혈마력을 주입받고, 부활한 그랜드마스터로부터 마력운용을 전수받도록 유도한 것 같나?”


“.......!”


고도는 숨을 삼킨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파견이 가장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될 것을, 그리고 그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 고도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들을.


“난 자네에게 길을 보여주고 싶었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확실한 길을 말이야. 그리고 제르나비 고도, 자네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내었네. 그것을 납득했거나 납득하지 못했거나, 남은 건 자네의 선택이야. 하지만 이 대학의 총장으로서, 그리고 이론마법학과의 학회장으로서 이 말만큼은 꼭 전해야겠네.”

디쿠젠은 천천히 몸을 책상 위로 숙인다. 그의 얼굴과 눈빛은 여전히 느긋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끝에 밀려 다시금 고도를 향해 다가서는 종이 한 장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거대한 압박감을 함께 몰고 오는 중이었다.

“만약 자네가 납득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이 대학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는 거지.”


“.......”


고도의 침묵을 짓누르는 목소리. 그리고 얇은 종이는 추천서라는 글귀를 번쩍이며 그녀의 앞으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바닷빛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종이 위로 쏠리게 되었고, 그녀의 혼란은 더 이상 디쿠젠이라는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물론 디쿠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남은 것은 선택. 그것이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무거운 시간이 흐른다.

고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물론 인사는 없었다. 그리고 분노도 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것은,

덩그러니 놓여있는 얇은 종이 한 장뿐이었다.


“흠흠.”


그리고 문을 닫기 전 고도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너무도 가벼운 학회장의 숨소리.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아니면 탄식이었는지는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덤덤한 혼란 속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간다.


인형.

악마.

망자.



어째서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




“피곤하신가 보군요.”


“으앗!”

갑자기 귓속을 파고든 차가운 목소리에 로빈은 화들짝 놀라며 소파 아래로 미끄러진다. 대합실 구석에 위치한 흡연실. 그곳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었기에 그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이런, 깜박 잠이 들었네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크리스.”


“아뇨,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으실 텐데 이런 늦은 새벽까지 기다리게 해서 저야 죄송하지요.”


황망한 몸짓으로 자신과 악수를 나누는 로빈을 바라보며 크리스는 얇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야말로 확연하게 길어진 그녀의 머리칼보다 더욱 강하게 로빈에게 위화감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라는 의문에 앞서 로빈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국왕께서야말로 이래저래 바쁘실 텐데, 이런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화국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면 당연히 와야지요. 아, 결혼 축하드립니다.”


“핫, 가, 감사합니다.”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친절함과 부드러움에 로빈은 자신의 미소조차 어색해져가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정상회담은 결혼식 후로 생각하신 게 아니셨나요? 저야 아무 때나 상관없지만, 괜히 폐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아, 저도 사실 그러고 싶었는데, 욘의 대통령께서 최대한 빨리 하고 싶다고 하신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여러분께 의견을 구하고 싶은 사항도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로빈의 맞은편에 앉으며 눈썹을 치켜뜨는 크리스. 로빈은 그제야 그녀가 브린타이나 기사의 제복을 입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 그건 일단 그륜님도 오시면 이야기하도록 하죠. 아, 마침 오셨네.”


드렌턴의 안내를 받으며 어두컴컴하고 비어있는 대합실을 가로질러오는 익숙하고 경박한 그림자. 흡연실의 문을 열기도 전에 로빈과 크리스는 그 들떠있는 목소리를 확실하게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이야, 이거 늦어서 미안해요? 제일 빠른 배를 타고 오긴 왔는데 너무 급하게 연락을 받은 터라.”


드물게도, 삐죽삐죽 짧게 올라왔던 수염을 깔끔하게 면도하고 나타난 그륜이었다. 게다가 평소의 허름하고 지저분한 셔츠가 아닌, 하늘하늘한 욘의 정통의복을 입은 채였다. 나름 결혼식 하객으로서의 예의는 지킬 심산인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멋대로,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초대해서 죄송하네요.”


“아뇨아뇨~ 저야 이런 자리는 언제나 환영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요새 본궁과 사저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답답했는데 마침 잘됐죠.”


특유의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로빈, 크리스와 차례로 악수를 나누는 그륜. 그는 짙은 신음과 함께 비어있는 소파 위로 몸을 반쯤 뉘여 지친 몸을 달랜다.


“헌데, 급히 논해야 할 이야기라는 게 뭡니까? 팔루뎀 양도 건이라면 저야 환영입니다만.”


본심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장사꾼이었다. 그런 그륜의 익살스러움에 로빈은 웃으며 대답한다.


“아, 물론 그것도 있지만, 먼저 여러분께 개인적으로 논의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뭡니까, 그게? 첫날밤 기술이라면 기꺼이 전수해줄 수 있지만.”


“하핫,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그륜님에게는 따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요? 뭔데요?”






“왜 저를 죽이려고 하셨죠?”





떠들썩하던 목소리와 표정이 증발하고

흡연실은 아득한 침묵으로 빠져든다.


크리스는 지금 로빈이 무슨 말을 꺼낸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안부라도 건네는 듯한, 너무도 가벼운 어투였으니까.


그러나 욘의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검붉은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물론, 그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도 당혹감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얼마 전, 제 측근에게 제 암살을 시도했던 세력의 뒷조사를 의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유력한 용의자로 군수업체 ‘마르트’의 계열사 하나가 지목되었죠. 하지만 곧 그들이 유령계열사이며, 얼마 전 지부도 욘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이상했죠. 엄격하기로 유명한 욘의 금융위원회가 이런 유령계열사의 이주를 허용해주다뇨? 그래서 상인으로 위장한 부하에게 그 주소를 직접 찾아 가보게 해봤습니다.”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로빈의 눈동자.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그륜의 입술.


“그리고 제 부하는, 그 ‘지부’에서 나오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로빈은 겉으로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심 거대한 불안 또한 동시에 품고 있었다. 만약 그륜이 이런 중대한 사항에 부하의 목격담만으로 자신을 추궁한다고 맞불을 놓는다면, 로빈으로선 더 이상 파고들 계책이 없었던 탓이었다.

심증과 물증 모두가 불명확한 상태. 로빈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얼굴을 맞대고, 그의 반응을 살피겠다는 도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륜의 표정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느긋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편한 자세로 로빈을 마주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땀이 눈가를 찌르는 것만 같아 로빈은 점점 초조해져 간다. 그가 느낀 침묵의 길이는 터무니없이 길고 깊었지만, 크리스가 무슨 말이냐고 끼어들 틈도 없이 그륜의 웃음소리가 튀어나온다.


“하하핫!”


농담으로 치부하려는 셈인가? 이렇게 능글맞게 발뺌하려는 셈인가?

온갖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로빈의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쯤,

그륜은 너무도 편안하게 누운 채로 입술을 열었다.




“로빈슨 폐하께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예?”


되물음이라니.

이것은 예상치 못한 반응.

당혹감이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는 것을 로빈은 막을 수가 없었다.



“만약, 제가 진짜로 폐하의 암살을 시도했다면,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고 욘과의 모든 협정을 파기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실로 노골적인 질문이다.

질문의 의도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빈은 그륜의 미소에서 장사꾼 특유의 ‘보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수를 써서 이 위기를 빠져나가려는 속셈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쪽의 ‘오해’를 무기 삼아 거래를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것일까.


만약 그가 배후라면,

자신의 암살시도를 주도했던 인물이라면,




가장 사랑했던 이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자기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그녀와 시간을 같이하든 간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이 될 것이다.


그런 인물이 눈앞에서 웃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인물이 눈앞에서 자신을 떠보고 있는 것이라면,


만약 자신의 검이 허리에 있었다면-






“아뇨, 협력 관계를 깨트릴 생각은 없습니다.”






크리스는 놀란 눈으로 로빈을 바라본다. 그녀로선 로빈의 판단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상대와 협력을 유지하겠다고?

이 인간이 지금 제정신으로 지껄이고 있는 건가?


만약 자신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저 히죽거리는 대통령의 미소를 베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닌 동맹국의 수장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로빈에게서 기대했던 분노를 대신 뽑아드려는 그 순간-




“와하하하하핫!!!”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흡연실의 모든 공간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흠칫 놀라며 그 근원인 그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당사자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목을 젖히고 누운 채 큰 소리로 폭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당혹스러워하는 크리스와는 달리, 로빈은 잠자코 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끈질긴 기다림이었다. 모든 감정과 분노를 삭이며, 그륜의 웃음이 마른기침이 되어 흘러넘칠 때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입술을 기다린다.



“재밌군, 재밌어. 크핫, 역시 로빈슨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사람이군!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만족스럽게 웃고 난 뒤, 그륜은 자신이 가져온 와인의 마개를 뽑아 크게 한 모금 들이킨다.

엷게 퍼지는 향긋한 향과, 붉게 번지는 그륜의 미소.

그 끝에서,


로빈은 마침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당신을 죽이는 걸 반대한 이유지.”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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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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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2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5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3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7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2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5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2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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