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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1,37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10.0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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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
추천
25
글자
21쪽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DUMMY

대통령의 굵은 웃음소리와 그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상큼한 와인향만이 새벽의 대합실을 뒤흔든다. 론크리스는 검을 뽑으려던 자세 그대로 얼굴을 구겼고, 로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통령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죽이는 걸 반대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

예상치 못한 그륜의 반응에 로빈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처음부터 이 남자가 시원하게 의혹을 받아들이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의혹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떠넘기려는 수작이 아닌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사건의 배후로 유력한 사기업체. 대통령의 신분으로 그곳에 직접 발을 들여놓으셨으면서 이제 와서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변명하시려는 건가요?”


차분한 어투와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로빈의 말 속에 다소 가시가 돋쳐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륜 정도 되는 수완가가 그 따끔거리는 가시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의 미소는 더욱 색을 더해만 간다.


“변명? 하핫, 아뇨, 아닙니다. 저는 사실을 말씀드릴 뿐이에요.”


“하지만-”


“저는 제가 그 사건에 관련이 없다고는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예?”


마주하는 로빈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크리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이 남자가 지금 말장난을 하려는 것인가? 마치 이쪽을 가지고 놀면서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미소가 떠나질 않는 그륜의 입가를 보며 로빈은 다음으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로빈의 입술보다 마침내 만족한 그륜의 혀가 계산이 빨랐다.


“에일로피아 국제무협기구의 대표이자 중립국 욘의 277대 대통령.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저, 그륜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이런 직함들뿐이겠죠. 근데 저는 여러분들이 모르는, 또 다른 하나의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자리?”


여전히 검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는 크리스의 되물음. 그러나 그륜은 단 일 초 만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그 존재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러분들은, 혹시 ‘침묵의 기사단’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로빈은 크리스를 돌아본다. 무지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비록 국가의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아직 자신이 세상 물정에 많이 미흡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국정운영에 있어 아직도 많은 부분을 마누앙과 오로메에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 그런 그였기에 ‘자신이 모르는 개념’에 대해선 익숙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신 대답을 기대하고 바라본 크리스의 얼굴엔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지의 당혹감이 떠올라있었다.


두 국가의 수장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기사단?


“처음 듣습니다. 욘의 기사단입니까?”


“욘의 기사단이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또다시 장난스럽고 애매한 그륜의 대답에 질문한 크리스의 미간으로 짜증이 솟구친다. 이 이상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은 막아야 했기에, 로빈은 그륜이 내놓은 와인병을 집어 자신도 길게 한 모금 들이킨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씀은, 용병단체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해결사협회?”


“흐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아아, 크리스 양 화내지 말아요. 저로선 이렇게밖에 대답 드릴 수 없으니까.”

결국 크리스도 로빈처럼 몸을 뒤로 젖히고 가만히 그륜의 입술을 기다린다. 경박한 그륜의 미소와 웃음 속에서 여태껏 그들이 느끼지 못했던 ‘결심’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그륜은 미소와 와인을 거두고 깍지를 낀 손 위로 자신의 부슬부슬한 턱을 받친다.

“과거 에일로피아 반도의 주인들. 그리고 일곱 번째 주인이라는 우리 인간들의 역사. ‘왕’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여러분들이라면 지겹도록 듣고 배워야 했던 이야기들이겠지요. 여섯 개의 독립적인 왕조로 시작했지만, 3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각기 다른 방향을 지니게 된 국가들. 200년 전 아실레마제국으로 인해 하나로 통합되었던 짧은 시간을 제외한다면 우린 이 분열된 시간에 대해 너무도 무감각하게 지내왔습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반도 위에서 번영하고 있는 그 사실 자체에도 별다른 의심이 없어 왔죠. 사실 저도 『악마와의 대담』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아요. 진짜 그냥 악마가 술 처먹고 헛소리한 거였을 수도 있잖아요?”


“........”


‘인류의 뿌리’라 불리는 기록서, 『악마와의 대담』. 그리고 그것을 국보로 지정하여 보관 중인 브린타이나왕국의 대표로서, 크리스의 표정은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죠,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어느 교수와 악마가 와인을 나누며 대담을 나누기 한참 전부터 그 내용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단순히 알고 있거나 예측하고 있기만 하는 거라면 문제가 없는데, 그걸 아주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자신들, 즉 인간이라는 ‘만들어진 존재’ 자체에 의심을 품게 되었어요. 그리고 곧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 온 반도에 꽤나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말라가는 입술과 혀를 적시기 위해 그륜은 망설임 없이 와인을 들이킨다. 하지만 그 속도나 목으로 넘기는 향의 농도가, 단순히 이어질 목소리의 윤활유를 위한 것만은 아님을 로빈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비밀스런 모임을 이어온 끝에 마침내 한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에일로피아의 목소리가 사라진 이 땅에서, 순전히 사도와 악마의 독단과 욕심으로 태어난 존재인 인간은


절대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태초부터 사도와 악마의 갈등 속에서 핏줄이 갈라졌던 인간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의 피로 에일로피아의 색을 물들이고 있죠.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조금의 위화감도, 의심도 사라져버렸어요. 고착된 살육과 만용의 시간들. 하지만 그들이 신봉해야 할 에일로피아의 목소리는 이미 북쪽 대륙 너머로 쫓겨난 상태였죠. 사도와 악마들이 남아있는 한 그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올 일은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결국 그녀와 자신들을 대신하여 이 반도의 거짓된 주인들을 처벌해줄 존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와인을 삼키느라 잠시 멈춘 그륜의 혀를 독촉하는 크리스의 푸른 눈동자. 그녀도 로빈도, 지금 그륜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내용들이 그 무엇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그륜은 마치 무지의 영혼들에게 거대한 가르침을 선사해주는 현자의 짜릿함을 느끼며 입을 연다.




“케테르의 다섯용.”




크리스의 미간이 더욱 주름의 깊이를 더하고,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킨다.


인간이 이 반도에 군림하기 이전, 에일로피아의 창조와 주도하에 자리를 잡았던 종족들이 있었다. 반도의 대지신이 직접 지목한 ‘정식주인’답게 그들은 저마다 눈부신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누구도 완벽히 에일로피아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에일로피아를 대신하여 ‘실패한 주인들’을 멸망시켰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존재, 케테르의 다섯용.

음유시인들의 노랫말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 이름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자, 로빈과 크리스는 그 어떠한 반응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운 다섯 용을 인간들이 발로 뛴다고 해서 직접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죠.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다섯 용을 찾아낼 수 없다면, 에일로피아를 대신하여 용들이 직접 나서도록 ‘유도’하기로요. 그리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조직을 꾸려 케테르의 다섯 용이 등장하기 위한 요소와 변수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조직의 이름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침묵의 기사단’입니다. 에일로피아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땅에 우리 거짓된 주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말 같잖은 이유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하더군요.”


“즉, 침묵의 기사단은 반도의 멸망을 원하는 집단이란 말인가요? 어째서 그런 위험한 단체가 여태까지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죠?”


그륜의 말이 진실이라면 ‘침묵의 기사단’은 꽤 오랫동안, 그것도 가장 치명적인 뜻을 품고 활동해왔다는 것이 된다. 그런 그들의 존재를 국가의 수장이라는 자신과 크리스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로빈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핫, 그들은 단순한 광신도집단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지성적이고 치밀하죠. 자신들의 뜻에 치명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그들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예.”

그륜은 미소와 함께 로빈의 말끝을 가로채어 대신 말을 맺어준다.

“가장 취약했던 카나반에서, 로빈슨이라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즉위. ‘침묵의 기사단’에게 당신은 너무도 거대한 ‘변수’였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변수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죠.”


“하지만 실패한 거군요.”


“아뇨,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이번만큼은 로빈도 눈썹을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 대한 암살시도. 하지만 그것은 미수에 그쳤다. 지금 저 남자와 직접 눈을 마주보고 있는 자신이 바로 그 증거.

헌데 실패하지 않았다니?

뭐라 따져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기에 로빈은 와인을 들이키며 그륜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런 시선과 눈빛 속에서도 여전히 태평하게 웃고 있었다.

“자, 생각해보세요. 그 뒤로 당신을 향한 직접적인 위협이 있었나요? 없었죠? 그건 ‘침묵의 기사단’이 그 이상의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애초에 첫 번째 시도에서 그들은 변수를 지우는 것에 성공했다는 뜻이죠.”


“.......변수를 지워........?”


“예. 자아알 떠올려 봐요. 그들의 시도는 정말 ‘암살미수’에 그쳤을까요? 당신은 그들이 당신을 노린 것이라 생각하고 그 표면적인 결과만을 받아들였지만, 정말로 당신은 그 어떠한 ‘상처’도 없었나요?”


“........”


상처.

그날의 상처.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검에 베이고 걷어차여 생긴 상처들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상처.

그리고

그녀가 품고 있었던

자신과 그녀의 목소리.



“설마-”




“예, 맞아요.”




마주하는 두 남자의 얼굴에서 동시에 표정이 사라진다.




“처음부터 그들이 노렸던 것은 아뮤르 지나의 뱃속에 있는 당신의 씨앗과 그녀의 임신기능이었습니다.”




와인병이 산산 조각나며 품고 있었던 붉은 향기를 퍼트린다. 유리파편이 로빈의 손을 파고들어 와인보다 진한 붉은 빛이 책상 위로 흐르고 있었지만, 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올라 그륜의 멱살을 낚아챈 뒤였다. 크리스는 그 속도에 반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니, 말릴 수 있었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로빈의 표정이 그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어째서.......?”



간신히 살의의 직전에서 멈춘 로빈의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삼키기 위해 찢어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로빈이 힘겹게 내뱉은 한마디.


그러나 기사가 아닌 몸으로 거센 영력의 압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륜의 새파래진 얼굴에서 여유로움은 사라지질 않는다.


“그 당시의 당신은 죽여 봤자 그리 큰 반향이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당신이 남길 ‘후세의 시간’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너무도 커다란 변수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분열을 유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생명을 뺏는다면 결국 당신은 언젠가 다른 후세를 남겼겠지요. 하지만 그녀를 살려두면서 ‘후세의 시간’을 지울 수만 있다면, 당신은 절대 그녀를 버릴 수 없을 거라 그들은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뜻대로 되었지요. 후세를 남길 수 없는 왕. 결국 당신의 시간이 끝날 때가 오면 카나반은 다시금 당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바로 그게 그들이 원하는 상황이니까요.”


“.......”


자신을 변호하려는 수작도 아니다. 그리고 해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륜은 단순히 사실만을 내뱉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로빈은 한동안 그륜의 멱살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면 이미 이 대통령의 목은 뽑혀나가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한 명의 기사가 아니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고통을 함께 삼켜나가기로 정한, 한 명의 남편이자 한 국가의 왕이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아니, 애초에 어떻게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로빈의 손이 그륜의 목에서 떠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 크리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륜을 향해 물었다. 그에 그륜은 어느새 깊은 자국이 남아있는 목을 어루만지며, 얇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뭐어, 그야-”


여느 때와 다름없는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지금의 로빈과 크리스에겐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미소였다.





“대대로 욘의 대통령은 ‘침묵’의 후원자였으니까요.”





===========================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 없는데.”


수차례의 노크 끝에 열린 방문. 하지만 벤을 맞이하는 것은 고도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퉁명스러움에 뭐라 한마디 하려던 벤은 곧 기숙사방 내부의 상황을 보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려고?”


“가긴 어딜 가. 나가야지.”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주변과 책상, 그리고 옷장들. 워낙 넓은 방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었기에 멋대로 들여놓은 개인물품이 꽤 많았으나 이제는 모두 거대한 가방 속으로 모여 있었다.


“학회장님한테 얘긴 들었어.”


“아, 그럼 따로 설명해줄 필욘 없겠네.”


“그냥 이렇게 도망치는 거야?”


“도망?”

짐 싸던 손을 멈추고, 벤을 향해 바닷빛 눈동자를 부라리는 고도.

“뭐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러셔. 나하곤 이제 상관도 없으니까.”


“이렇게 무작정 도망치는 거 너답지 않아.”


“그럼 씨발 내가 뭘 어째야 하는데?!”

직전에 벤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녀의 외침이 기숙사 복도로 새어나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외침은 멈추지 않는다.

“수석한테 재능이 없다는데! 지난 몇 년간 내가 헛지랄하고 있는 걸 눈으로 뻔히 봐왔으면서도 이제 와서 나한테 그 지랄을 하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유급이라도 할까? 유급하면 뭐가 달라져? 또 뻔히 이용만 해먹다가 내성이니 뭐니 핑계 대면서 내쫓을 게 뻔한데?!”


“그건 핑계가 아니라 진짜로 그런 거잖아.”


“.......뭐어?”


너무도 어이가 없어 고도의 입가로 실소가 새어 나온다. 이 새끼가 지금 내 화를 돋우려고 쳐들어온 것인가 의심이 들기 시작한 그녀였지만, 벤의 입술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부터 학회장은 너를 이론마법학과로 졸업시킬 생각이 없었던 거야. 이론 쪽이 아닌, 바로 ‘응용’쪽으로 돌려놓으려는 거였지. 정확히 말하자면 전투마법사 쪽으로.”


“그래서 뭐.”


다시금 벤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짐을 싸는 일에 집중하는 고도.


“반강제로 너를 전장에 보낸 것도, 거기서 전투마법사로서의 재능에 눈을 뜨게 한 것도 바로 그런 의도의 일환이었다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모른다- 라는 단어만큼 고도를 자극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그녀는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며 정리하던 옷가지를 비틀어 쥐었다. 벤의 얼굴을 향해 내던지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짓은, 벤의 짤막한 한마디에 저지당하고 만다.

“그는 너에게 가장 성공적이고 확실한 길을 제시하는 거잖아.”


“.......”


확실한 길?

여태까지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었나?

그 한 가지가 없어서 이 모든 혼란의 시간을 보내왔던 게 아니던가.


“권위자가 되어 네 친구를 찾고 싶다는 그 소망. 그거 자체를 무시하는 게 아냐. 그건 나도, 학회장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네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어.”

앉아있는 소녀를 향한 조심스러운 한걸음.

“넌 네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뭐?”


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자신이 살아온 길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에 고도는 혼란스러웠다. 비록 출신도, 이름도 제대로 받지 못한 고아이지만, 자부심만큼은 잊지 않고 살아온 그녀였다. 근거 없는 자부심이 아니었다. 한 번도 놓치지 학년 수석이야말로 그 증거.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인정해야 해. 사람이란 게 모든 분야에서 완벽할 수는 없어. 네가 가장 자신 있고 목표로 하던 자리에 실제론 재능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 거대한 절망이었겠지. 이해해. 하지만 어째서 너는 그 사실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거야?”


“........”


“정말로 네 소망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길이 교수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그걸 잘한다고 생각해왔으니까 당연히 그게 안 되면 끝인 거라고? 천만에.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도록 학회장이 기회를 주었잖아. 그리고 넌 훌륭하게 그걸 증명해냈고.”


물론 증명해냈다.

연구직, 교수로서의 자신이 아닌,

전투마법사로서의 자신을.


“.......전투마법사가 되어서 뭘 할 수 있는데? 전장에 끌려나가서, 피를 튀기고 생명을 거두고, 그걸로 뭘 이룰 수 있는데?”


“네가 처음 숲에서 나를 만났을 때, 너와 나 둘 중 누구도 내가 왕의 친구이자 검성이라는 이름을 달게 될 줄은 몰랐어. 나 또한 그렇게 될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됐지. 왜 그런 줄 알아?”


“........”


“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골랐기 때문이야.”


고도는 순간적으로 절망의 군주에게서 들었던 한마디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죽어도 하고 싶은 일에 재능이 없는 것과, 죽어도 하기 싫은 일에 재능이 있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비참하다고 생각하는가?’


그에 고도는 그나마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후자가 덜 비참하다 대답하였지만, 악마는 그 선택을 비웃으며 ‘자의’가 없는 세상을 만든 인간을 탓하였다.



그리고 고도는 이제야 그 질문의 참된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선택이라는 자의가 없는 세계.

하고 싶은 것을 따라가려 하지 말고, 재능이 있다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

선택하지 않는 자에겐,

그 어떠한 길도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너는 그 선택을 해야 해.”

어느새 벤의 먹색 눈동자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목표는 같아. 하지만 넌 제2의 길을 선택의 기준에도 두지 않고 있어. 그러니까 유일하다고 믿었던 것에 배신을 당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는 거야. 목표를 접은 것이 아니라면, 이제 선택을 해. 너의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일’에 대한 길은 끝났어.”


“하지만 전투마법사로는-”


“상아탑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도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상아탑의 꼭대기. 지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 위치와, 그 위치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의 행방.


“제르나비 고도. 어째서 너에게 ‘제르나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지, 그 의미를 생각해봐.”


“.......!”


그리고 마침내 고도는 벤의 의도를 꿰뚫는다.

그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과한 목적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똑바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친구를 찾기 위해’라는 목적을 안일하다고 욕하지 않는다. 아니, 이 남자는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무모하다고 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달고 있는 이름이야말로 살아있는 증거였기 때문에.




“.......잘 생각해봐.”




이미 고도의 이성은 사고의 흐름 속에 흘러가고 있었기에 벤의 목소리가 닿질 않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바닷빛 머리카락을 한껏 헝클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방을 나가기 직전,


자그맣게 속삭인 목소리 또한 듣지 못한다.




“아직 내겐 네가 필요하니까.”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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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1,007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24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23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24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10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55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30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82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6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9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74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45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60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76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26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1,006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7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6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61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21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9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7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11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9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11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1,001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801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8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55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7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6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8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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