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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59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10.17 23:32
조회
1,043
추천
27
글자
19쪽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DUMMY

결혼식에서의 신부라는 존재는, 그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빨아들이며 가장 밝게 빛나야 하는 꽃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신부’를 넘어 한 국가의 왕비가 되는 자리라면. 신부가 받아야 할 축복과 환희의 무게는 여인이 이끌어 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총동원해야 하는 전투가 된다. 하객들뿐만이 아닌 공화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앞으로 이어질 행복과 왕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결혼식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오로메는 결혼을 경험한 선배로서, 그리고 왕당파 귀족가문의 가주로서 오랫동안 지나를 ‘왕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다. 평생에 걸친 수련으로 몸 곳곳에 자리 잡은 지나의 흉터와 근육들을 가리기 위해 특별한 화장법을 개발해내었고,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아 푸석해진 그녀의 머릿결을 위해 사비를 들여 영양제를 퍼부었다.

식장에서의 몸가짐, 걸음걸이, 미소의 온도와 깊이까지.

오로메의 모든 노력들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나가 ‘왕비로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첫 번째 공식행사이자, 그들에게 지나라는 여인이 어떤 왕비가 될 것인지, 그리고 그런 왕비를 맞이하는 왕이 어떤 존재인지 긍정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결론적으로, 오로메는 이 결혼식을 통해 재조명받게 될 왕실과 그런 왕실을 지지하는 왕당파에 대한 인식개선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때문에,

식장으로 들어선 지나의 모습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오로메 본인이었다.



여성미라곤 느껴지지 않는 묶어 올린 머리.

그나마 있었던 기초화장도 지워버려 풋풋하게 드러난 피부와 흉터.

본연의 색을 되찾은 분홍빛 입술은 지난 한 달간 지겹게 연습해왔던 미소를 품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로메를 비롯한 식장 모든 하객들의 시선은 수수한 신부의 얼굴이 아닌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저건....... 제복?”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유라의 목소리에 벤은 한층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녀의 말대로 지나가 입고 나온 것은,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도,

순수한 백색 드레스도 아닌,


카나반 기사단의 남색정복이었다.



주례를 맡은 대사제 레기라조차 말을 잃고 제복 차림으로 나타난 두 남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환호성도 음악도 없는 끔찍한 침묵 속에 방치되는 시간이 길어지자, 결국 로빈이 먼저 마이크를 잡고 앞으로 나선다.


“반갑습니다, 국민여러분. 이토록 행복하고 축복받는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 진심으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인사말에도 모든 사람들은 질린 기색 없이 숨을 죽이고 식단 위 왕의 모습과 목소리에 집중한다.

“먼저, 노출도 높은 드레스를 기대하신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아, 얘가 몸매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크억-!”


신부에게 옆구리를 얻어맞는 왕의 모습에 식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는 것에 만족한 로빈은 정면에서 죽일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누앙과 오로메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저와 신부가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에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지 궁금하시겠죠. 본격적으로 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짤막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천천히 객석을 방황하는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

그가 찾아낸 것은,

히죽 웃으며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오랜 친구의 얼굴이었다.

“여기 있는 기사분들은 대부분 얼마 전에 검성께서 훈련소수료식 때 했었던 연설의 내용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룬 기사들을 신문으로 접하신 분들도 계시겠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새 다시 맞잡고 있는 신부와 신랑의 손.

서로 마주하는 시선 속에서 로빈은 자신의 선언이 가져올 모든 파란에 맞설 용기를 얻는다.

“인간의 시대는 언제나 피를 불러왔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그 모든 순간들은, 과거 목숨을 바친 영혼들이 있었기에 영위할 수 있는 사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은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희생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기사만이 전장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기사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평화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위기는 모두가 공유해야 할,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건 애국심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행복을 이어가고 싶은 영혼들이라면 마땅히 겪게 될, 생존의 굴레입니다. 그리고 그 생존을 위한 투쟁은 왕이라고 해서 피할 수 없습니다.”

지나와 맞잡은 반대편 손으로,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빼어드는 로빈. 지나 또한 마찬가지로 회색빛의 에페검을 뽑아 로빈의 검에 겹쳐놓는다.

“저는 기사 출신입니다. 그리고 이 녀석도 저와 마찬가지로 기사 출신입니다. 저는 세뮈엘님에게 이어받은 혈통으로 평생을 공화국에 봉사할 것이라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달랐습니다. 선대 검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과 기사의 피를 따를 것을 맹세했습니다. 때문에 저와의 사랑도 포기하려 했습니다. 제가 왕이고, 그녀가 기사이기 때문에.

결국 검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뮤르 지나는 ‘기사’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그녀에게 말합니다. ‘왕비’는 희생하는 자리가 아니다. 너는 기사로 남아서는 안 된다- 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비는 왕비일 뿐, 그리고 왕은 왕일 뿐, 그들은 희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또한 제가 말씀드린 ‘위기’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신 겁니다.”

손과 검을 맞댄 채 서서히 주례석을 향해 다가서는 로빈과 지나. 하객들에게 등지고 있는 대사제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들뿐이었다.

“저는 누구보다도 본궁부터 희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가족을 전장으로 내보내고 가슴을 졸여야 하는 그 심정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도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런 ‘희생’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전장으로 파견되는 왕자와 왕녀에 대해 열광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앞으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 될 테니까요. 필요하다면 저 또한 망설이지 않고 검을 잡고 뛰어나가 전우들과 피를 흘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까진, 저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그 역할을 위임할 생각입니다.”


지나가 자신의 검을 로빈에게 내민다.

로빈은 그 검을 받아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회색빛의 날 위를 쓰다듬는다.

붉은 온기가 차가운 연철의 빛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 앞에서 지나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그 일련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자는, 마누앙과 오로메를 포함하여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어진 로빈의 목소리는, 마치 그의 것이 아닌 빌려온 목소리처럼 무거운 영력과 함께 식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숲의 수호자 세뮈엘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의 눈이 되어라.

나의 목소리를 대신하라.

나의 눈물이 되어 흐르고

나의 피가 되어 흘러라.


숲이 그대에게 속삭일 때,

마침내 그대는 나의 검이 될 것이다.


나의 검이 되어라.

나의 검이 되어

숲의 의지에 반하는 모든 목소리들을 침묵케 하라.

라 보즈 데라 셀바 미트라블루스.

아뮤르 지나. 붉은 탕나무의 이름으로,

그대를 국왕대리기사로 임명한다.”


“받들겠습니다.”


자신의 에페검으로 흐르는 로빈의 피를 입술에 적셔, 그대로 로빈의 손등과 그의 검신에 입을 맞추는 지나. ‘국왕대리기사’라는 이름을 듣고 몇몇 귀족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경건한 분위기를 꿰뚫을 수 있는 목소리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진심으로 두 사람을 축복합니다.”



하객들은 물론이고 의식을 치르던 로빈과 지나 또한 새로운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처음 로빈과 지나가 식장으로 들어섰던 기숙사 건물의 뒤편, 그 천막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



‘흐름의 검성’, 아뮤르 한센이었다.



갑작스러운 영웅의 등장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지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한센의 느긋한 발걸음을 바라본다. 그는 말끔한 제복의 차림으로, 지팡이를 비롯한 그 어떠한 도구의 도움도 없이 융단을 따라 주례석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지나는 그가 자신과 로빈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도 그의 등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으로만 그의 동선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로빈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등장이 그의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무례인 줄은 알고 있으나, 오늘의 주례를 제가 대신 봐도 될지요?”


“옛?”


“부탁합니다.”


절차와 행사에 있어서는 공화국의 그 누구보다 까다로운 대사제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여유로운 노인의 목소리엔 도무지 반항할 수가 없었다. 아뮤르 한센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이 자리에서 갖고 있는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결국,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례석에서 내려와 한센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했다. 로빈이 복잡한 표정의 대사제와 눈을 마주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내보인 것은, 지나를 왕비로 맞이함에 있어 줄곧 그와 충돌해왔던 점에 대한 소심한 복수.



“국왕대리기사라 함은, 말 그대로 왕을 대신하여 검을 드는 기사입니다. 그 검 속에 깃든 책임의 무게는 검성의 그것보다도 치명적인 무게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왕의 이름으로 검을 드시겠습니까?”


“.......네.”


아직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할아버지가 믿기 힘든 듯, 간신히 대답을 쥐어 짜내는 지나. 그녀에게 편안한 미소를 한번 내어 보이고, 한센은 이번엔 로빈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자신의 이름으로 전장에 보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결정입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폐하께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녀에게 검을 맡기겠습니까?”


“네.”


망설임 없는 대답.

한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름이 깊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대들은 이 시간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축복하기 위해 이렇게 모여주신 모든 증인들의 앞에서, 저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빈슨 폰 미트라블루스.

그대는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동안 신부를 사랑할 것을, 그리고 신부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동안 그녀의 사랑을 책임질 것을 약속합니까?”


이것은

주례로서의 질문이 아니다.


로빈은 한센의 깊은 눈동자에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욱 망설이지 않는다.


“네.”



“아뮤르 지나.

그대는 신랑의 검으로서, 그리고 왕비로서 받아들여야 할 모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그의 사랑을 품고 되돌려줄 것을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한센은 손녀의 눈물을 바라보며,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크기의 미소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선다.


“이번만큼은 세뮈엘님의 이름을 빌려 축복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에 대한 축복은,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의 몫입니다. 그들을,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 또한 여러분 모두의 몫입니다. 제가 부탁드릴 것은 그뿐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과거의 영웅.

놀란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영웅은 영력이 실린 목소리를 봄하늘로 흘려보낸다.



“신랑신부, 맹세의 입맞춤을.”



사선으로 스치며 날카롭게 울어대는 두 자루의 검.

그리고 로빈은 살며시 지나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욕조 안에서의 그날, 자신은 절대 결혼식 중에 눈물을 보이지 않을 거라던 그녀의 다짐을 멋지게 부숴준 덕인지 그의 얼굴엔 연신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본다.


이 눈을 바라보기까지 수많은 일이 있었다.

수많은 눈물이 있었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


서로의 손길을 접어야 했을 때도 있었다.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다.




“사랑해, 지나.”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이 한마디를 위해 견뎌왔던 시간. 그 보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


물론 둘의 시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무엇이 자신과 눈앞의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거대한 기대와 불안보다도, 로빈은 그녀가 이 순간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마웠다.



“나도....... 사랑해........”



눈물을 가두려는 듯, 살며시 눈을 감는 지나. 로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핏자국이 남아있는 그녀의 입술에 온기를 담는다.



이 입맞춤이야말로,

그들이 처음 온기를 나누었던 그날 밤부터 이어져 왔던

끈질긴 후회가 끝나는 순간.


로빈과 지나.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참아왔던 환호가 도시를 뒤흔든다. 축복을 위한 꽃가루가 봄하늘을 뒤덮기 시작하고, 흥겨운 악단의 연주가 행복의 음색을 꽃잎에 담는다.

예복과 드레스 대신 제복을,

꽃다발 대신 검을 쥐고 있는 이색적인 신랑과 신부의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미소는 이 세상 그 어떤 연인들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미소와 함께,

‘위기’ 속에 주어진 마지막 축제가 시작된다.




==============




오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웃음소리와 술냄새가 캉페온광장에 스며든다. 줄곧 험상궂은 인상과 고함으로 일관하던 드렌턴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활짝 웃으며 식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술을 원하는 사람에겐 술이 주어졌고, 음식을 원하는 사람에겐 음식이 주어졌다. 광장은 물론이고 광장까지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도 원 없이 술과 음식들을 즐길 수 있었다. 회색도시 아르다르 전체가 들썩였으며, 분위기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줄곧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목만 축이고 있던 마누앙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슬쩍 올려다본다.


“검성님. 어서 오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계속 뚱한 표정으로 앉아계시길래.”


“그러는 검성님은 이미 꽤나 달리신 모양이군요.”


잔소리를 피해 도망간 신부를 잡기 위해 오로메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벤은 마누앙 바로 옆자리에 술에 찌든 몸뚱어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주는 것만 받아마셨는데도 이러네요. 원래 이런 분위기를 잘 즐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즐기지 못하는 사람끼리 잠시 즐겨보지요.”

허탈하게 웃으며, 벤은 결국 마누앙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 크게 한 모금 들이킨다.

“검성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뭘요?”


총리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태연하게 되물어오는 벤. 마누앙은 검성의 칙칙한 눈동자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쉰다.


“제복의 결혼식. 거기에 신부를 국왕대리기사로 임명한다는 발상 말입니다.”


“저야 몰랐죠. 총리님은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국왕대리기사를 생각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공표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뭐어, 나름 고심해서 짜낸 연출이었겠죠. 그나저나 국왕대리기사라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방법치고는 꽤나 투박했네요.”


마누앙은 와인의 향기가 섞인 벤의 푸념을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곤 비어있는 검성의 잔을 채워주는 대신,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를 흘려 넣는다.


“검성께서는 폐하의 국왕대리기사 임명이 단순히 아뮤르 경을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술을 기대하고 잔을 내밀던 벤이 의아한 표정으로 총리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마누앙은 어렵지 않게 그 표정에서 무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곧 왕비가 될 사람을, 그것도 결혼식에 국왕대리기사로 임명한 것은 분명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처사입니다. 하지만 이 파격은 단순히 ‘결혼 후에도 기사로 복무하고 싶다’는 아뮤르 경의 요청을 위한 수단은 아니지요. 일련의 과정인 셈입니다.

토우칸 대군과 엘리자베스 왕녀의 브린타이나 파견을 통한 사전작업으로 왕실의 움직임을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켜놓고, 폐하께서 직접 발언한 ‘희생’의 전방에 본인이 직접 발을 내어놓는다-. 이로써 폐하께서 계획하고 계신 ‘통합군’의 실리와 명분 모두가 왕실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될 테지요. 물론 대중들의 지지와 전체적인 흐름만으로는 의회의 견제를 뚫어낼 수 없습니다. 바로 거기서 ‘서출차별금지법’과 제3의 당이 등장하는 겁니다.”


“.......으음, 복잡한데요.”


“하핫, 검성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나름 안에서 손을 쓰고 있다- 정도로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뭐 애초에 그 녀석 걱정은 별로 안 합니다. 당장 제 앞가림하기에도 벅차서요.”


제복을 반쯤 풀어헤치고 탁자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왕녀. 두 번째로 내달리고 있는 덴쿠레와 초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유라. 결국 올리의 의수를 망가트리고만 로즈. 이젠 술싸움이고 뭐고 아예 기사들 사이에서 술통을 낀 채 퍼부어대고 있는 로즈엄마.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바닷빛의 눈동자까지.


사랑의 결실을 맺은 친구를 축하하면서도 벤은 자신의 입가에서 한숨을 떼어놓지 못하는 중이었다.


“검성께선 체력을 아껴두셔야지요.”


“예?”


다시 잔을 채우려는 벤을 느긋한 목소리로 제지하는 마누앙. 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총리를 바라보았지만, 도리어 질책에 가까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피로연 말입니다.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피로연? 지금 하고 있는 게 피로연 아니에요?”


“폐하께서 자유롭게 즐기기 위해 형식을 바꾸셔서 그렇지, 지금은 식의 연장선입니다. 피로연은 저녁때 본궁에서 따로 열립니다.”


“아아, 죄송. 청첩장을 제대로 보질 않아서.......”


“허, 그럼 피로연 때 있을 행사도 모르시는 겁니까?”


“.......행사라뇨?”

마누앙을 고개를 끄덕일 뿐, 그 이상의 설명을 내놓지 않는다. 마치, 벤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이.

벤은 와인을 입에 머금은 채 허공으로 시선을 향했고, 알콜로 적셔진 그의 두뇌는 마침내 반쯤 취한 주인의 머리에 강한 충격을 불어넣는다.

“.......아.”


짧은 탄식.



벤은 기억해낸다.


국왕대리기사 임명 외에,

이 결혼식에 남아있었던 또 하나의 이름을.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5.10.18 00:04
    No. 1

    우여곡절 엄청 많았지만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네요! 제가 다 감개무량합니다ㅜㅜ 그리고 다음화에는 벤의 검성명이 드디어 밝혀질듯 하네요ㅋ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0.18 17:23
    No. 2

    ㅠㅠ 라루사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5.10.18 02:42
    No. 3

    그냥 '그냥'의 검성으로 하자니까요. 잘 보고 갑니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0.18 17:23
    No. 4

    으잌ㅋㅋ 주정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10.18 08:53
    No. 5

    왕은 왕이군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확실히 있네요. 이 공화국은 이제 어떻게 바뀔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0.18 17:24
    No. 6

    불의검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래저래 바쁜 왕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10.23 12:13
    No. 7

    전국민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왕비가 될여자에게 이녀석이라는 호칭은 쿨하다거나 소탈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언행이 아닐까 하는....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0.23 14:52
    No. 8

    섹드립까지 치는 걸 보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닐지도 ㅋ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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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7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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