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61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9.02 21:09
조회
917
추천
24
글자
19쪽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DUMMY

“.......늦었네.”


직접 말로 표현한 것이 벤이었을 뿐, 그 광경을 지켜본 모두가 같은 감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짙은 전투의 열기와 함께 아직까지도 성 주변 곳곳에 남아있는 뒤틀린 마력의 잔재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몇몇 시신이 해자와 성벽 아래로 널브러져 있었지만, 버려진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손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처참한 전장의 풍경 중에서 무엇보다도 벤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망루 위 높은 바람을 타고 펄럭이고 있는 왕국의 깃발이었다.


“공성전을 준비하시겠습니까?”


“아뇨.”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로 다가선 셰르를 향해 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성을 점령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그럴 상태도 못되고.”


제대로 된 휴식조차 취하지 못하고 두 번의 국경과 사지를 헤쳐오며 살아온 병사들을 독려, 또다시 계곡을 넘어 북으로 넘어왔다. 공성병기는커녕 보급조차 겨우 사정하여 열흘 분량을 받아내었을 뿐. 병사들도, 생도들도,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책임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벤은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전략적가치가 남아있지 않은 곳이다. 이미 남브린타이나의 주력은 계곡을 넘어 북진에 성공했고, 북브린타이나는 남침을 위해 산맥의 서부와 동부에 흩어놓았던 전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야 할 것이다. 처음에 계획했던 제국과 북브린타이나의 이간책을 충실하게 마무리한 지금, 미끼에 불과했던 거점을 이제 와서 되찾을 의무는 없다.

하지만,

벤이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벽 위로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지만, 성문이 닫혀있는 걸로 보아 주둔군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곡을 넘으면서 몇 번 통신을 시도했습니다만, 답신이.......”


“아직 속단은 하지 말죠. 토우칸이 지휘관으로서 가지고 있는 역량은 분명하지만, 아직 그 밖의 사항들, 특히 대외적인 처세술에 있어서는 저와 마찬가지로 미숙해요. 그러니까 그에게 카논을 붙여둔 겁니다. 그녀라면 반드시-”


벤의 말은 이어지지 못한다. 침묵만을 품고 있던 바르사이파의 성문이 괴기스러운 마찰음과 함께 입을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셰르는 곧바로 동기와 병사들에게 전투태세를 명하려 했다. 만약 적들이 구원을 예상하고 요격을 위해 대기하는 중이었다면 상황은 불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쪽은 연일 이어진 혹사에 가까운 전투와 행군을 마치고 지친 상태.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는 상대를 맞아 정상적인 전투를 벌일 수가 없다고 판단한 셰르였기에 그의 눈과 머리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성문의 틈 사이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분주하게 움직이려던 카나반군의 지휘부는 일순간 침묵에 빠지고 만다.


요격을 위한 군세 따위가 아니었다.

성문을 통해 빠져나온 그림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브린타이나 왕국의 기사, 빈스라고 한다! 카나반과의 협상을 요청한다!”


거리낌 없이 공격마법과 화기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 그 그림자의 주인은 카나반군을 향해 영력이 실린 거친 목소리를 내뿜었다. 그제야 셰르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고 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검성님, 저건-”


“제가 갔다 올게요.”


짧은 대답과 함께 말을 몰고 나가는 벤을 향한 셰르의 날카로운 눈가에 경악이 맺힌다.


“지휘관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일개 지휘관이 아닌 검성, 좀 더 지위를 자각하셔야 합니다.”


“아 그놈의 검성검성. 왜 이럴 때만 검성취급하고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 기사는 딱 봐도 기껏해야 부관에 불과한데 검성이 직접 나서다뇨? 우리군 전체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이럴 땐 급을 맞춰야 합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참아주십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


이의는 듣지 않겠다는 듯, 셰르는 빠르게 벤을 제치고 빈스를 향해 말을 재촉한다. 벤은 불만스러운 듯 곧바로 셰르의 뒤를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그런 그의 앞을 엄숙한 표정의 유진과 리즈가 가로막은 덕분에 곧바로 포기해야만 했다.




“카나반의 기사, 소위 셰르 시즈키치다. 공성준비로 바쁘기 때문에 짧게 말하라.”


목소리가 닿을 거리에 이르자 셰르가 먼저 입을 열었지만, 돌아온 것은 빈스의 비웃음이었다.


“허세 부리기는. 네놈들이 공성병기는커녕 제대로 싸울 기력조차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뭣하면 지금 당장 증명해보일수도 있는데?”


짧은 침묵과 함께 오고가는 험악한 시선.

먼저 물러난 것은 빈스였다.


“너희와 이런 곳에서 시간낭비하기엔 이쪽이 좀 바쁘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조건만 간단히 말하겠다.”


“조건?”


되묻는 셰르의 시선을 향해 빈스는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처음 이 제안을 생각한 벨레이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자신들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재 성 안에는 2000여명의 카나반 병사와 기사들이 포로로 잡혀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카나반 왕의 형제도 포함되어 있지.”


“.......”

오랜 뒷골목 생활로 인해 협박에 만큼은 무심하게 대처할 줄 알게 된 셰르였지만, 지금만큼은 표정을 굳히는 것 외에 그 어떠한 허세도 부릴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보장은?”


“그런 가치 높은 ‘패’를 우리가 함부로 죽일 것 같나? 그는 물론이고 부하기사들, 병사들도 털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뭐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셰르의 목소리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빈스는 노골적으로 그의 기분을 더럽히기 위해 짧게 웃고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던진다.


“거기에 적혀있는 모든 사항을 이행한다면 그는 물론이고 모든 포로를 해방시켜주겠다. 단, 하나의 조항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협상은 없다. 기한은 72시간. 그때까지 답이 없으면 우리 뜻대로 해석하겠다.”


빈스는 더 이상의 말은 할 필요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성문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한다. 평소의 셰르였다면 그런 무례함에 대해 욕을 한바가지 퍼부었을 테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빨리 봉투를 벤에게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




“남브린타이나와 맺은 모든 협정을 파기. 현재 대치 중인 남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교란하고, 최종적으로는 팔루뎀을 중심으로 한 남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이후에 북브린타이나에 양도한다. 뭐 굵직한 것만 정리하자면 이쯤 되겠네요.”


“말도 안 됩니다!”

차분하고 느긋하게 종이에 적힌 내용을 발표하는 벤을 향해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유진의 목소리였다.

“폐하와 검성께선 최종적으로 아실레마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오셨습니다! 이 요구조건은 그 노력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거잖습니까?!”


“놈들로서는 토우칸이 카나반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크게 잡고 들어온 거겠죠. 일단 우리의 반응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패에 대한 가치를 가늠해보려는 겁니다. 그렇긴 하더라도, 너무 터무니없긴 하네요.”


전술지도 위로 종이를 던지듯 내려놓는 벤. 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참모와 부관들은 동시에 그 종이로 시선을 모으면서도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왕의 형제가 적국에 포로로 잡힌 전대미문의 상황. 전사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 후폭풍만큼은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북군이 원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를 살리고 싶으면, 남군, 즉 론크리스를 배신하라는 것이다.


“일단 서둘러 본국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논의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진에 비해 냉정함을 잃지 않고 셰르의 조언. 그 타당함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직 한 명,

벤을 제외하고.




“.......그러네요. 분명, 이런 곳에서 우리끼리 정할 수 있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죠.”


“.......검성님?”


허공을 향해 혼잣말처럼 말을 흐리는 벤을 돌아보는 유진. 벤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와 전술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포로가 된 왕족. 범국가적인 협상내용.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원군은커녕 추가적인 방위군조차 보이지 않는 주변 지역. 결정적으로, 그들은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이 중요한 협상의 기한으로 고작 72시간밖에 내주질 않았죠.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


지금 자신들의 검성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기사와 부관들은 서로 의문이 묻은 얼굴을 확인할 뿐, 그의 혼잣말에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못한다.


“셰르. 놈들한테 전달하세요. 72시간도 필요 없다고. 오늘밤 당장 답을 해주겠다고요.”


“예? 하지만-”


“대신-”


셰르의 말을 자르며 다시 모두의 시선을 받는데 성공한 벤. 어느새 그의 얼굴엔, 같은 편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특유의 음흉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번엔 제가 직접 나갈게요.”







같은 장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하늘과 대지 모두를 뒤덮는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태양이 떠있던 자리를 푸르스름한 달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뿐이었지만, 묻혀있던 늦겨울의 한기를 끄집어내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늦었군.”

때문에 고작 십여 분의 기다림이었음에도 빈스의 목소리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림자의 위로 달빛이 내리쬐자 그의 짜증은 더욱 증폭되었는데, 두터운 후드를 눌러쓴 덕분에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조항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협상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이라면 이야기는 없는 걸로-”


“아아, 그 조항 말인데요.”


위기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의 목소리에 빈스는 당황한다. 하지만 그의 당황은, 날선 분위기가 한순간에 물러졌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가 어째선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죠. 아마 당신네들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그 터무니없음을요. 그런데 애초에 그렇게 터무니없을 정도의 요구를 할 거면서, 이상하게도 그 방향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단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가? 협상할 생각이 없다면 끝이다.”


“당신들의 요구, 너무 중앙에서 벌어지는 전투에만 쏠려있다고 생각 안 해요?”


“.......!”


뒤돌아서려는 빈스를 붙잡는 그림자의 목소리.


“당신들이 내건 조건의 크기는 분명 거대하죠. 하지만 그 조건 중에 북군과 남군의 대치를 벗어난, 즉, 당사자인 북브린타이나와 카나반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단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어떻게든 카나반의 왕족이라는 거대한 수단을,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성의 전투에 이득이 되도록 이끌고 싶은 조급함. 바로 그 조급함이 느껴졌어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죠."

투명한 달빛으로 어두운 후드 속의 그림자였지만, 빈스는 순간 그 안에서 떠오르는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당신들, 중앙군과의 통신이 두절됐죠? 그러니까 검성과 상의하지 못하고 멋대로 이런 조건을 내걸었던 거구요. 72시간이라는 제한을 둔 것은 우리가 조급해지길 바란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당신들이 조급했기 때문입니다. 중앙의 상황을 모르고 있는 지금, 한시바삐 그곳으로 합류해야 할 테니까요. 어때요? 제 말이 틀렸나요?”

빈스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 왜소한 그림자가 멋대로 내뱉은 말들에 조금이라고 하자가 있었다면 그는 콧방귀를 끼며 성으로 되돌아갔을 테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쪽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 존재에 대한 경계심과 호기심이 그의 이성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협상의 내용을 좀 수정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자신의 후드를 벗어 내린다.

높게 떠오른 달빛이 그대로 그림자를 들춰내었고,



동시에 빈스는 비명이 없는 경악을 내지른다.





“저랑 얼굴이 똑같은 놈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라고 말하며,

벤은 달빛과 함께 미소를 머금었다.





===================




“막아라! 에에잇! 막으란 말이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2진의 한복판이었다. 그랬기에 지휘관은 물론이고 기사, 병사들마저 아마 오늘은 우리가 나설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피터지게 싸우고 만신창이가 되어 진지로 복귀하는 것은 1진의 몫. 2진인 자신들은 중앙에 배치된 예비대라는 개념으로 만일의 사태가 아니면 움직일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만일의 사태’는 생각보다 일찍 그들을 덮쳐오고 있었다.


“기사들을 뭘 하고 있나?! 놈들은 스스로 포위망에 들어온 꼴이다! 사방에서 조이면 되지 않느냐!”


중앙에 포진된 1진의 군세만 해도 그 숫자가 일만오천. 그 중앙의 한복판을 가르며 돌파해온 적의 숫자는 그 반절의 반절도 되지 않는다. 돌파를 허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이긴 하나, 후속타가 없는 무모한 돌진은 포위라는 형태로 제압하기에 더할 나위 없을 터.

하지만 지휘관의 외침과는 달리, 현실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있었기에.



“다음.”



영력을 견디지 못해 부스러지는 창대를 내던지며 디미르는 짧게 숨을 내쉰다. 이미 온몸은 적의 피로 붉게 물들어있었고, 타고 있던 말은 전장에 생명을 묻었다. 뒤를 따르던 선봉대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있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반즈만큼은 마지막까지 디미르의 뒤를 따를 기세였다. 그녀 또한 온몸이 적과 자신의 피로 물들어있었으며, 비교적 여유를 유지하고 있는 디미르와는 달리 거친 호흡은 물론이고 떨리는 다리를 붙들고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디미르에서 창을 넘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을 위해 디미르를 따라나선 것처럼, 그녀는 주인을 잃은 창을 줍고, 필요하면 적의 목숨과 함께 빼앗았으며, 절대로 늦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모습을 흘끗 살펴본 디미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번째지?”


“예?”


갑작스러운 물음. 반즈는 반쯤 허리를 숙이고 호흡을 정돈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창 말이야. 몇 번째냐고.”


“아, 저....... 그게....... 모,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감히 예측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 치열한 전투가 시작한 이래로, 그녀는 오직 하나, 이 남자에게 창을 건네주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래. 나도 모르겠다.”

반쯤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드는 세 명의 기사를 향해 디미르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창을 가로로 휘두른다. 그 느긋한 속도에 기사들은 디미르의 힘이 빠졌다 생각하고 곧바로 파고들 준비를 했지만, 분명히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창자를 쏟기 시작한 자신들의 복부를 내려다보며 그들은 경악에 빠져야 했다.

“몇 개의 창을 박살 낸 건지, 몇 명의 목숨을 빼앗은 건지, 세는 것조차 잊어버렸어.”


그가 말을 마친 직후, 그의 위로 엄청난 규모의 공격마법들이 내리꽂히기 시작한다. 그 충격의 여파와 이어지는 후폭풍의 규모는 주변에 있던 북브린타이나의 병사들까지 찢어버릴 정도로 거대하면서도 압도적이었다. 혼란에 빠진 북군의 지휘관이 디미르를 잡기 위해 진내사격을 명했던 것이다.


피와 먼지가 뒤얽힌 먼지들 사이로 반즈가 시야를 되찾은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꼼짝없이 마법에 의해 가루가 되리라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와 가까이 있었기에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느긋한 미소. 하지만 그 미소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참담한 음색. 디미르의 푸른 눈동자는 자신의 창이 도륙하고 있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내전이라는 명목으로 이곳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 그리고 이대로 나를 방치한다면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목소리가 이 평원에서 사라질 테지. 증명은 끝났어. 남은 것은 당신의 ‘인정’이지.”


반즈는 폭염으로 흐릿한 시야 때문에 디미르의 목소리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폭발의 여운으로 먹먹했던 귀가 서서히 주변의 환성을 담아내기 시작했고, 그녀는 마침내 디미르의 앞을 가로막은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모한 돌파였다. 덕분에 너를 믿고 따라온 부하들은 의미도 품지 못한 채 사그라지겠지. 이것이 진정 너와 론크리스가 걸어온, 그리고 걸어갈 길이라면, 나는 브린타이나의 검성으로서 그걸 막지 않으면 안 된다.”


등장만으로 공포에 질려있던 병사들을 고무시키는 존재.

곁에 있으면, ‘패배’라는 단어를 절로 잊게 해주는 존재.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피를 흘릴 수 있게 해주는 존재.


전장의 악마조차 그를 시기하여 그 치욕스러움에 밤마다 하늘을 향해 오열케 했다는,


바로 그 존재.



전장의 기사.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




“ ‘검성으로서’라........ 당신의 그 책임론에 의해서 지금 저 병사는 다리가 뜯어져 나갔고, 저 기사는 허리 아래가 사라져버렸어. 예정에 없었던 이들의 희생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저 과정일 뿐이겠지.”


“국가의 반이 그녀에게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나머지 반을 이 참혹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은 위정자들의 고집일 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 터. 나로선 하루빨리 이 혼란을 잠재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렇다! 제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보기 드문 노인의 노성이 전장의 함성과 비명을 집어삼키며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그 파도와 같은 목소리의 흐름을 쫓으려는 듯, 디미르는 얇은 미소를 유지하고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찬란했던 태양은 어느새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었고, 흐릿한 비린내를 풍기며 하늘은 온갖 비린내와 비명을 쓸어 담기 위한 기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라도 오려나. 아니, 눈인가?”


디미르의 짧은 목소리는 바로 뒤에 있는 반즈만이 들을 수 있었을 정도로 얇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흐릿하지만,

중독성 있는 하늘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

자신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것이 누구의 피와 살점인지,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반즈는 회색빛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녀의 이성이 흐려질 때쯤,

갑작스러운 침묵이 정신을 휘어잡는다.


그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에 이끌려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2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5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