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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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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471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9.1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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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추천
25
글자
20쪽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DUMMY

“저딴 게 대표라니, 이번 기수는 망했어.”


다섯 번 연속으로 실수 없이 예행연습을 마치고 나서야 카논의 입에서 휴식이란 단어가 튀어나온다. 그와 동시에 탄식으로 얼룩지는 대강당. 하지만 저린 다리를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는 셰르의 입술은 한숨과 탄식을 품는 대신, 유일하게 이 지루한 연습에서 열외 된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하~아암....... 나도 동감이긴 한데, 너희들 구르고 있는 거 보니 다행인 거 같기도 하고.”


셰르의 비난 아닌 비난, 그리고 반복된 연습에 지쳐있는 모든 생도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는 주인공 리즈. 그녀가 다른 생도들과 다른 점은 예행연습에서 열외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남색정복과 익숙한 소위 계급장 대신 재봉선을 따라 붉은 나뭇잎이 수놓은 짧은 드레스. 그리고 말끔하게 묶어 올린 검붉은 머리와 허전한 목선을 대신하여 귀를 빛내고 있는 루비귀걸이까지. 임관을 앞둔 군인이라기보다는 귀족자제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몸에 밀착하는 드레스가 불편한 듯 계속해서 늘어나도록 바깥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짧았던 드레스는 결국 리즈의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구릿빛 허벅지와 윗가슴을 대담하게 노출시키는 중이었다.

왕녀이자 기수대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경박한 모습에 부러움으로 가득 찼던 동기들의 시선은 점차 웃음으로 대신 번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의 옷매무새를 고쳐준 것은 셰르와 함께 대열의 선두에 있던 유진이었다.


“이론 성적도 꽝이었고 원정에서도 그닥 한 게 없는데 왜 나한테 이런 옷을 입혀준 거지?”


유진의 정돈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옷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는 리즈. 결국 그녀는 유진에 의해 꿀밤을 맞고 만다. 셰르는 그 모습이 재밌는 것인지, 아니면 리즈의 질문을 비웃는 것인지 중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게 정치라는 거야. 이름 없는 평민이나 맨날 똑같은 귀족들보단, 왕녀가 기수대표로서 임관하는 게 보기에 좋잖아. 실제 요즘 신문에선 병사들과 원정을 떠났던 왕녀에 대한 이야기들뿐이니까. 시험적인 기사모병의 부작용이나 3할의 사상자를 낸 원정이라는 논쟁거릴 묻어버리기엔 더할 나위 없지.”


“다 필요 없고, 이 검, 그렇게 귀한 거라며? 난 애초에 단검이랑 활밖에 안 쓰는데, 괜히 비싸기만 하고 쓰지도 않을 장검은 왜 주는 거야?”

불평과 함께 리즈가 뽑아든 것은, 회색빛으로 빛나는 검신을 지닌 연철검이었다.

“지나 언니는 자기가 쓰던 걸로 맞춰서 받았다는데, 나는 이게 뭐야아.”


“그럼 나중에 팔아.”


“어? 그래도 돼?”


“되겠니?! 셰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당황하는 유진과 낄낄거리며 마주 웃는 셰르와 리즈. 훈련소에서는 물론이고 원정에 나가서도 줄곧 봐왔던 그들의 모습에 주변의 동기들은 어느새 피곤과 지루함이 가신 얼굴로 해맑게 웃는다.


셰르의 말대로, 리즈가 기수대표로 뽑힌 것은 다분히 선전의 의도가 깔린 결정이었다. 그녀와 같이 훈련을 받고 같이 원정을 다녀온 동기생으로서 불합리하다 생각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이 강당 안에서 그런 시선으로 리즈를 바라보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정작 가장 유력한 기수대표후보로 평가받던 셰르와 유진이 허물없는 모습으로 리즈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은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그러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리즈의 대표선출을 납득하고 있는 생도들이 알게 모르게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동기생들을 납득시킨 요소는, 리즈 본인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었다.

그들이 처음 훈련소에 발을 디딜 무렵, 생도들 사이로 왕녀가 이번 기수에 같이 훈련을 받는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강제적인 입대에 불만이 가득했던 생도들에게 그 소문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징용방식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이른바 ‘보여주기식’ 조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왕녀’란 결국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철부지임이 분명하며, 그로서 주변이 피곤해질 미래가 뻔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즈는 그들이 상상한 ‘그런 왕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자신이 처한 상황의 괴리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비록 다른 생도들과 마찬가지로

‘귀찮음’만큼은 감추지 않았지만, 꿋꿋하게 훈련과정에 임했고 목숨을 건 원정까지 동참했다.

그리고 그녀는 차별하지 않았다.

동기가 평민이든, 귀족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에 구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왕녀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정체를 가늠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리즈는 스스럼없이 모두를 대했다. 특유의 넉살로 결코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않았고, 훈련소에서는 앞서 나서기보단 뒤에서 조용한 배려를,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나서서 동기와 병사들을 보조했다. 근무시간에 있어 그녀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소대원이 없었으며 그녀의 화살이 구한 동기들의 생명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런 리즈의 모습과 처신이 가식이 아님을 동기생들이 확신하게 된 것은, 바로 원정 중에 그녀가 일반병사들에게도 똑같은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왕녀와 사병.

그 신분의 격차는 ‘동기’라는 굴레로 같이 엮여있는 자신들보다도 더욱 거대하다. 그럼에도 리즈는 자신의 ‘구별하지 않는 눈’을 유지했던 것이다. 냉정한 얼굴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밤엔 잃은 부하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그들은 바로 곁에서 지켜 봐왔다.

그러니 어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그녀를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자신들의 위에서 그 특유의 ‘눈’으로 모두를 내려 볼 날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작 본인은 모든 게 번거롭다는 듯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얘들아아, 이거 언제 끝나? 지겹지, 옷은 불편하지, 니들은 앞에서 구르고 있지, 거기에 교관님 목청 때문에 귀 아파 죽겠다.”


“리즈! 똑바로 앉아, 속옷 다보이잖아!”


“뭐, 검성께서 오셔야 수료식이든 뭐든 할 거 아니야. 근데 그 느긋한 인간이 제때 올지 모르겠네.”




“느긋한 인간이라 죄송합니다요.”


바로 뒤에서 들려온,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셰르는 순간 그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았고, 그답지 않은 날카로운 비명이 강당에 울려 퍼진다. 저마다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생도들의 시선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모두 이 존재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를 알아채고는 경악의 물결 속으로 빠져든다.


“거, 검성님?!”

물론 가장 큰 목소리로 당혹감을 내비친 것은 단상 위에 있던 카논이었다.

“여긴 어떻, 어어, 지금 그.......”


“예? 왜요? 한시까지 오라면서?”


끈질기게 자신의 품으로 달라붙으려는 리즈를 밀쳐내며, 벤이 카논에게 물었다.


“아니, 그냥 오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뭐랄까, 검성으로서의 그.......”


이것은 벤이라는 인간을 고려하지 못한 훈련소 측의 실수였다. 카논을 비롯한 그들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것은 직함뿐이 아닌 진정한 ‘검성’으로서의 벤을 위한 행사다. 그러나 정작 벤은 검성으로서 공식행사에 참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아아, 죄송. 제가 멋대로 들어온 건가요?”


“예? 아, 아닙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근데 그, 절차라는 것이.......”


카논은 그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절차는커녕, 이미 벤의 차림새부터가 글러먹었던 탓이다. 늘어진 셔츠에 잔뜩 구겨진 검정바지, 심지어 마법대학교의 로브를 걸치고 있지 않은가. ‘검성’이, 기사훈련생도수료식에, 마법사로브를!


“.......아닙니다. 그냥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단 위로 올라와 주시겠습니까?”


“에헿, 드디어!”


환성을 내지르는 이는 리즈뿐, 다른 모든 생도들은 이미 정돈된 분위기와 대열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굳이 카논의 호통이 없어도 그들은 오랜 주입식교육과 반복훈련을 통해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쭈뼛쭈뼛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강단에 올라서는 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의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고, 리즈가 아무런 사고도 치지 말고 그의 앞에 마주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지금부터, ‘제1기’ 카나반 통합기사단 훈련생도 수료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일동 차렷. 훈련생대표, 입장.”


모두의 기대(?)와 우려와는 달리, 리즈는 흔들림 없는 자세와 걸음으로 강단에 올라선다.


“훈련생대표, 국립기사 소위 엘리자베스 폰 미트라블루스, 오늘부로 영광스러운 공화국 기사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 잠깐만요.”

리즈의 말을 자른 벤. 움직임은 없었지만, 강당 안의 모든 눈동자들이 동요로 씰룩이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준비하신 건 알겠는데, 이런 형식적인 충성서약보다는 제가 따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생도들은 물론이고 카논을 비롯한 교관들까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중 유일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리즈는 우스꽝스럽고 커다란 동작으로 생도들의 시선과 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자신의 몸을 옆으로 치워준다.

한쪽으론 드높은 햇빛이, 한쪽으론 거대한 도시의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훈련소의 대강당. 그 엄숙한 침묵 속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벤은 모든 눈동자를 하나하나 담으려는 듯 가만히 생도들의 얼굴을 살펴본다.


그곳에 무엇이 깃들어있는지,

벤은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따로 절 소개할 필요는 없겠죠. 서로 초면도 아니고, 전장에서 지겹게 봤었잖아요. 무엇보다도-”

한걸음이면 추락. 그러나 벤의 발걸음은 단의 끄트머리에서 멈춘다.

“여러분들의 머릿수를 1/3줄인 장본인이죠.”

과연 겨울이 끝난 것이 맞는가 헷갈릴 정도로 시린 서릿발이 순식간에 강당을 휩쓸기 시작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가장 민감해야 할 인간의 입에서 너무도 무심하게 튀어나온 목소리. 모두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리즈의 얼굴에서도 결국 표정이 증발해버린다.

“새로운 개념의 통합군과, 그에 따라 개편되는 중앙기사단. 여러분을 ‘제1기’로 명명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실험대상이란 뜻이에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번 기수는 자원입대나 개별징집이 아닌, 아르다르를 주거지로 하고 있는 적정연령의 기사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제징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 선배들이 불가피하게 파견된 것과는 달리, 수료의 한 과정으로서, 그것도 우리의 전쟁도 아닌 전장에 나가셔야 했죠. 우선, 그 모든 계획을 세운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러분에게 상처와 죽음을 명령한 지휘관으로서, 이 불합리한 처사에 목숨을 걸고 따라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검성을 향해 박수를 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러분의 희생은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위태로웠던 동맹국을 구원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무너질 뻔했던 대제국동맹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와 여러분들의 향상된 기량을 통해 왕실전력분석관은 싱글벙글하며 앞으로 실전파견을 정식으로 훈련과정에 도입하도록 추진하겠죠. 저는 미련 없이 그 안건에 서명을 넣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로비..아니, 폐하도 그러시겠죠. 이것들이 바로, 여러분이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벤이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리즈가 한 손엔 회색빛의 검을, 한 손엔 본래 벤으로부터 넘겨받았어야 할 탕나무 깃발을 들고 곁에 다가와 있었다.

물론,

그 얼굴엔 느슨한 미소가 복귀한 뒤였다.

“여러분 중엔 평민도 있고, 귀족 출신도 있고, 심지어 왕녀도 있죠. 그저 기사의 피를 가지고 있고, 17세 이상 24세 미만, 그리고 아르다르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서게 되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바로 국가가 여러분에게 의무를 양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는 즉, 지금 공화국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께 여쭤보죠. 이 처사가, 이 제도가 솔직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여기 계십니까?”


끔찍한 침묵.


단순히 분위기에 압도된 것이 아니었다. 훈련소로 향하는 언덕에서, 동기가 죽어나가던 전장에 이르면서까지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의문이었으니까.


“맞아요. 합리적이지 않게 느껴지시겠죠. 자유의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으며,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우리의 주적이라는 아실레마제국을 한번 봅시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든 나잇대의 기사를 징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25세가 되기 전, 반드시 같은 기사와 아이를 가져야 하죠. 무작정 숫자만 늘리는 것도 아닙니다. 체계적인 교육과 끊임없는 실전경험. 그들이 200년 전 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린 그런 제국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린 욘처럼 막대한 자금도, 브린타이나처럼 풍부한 자원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이 인력, 바로 여러분의 희생이었죠. 지금도 여긴 계신 분들 중 몇몇은 국가가 자신에게 해준 게 무엇인데 희생을 해야 하냐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생각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반도의 제국식 통치이고, 그런 제국의 야욕으로부터 당신들의 불평을 지켜줘 왔던 것이 바로 공화국의 기사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사로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이 그토록 세금 내기 아까워하던 귀족들이죠.

아니라고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결국 입대를 해야 했던 게 바로 평민들 아니냐고요? 작년까지, 자원입대한 기사훈련생도의 8할이 귀족출신의 기사들이었습니다. 나머지 2할의 대부분도 ‘평범하게 강한’ 기사가 아니었기에 여러분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쫓기듯 입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5:5입니다.

자,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봅시다.

‘기사의 피’를 지녔으면서도 ‘기사’로서 살아오지 않았던 여러분들, 정말로 궁핍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오셨나요? 저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불만’도, 곧 ‘안락했던’ 삶을 빼앗겼다는 생각에서 오는 거니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노동생산성과 기대수명, 그것만으로도 수도에서 여러분들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나요? 그리고 어렵지 않게 가족을 찾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확신하며 살아오지 않으셨나요?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은 ‘붉은 모래의 가도’는 바로 그런 여러분들의 ‘안락함’을 위해 수백, 수천 년간 피를 흘려온 영혼들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희생도 한계에 다다라, 결국 여러분에게 손을 뻗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손을 뿌리치실 겁니까?”

본래 정해진 절차와는 반대로 벤이 리즈에게서 탕나무깃발을 받아든다. 그리고 그는,

그 깃발을 바닥으로 내던진다.

“원하신다면 저나 왕, 그리고 국가에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여러분 본인의 행복, 그 모든 이들의 미래에 자신의 피를 서약하세요. 단지 그 수단으로서, 저와 왕을 믿어주세요. 검성으로서, 그리고 미래에 여러분의 지휘를 맡을 사람으로서 드릴 말씀은 이겁니다.

사흘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사흘 뒤 오후 한 시까지, 이 강당에 돌아오지 않으신 분은 자동적으로 소위계급이 말소될 것이며 입소 전의 생활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강당에서 다시 무서운 교관의 얼굴을 마주하시는 분들은, 통합군의 일원으로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하는 단어가 되실 겁니다.”

처음부터 박수 따윈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벤은 그대로 뒤돌아 강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붙든 것은 리즈의 미묘한 미소였다.

“.......왜?”


“에헤, 그냥.”


평소처럼 팔을 붙들며 들러붙어 오려는 것이 아닌지 벤은 그녀를 경계했지만, 결국 리즈는 벤이 강당을 나설 때까지 그의 곁에서 실실 웃고만 있었을 뿐, 그를 그 이상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다.


바람은 역시나 봄을 품고 찾아온다.

폭풍처럼 지나간 겨울, 그 겨울을 고스란히 운명을 끝으로 내몰았던 이들의 숫자는 187명.




사흘 뒤, 입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표정을 품은 채 강당에 다시 모인 것은


정확히 187명의 얼굴들이었다.




===================




“팔루뎀 양도 건에 대해 결혼식 후 정상회담이 예정되어있습니다. 론크리스 국왕은 이쪽의 일정에 맞추겠다며 통보해왔습니다만, 욘의 대통령은 되도록 빨리 정리하고픈 눈치입니다.”


“어차피 휴가나 신혼여행 같은 건 저도 지나도 생각 없었으니까 총리님께서 바로 일정 잡아주세요. 오로메 경, 결혼식에 대한 사항은 전달이 됐나요?”


정신없이 서류와 말을 주고받던 로빈과 마누앙. 길게 이어진 경주 끝에 마침내 지목을 받은 오로메는 특유의 인자하고 깊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장소는 아스트로바톰의 캉페온 광장으로 최종협의가 되었고, 일반 시민들의 출입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근위대에 전달되었습니다. 드렌턴 경은 귀찮으신 모양이지만요.”


“당연하지요! 거기가 얼마나 구멍이 많은 곳인데!”

집무실의 입구에 서있던 드렌턴의 역정. 객관적으로는 분명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로빈과 오로메는 얇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나 드렌턴의 입장에선 그 미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민들에게 개방이라니....... 네가 아직 혼이 덜났지?”


“불안과 전쟁에 지친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고. 하루쯤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잖아.”


“맘 편한 소리 하기는! 쳇.”


그의 불만이 자신을 향한 걱정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로빈은 그 이상 드렌턴을 건드리지 않는다. 물론 그의 느긋함은 단순히 드렌턴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야근이 연일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거친 일정과 직무들. 그러나 로빈은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이 아님에도 줄곧 헤실거리며 정체모를 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민감하거나 짜증나는 안건이 연달아 이어져도 입가가 다물어지질 않는다.

드렌턴은 이 증상을 ‘새신랑증후군’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로빈의 증상을 더욱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지나의 부재였다.

둘은 신랑과 신부는 결혼 열흘 전부터 얼굴을 마주해서는 안 된다는 왕족의 관례에 따라야 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지금,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비어있는 침대의 옆자리가 로빈을 초조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던 시점에 진지하게 밤중에 몰래 지나를 찾아가는 것을 고민했던 그를 벤이 욕을 한바가지 퍼부으며 저지하지 않았다면 전통은 이미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원한다면 언제라도 미소를 교환할 수 있었기에 뜻밖에 찾아온 부재가 더더욱 로빈의 그리움을 배가시킨 것이다.



“로빈!”



그랬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지나의 얼굴과 목소리는 로빈에게 더없이 상쾌한 청량감을 선사해준다. 전통이고 뭐고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로빈은 그녀의 얼굴이 품고 있는 그림자를 눈치챈다.

그 어둠의 빛은,

지나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실려 순식간에 집무실로 내리깔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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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8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4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9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4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8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8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9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8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4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5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1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2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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