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1,373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5.22 20:25
조회
838
추천
31
글자
20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DUMMY

“생각해보면, ‘아뮤르’라는 이름은 이제 이 공화국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엉?”

까만 새벽의 하늘이 창문 사이로 겨울의 향을 내뱉고 있었지만, 서로의 온기로 젖은 침대 위만큼은 그 차가운 계절의 향수가 닿지 않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여운에 잠겨 깊은 잠에 빠져들어야 하는 시간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지나의 말은 오늘만큼은 일상과 다를 거라는 뜻을 품고 있었다.

하얀 어깨너머 위로 들려온 목소리에 로빈은 머리를 들어 약혼자의 눈동자를 찾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등진 채 자신의 팔에 안겨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그냥 아델이 하고 있는 일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전히 지나의 목소리는 건너편을 향해있다.

“애초에 할아버지는 대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통 있는 기사가문들이 궤멸당해버려서 떠밀리듯 검성이란 직책을 맡은 거니까. 따지고 보면 아뮤르는 제국의 ‘드리브달’이나 브린타이나의 ‘트리스탄테’ 가문같이 천 년이 넘는 기사의 역사, 즉 ‘명문’이라고 평가받을만한 역사는 없거든.”


“........흐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로빈은 알 수 없었기에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어깨너머로 지나가 자신의 팔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피부로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인해 느낄 수 있었다.


“아델이 하려는 일은 일부 가문들에겐 그런 ‘역사’를 지우고 백지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다가오겠지. 내가 그걸 망설임 없이 지지해줄 수 있는 건, 속으로 이 공화국에 더 이상 아뮤르라는 이름이 아무런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한센 경이 훌륭한 검성이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어. 그 이름을 물려받은 너도 충분히 훌륭한 기사고.”


“하지만 나는 검성이 되진 못했어. 이렇게 정체되어 있다가는 그냥 근위대 수준의 기사로 남게 되겠지. 이런 생각에 얽매여서 당장 결혼할 수 없다는 내 입장을 이해하고 기다려주고 있는 너에겐 정말 고마워. 근데 이것도 한계가 오는 것 같아.”


정체와 한계.

로빈으로선 지나를 떠올림에 있어 생각할 수도 없었던 단어들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공화국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검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검. 그리고 언젠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검이다.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미소 뒤에 숨겨진 전신의 흉터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의 감사는 분명 진심을 담고 있다. 그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는 ‘아뮤르’라는 이름의 계승을 위해선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델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서출차별금지법안’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서자들의 권리회복이 아니라 중심귀족과 변방귀족, 평민 간의 균형회복에 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대표귀족가문들 중심의 의회독점과 군부의 세습이 낳은 인사체계로는 국가위기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대전쟁으로 입증이 된 사실. 그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명예직이자 사제장에 가까웠던 ‘왕’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중앙정부로의 권력집중을 의도했던 카나반이었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 공화국은 다시 귀족들의 권력세습과 정치권의 암투로 인해 효율성을 잃고 있다는 아델과 총리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검성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 그 자체로도 이미 특혜라면 특혜라 할 수 있겠지만, 지나는 아뮤르라는 가문이 이러한 변혁의 바람 속에서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이는 지난 200년간 훌륭하게 카나반의 대표검으로 칭송받았던 할아버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 책임의 중심에 자신을 집어넣고 있었다.

물론 그 조급함을 로빈이 깨닫지 못할 리 없었다.


“기사의 유전이라는 특성상, 정계의 귀족가문은 몰라도 군부의 기사가문은 아마 당분간 그 위세를 유지할 거야. 지금 벤이 검성이란 직책을 맡고 있는 건 일종의 기만책. 진정한 ‘검성’으로서의 ‘검성’은 아직 카나반에 없다고 봐도 되겠지. 아뮤르라는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에 아직 시간은 많아.”


“그래. 너랑 계속해서 치고받고 싸우던 것도 바로 검성이란 자리와 네 옆이라는 자리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니까. 그걸 한발 양보해준 건 너였지. 난 계속해서 고집만 부렸고.”

마침내 지나가 돌아눕는다. 그리고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로빈은 얇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침울하거나 주눅 든 얼굴이 아니었다. 당장 모든 새벽을 비출 기세로 빛나는 태양 같은 눈동자와 새빨간 혀끝을 깨문 채로 웃고 있는 분홍빛 입술은, 언제나 봐왔던 지나의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이번엔 내가 양보해줄게.”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이는 지나. 로빈은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서로의 행복을 경쟁하던 두 미소는 이내 깊은 키스로 이어졌고, 지나의 허리와 부드러운 그녀의 볼을 탐하는 로빈의 손은 절대로 손안에 깃들어 있는 현실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아, 말해두는데, 네 이름은 따르지 않을 거야. 그게 중점이거든.”


“어련하시겠어. 애초에 그거 때문에 나랑 만나는 거 아니었어?”


짓궂은 로빈의 얼굴을 끌어당기는 지나.

다시금 진한 입맞춤이 숨소리를 삼켰고,

그렇게 겨울밤의 한기는 또다시 침대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




“보호막은 단순히 마력의 전개가 아니라 다가오는 모든 물리력과 마력의 본질을 꿰뚫고 부분적인 강도와 두께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장기적인 포격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가 있어요. 물론 저 정도 되는 전투마법사라면 보호막 따윈 쓰지 않고 모조리 요격해버리겠지만요.”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지 말고 좀 도와달라고요!!!”


짜증이 잔뜩 가미된 고도의 고함이었지만, 사방에서 폭발하는 마법과 총탄 속에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옆에서 느긋하게 전장을 감상 중인 오캄푸스 뿐이었다. 문제는, 그 고함의 원인 또한 그였다는 사실.


“제가 나서봐야 별다를 거 있겠습니까. 애초에 이렇게 매복공격 당할 걸 알면서 무리해서 파고든 지휘관 잘못이죠. 아, 11시 방향.”


“아오, 진짜!”


양옆으로 바위와 숲이 우거진 깊은 계곡. 군대가 행군하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협소하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일지라도 이곳이 매복을 당하기에 최적이라는 사실은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천에 가까운 카나반 별동대가 이 경로를 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마법사들이 고생 좀 하면 별 피해 없이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직접 맞붙을 정도의 수비군은 없을 테니까요.”

라는 지휘관이자 검성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 30분 전. 벤의 말처럼 직접적으로 견제를 해오는 군대는 없었지만, 진군속도를 늦추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따르느라 죽을 맛인 건 고도를 포함한 전투마법사들이었다.


“만나기만 해봐라....... 아주 제대로 죽빵을 꽂아줄 테니까.......”


하지만 특히 고도의 입에서만 거친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파견 나온 마법사들 중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잠재마력을 가지고 있으며 전직 그랜드마스터로부터 속성교육까지 받은 그녀가 이런 소규모 포격전, 그것도 방어전에 쩔쩔매고 있는 원인은 다름 아닌 곁에 있는 오캄푸스였다.


혈마법사가 아닌, 일반 전투마법사로서 원정을 시작하라는 그의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이유를 묻는 고도에게 망자는 ‘해보면 안다’라는 불성실한 대답으로 일관했을 뿐, 정확한 의도를 알려주지 않았다. 거기에 원정을 동행하면서도 방관자의 위치를 고집하고 있는 그가 고도는 영 못마땅했을 수밖에.

하지만 막상 포격이 시작되고 나니 고도는 조금은 마스터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대학에서 그녀를 연구직으로 뽑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녀의 항체와 내성이 특화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투마법사야말로 그녀처럼 특출난 내성을 가지지 않은 마법사들이 가장 큰 효율을 보일 수 있는 분야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전투마법사의 길을 걷기로 작심하고 훈련을 해온 이들에게나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소리. 다양한 성질의 마력을 융합하여 발현하는 일련의 행위는 이미 ‘혈마법’에 특화되어있는 그녀에겐 너무도 어색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고도에게 일체의 혈마법을 금하고 순수마력으로만 전투마법사의 직무를 다하라는 오캄푸스의 요구는 잔혹한 단기속성훈련이나 다름없었다.


“아, 계곡이 이제 끝나나 봐요.”


일정한 간격으로 날아들던 포격이 조금 뜸해진 이유가 있었던 모양. 오캄푸스의 말대로 저 멀리 개활지로 통하는 진입로가 보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숨의 주인공은 분명 마법사들일 것이라고, 고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군을 물릴 수 있습니다. 저기 밖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적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선두에서 나아가던 벤의 곁으로 다가오며 셰르 시즈키치가 입을 열었다. 모든 장교가 생도들로 이루어진 탓에 지휘를 맡은 벤을 보좌할 참모직도 아직 생도인 그와 유진이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훈련생도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휘관이자 검성인 벤에게 직언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카나반 원정군 지휘관인 토우칸 대군을 설득하여 별동대를 꾸리는 일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 숫자가 많지 않은 원정군을 굳이 3개로 나누어 운용해야 한다는 벤의 주장과, 그 중에 하나를 직접 맡아 지휘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셰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3천이라는 숫자의 군을 이끌고 동부경로의 하나를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정말로 론크리스 왕과 논의된 내용이 맞습니까? 9만이 넘는 남부군 중에 고작 3천으로, 그것도 혼자 북진을 한다니 아무래도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지휘관에게 의견을 표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동요를 겉으로 새어 나오게 하지는 마세요. 병사들도 덩달아 불안해합니다.”


느긋한 벤의 목소리와 시선. 그러나 셰르는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표정은 풀질 않는다.


“병사들이 불안한 게 당연합니다. 이미 북진경로는 노출됐고 매복공격까지 받았습니다. 기습이란 의미조차 퇴색된 3천의 별동대로 어떻게 저곳을 돌파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벤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서 흥분한 생도의 얼굴을 돌아본다. 여전히 느슨한 표정이었지만, 그 먹색 눈동자 너머로는 확연하게 목표를 향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저기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적군은 이미 정찰과 매복을 통해 우리 군의 구성과 규모를 모두 보고받았겠죠. 그럼에도 좁은 진입로에서 우릴 방어하지 않고 돌파를 허용하겠다는 것은, 자기들이 이쪽을 압도하여 쌈싸먹을 수 있다는 객관적, 주관적 판단에서 비롯된 거겠죠.”


“그러니 더더욱 나아가면 안 되는-”


“셰르, 셰르 시즈키치라고 하셨죠? 카니아로부터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전부터 음지에서 활동하신 경력이 많으시다고요. 뒷골목에서 갈고 닦은 그 본능이란 이름의 감각은 기사로서는 훌륭한 자원이 될 겁니다.”

벤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이름과 내용에 셰르는 잠시 숨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벤의 날카로운 혀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군인이자 지휘관으로서의 감각은 별개입니다. 셰르, 당신은 방금 30분 정도 이어진 적의 매복공격으로부터 무엇을 보셨죠?”


“......예?”


“좁은 계곡은 척후대가 움직이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죠. 동시에 다가오는 적에게 매복으로 가장 빠르고 확실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요. 하지만 적의 공격은 끈질기긴 했어도 우리 마법사들의 보호막을 뚫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적의 지휘관은 이쪽을 웃도는 객관적 전력만을 믿고 진입로라는 훌륭한 방어선을 포기하는 자만을 저질렀습니다. 아시겠어요?”


다시 말을 재촉하여 나아가는 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셰르의 뒤로는 그와 같은 표정을 한 유진과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리즈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벤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셰르는 마침내 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지휘관은, 적을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 만큼이나 아군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




“다른 지휘관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군을 이끌고 나가다니! 폐하, 정식으로 카나반에 항의를 하셔야 합니다!”


“막상 전투에 참가하려니 아깝고 무서웠던 모양이지요. 애초에 전부터 서로 피를 흩뿌려왔던 적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허허.”


크리스의 예상대로, 카나반의 검성이 카나반 원정군을 이끌고 남부군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곱게 받아들일 지휘관은 없었던 모양이다. 저마다 침을 튀기며 벤의 무례함과 카나반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지휘통제실의 풍경.


“그의 출정은 내가 허락한 거라고 하지 않았나. 괜히 남부군 본대에 남아 지휘체계에 혼선을 주기보다는 별동대로서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뿐. 아니면 내 결정에 불만이 있다는 소린가? 경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적들만을 생각하라.”

그런 이들을 진정시키기엔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불편한 시선을 완벽히 거두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휘천막은 다시 평화로운 침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옥스토브라카 성에 대한 공성은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이루어질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 성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 문제는 적 본대의 움직임이다. 서쪽을 비롯하여 동쪽의 모든 계곡과의 통신망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통신장교들과 해당 마법사들에게 이점을 다시 한 번 숙지시키도록.”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지휘관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크리스. 모두가 이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크리스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폐하!”


어느 기사가 다급한 얼굴로 가장 무거운 얼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는 크리스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당연했다.


“뭐냐?”


“옥스토브라카에서 적이 요격을 나섰습니다!”


“.....뭐?”


크리스는 재빨리 천막을 빠져나온다. 그리곤 곧바로 말에 올라타 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의 뒤는 디미르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언덕에 올라선 그녀가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천막으로 들어선 기사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저 멀리, 활짝 열린 옥스토브라카의 성문에서 대규모의 군대가 쏟아져 나오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흐음, 이상한데. 놈들의 목적인 저기서 시간을 끄는 게 아니었나?”


입술로써 먼저 반응한 이는 디미르였다. 그는 선이 가느다란 턱을 쓰다듬으며 크리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다른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아랫입술을 씹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당혹감에서 벗어난 지휘관은 역시 그녀였다.


“공병대와 공성병기들을 뒤로 물러라. 1진과 2진의 기병대만을 뽑아서 서쪽에 대기시켜. 내가 신호하는 대로 적의 우익을 돌파한다. 전투마법사와 방패병, 창병은 중앙 선두에 배치해. 화력전은 초기엔 방어위주로, 이후에 상황을 봐서 내가 태세전환시기를 잡아주겠다. 지원화기는 대열 사이에 빠짐없이 배치하도록. 중앙의 선봉은 조던 반즈에게 맡긴다.”


“반즈라면, 옥스토브라카의 영주였던 조던 스트라토스의 딸 말이지?”


디미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 선봉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동기부여가 되겠지.”


그녀와 디미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지휘관들은 그녀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한두 명씩 빠져나갔기 때문에 이미 언덕에 남아있는 그림자는 둘뿐이었다.


“정석대로 대응하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이래서야 마치 선빵을 빼앗긴 기분인데. 설마 놈들의 본대가 옥스토브라카에 주둔하고 있었던 건가?”


“모르지.”

짧게 대답하며 말머리를 돌리는 크리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겨울하늘보다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가장 큰 곳보다는 작은 곳에서 결말이 뒤틀릴 거야.”






남부군 2진을 제외한 4만의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평원에서 진형을 이루기 시작한다. 옥스토브라카 성에서 요격을 나온 군대의 진군속도가 결코 느리다고 볼 순 없었지만, 그들이 평원에 당도했을 댄 이미 남부군은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한 번의 명령만 있다면 이제 평원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마법과 포격, 그리고 비명과 핏자국으로 선명하게 물들게 된다. 대치하고 있는 두 군세의 규모는 누가 보아도 남부군의 우세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남부의 모든 지휘관들은 어째서 저쪽이 수성을 포기하고 군을 이끌고 나온 것인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남부군의 장교들 중에서도 의아함을 품고 있지 않은 얼굴이 하나 있었으니,


선두에서 다가오는 북부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조던 반즈, 그녀였다.


처음 크리스로부터 복수의 기회를 보장받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왕의 격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이 그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살짝 감격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옥스토브라카의 땅을 다시 밟게 된 것도,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원수를 향해 검을 쥘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론크리스 국왕의 배려. 그 믿음과 배려에 보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



“전력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적의 기병은 크게 신경 쓰지 마라. 아군 마법사와 지원화기를 믿어라. 전황이 고착된다면 선두는 나와 함께 돌파하며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


“반즈 님.”


반즈는 이미 부관이 말하기 전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 또한 북부군 선두에서 홀로 앞서 나오기 시작한 그림자를 알아챈 것이다. 느긋하게 말을 몰아 다가오는 그림자의 태도는 모든 남부군에게 불편함을 선사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상부로부터 특별한 명령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따라서 반즈는 그 그림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다가온 그림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브린타이나 왕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에,

그리고,

여기 있을 거라고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던 얼굴이기도 했기에.




“반란군의 수장께서는 직접 선두에 서지 않으시는 건가?”


가볍게 창을 휘두르며 목을 가다듬는 그림자.


“아쉽군.”



라고 말하며,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는 씁쓸하게 웃었다.


작가의말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비평으로 은혜를 입었던 데스레이지님이 추천까지 해주신 덕분에 선작수도 갑자기 늘었네요 O_o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9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8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9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72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7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77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22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64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74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5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93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9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9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6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65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9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62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8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1,007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24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23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24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10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55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30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82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6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9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74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45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60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76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26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1,006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7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6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61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21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9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7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11 35 23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9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11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1,001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801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8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55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7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6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8 34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